지금 같은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한국 반도체와 일본 반도체의 차이가 여기에서 비롯됨. 한국 반도체는 그 재편 과정에서 이득을 볼 준비가 되어 있고, 일본 반도체는 그럴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임.
사실
이론적으로 미중 패권전쟁에서 가장 혜택을 볼(미국의 지원을 가장 많이 받을) 나라는 일본임. 우선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
최후의 보루이고, 국력도 미국의 동맹국들 중 가장 강하고, 결정적으로 친미 자민당 정권이 계속 해쳐먹는 (당 내 계파는
바뀌겠지만) 나라라서 외교&정치적으로도 일관성이 있어서 미국 입장에서 매우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이기 때문임. 워렌 버핏이
최근에 TSMC를 매도하고 일본 주식을 적극적으로 매수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요인이 크다고 생각됨.
여담으로
일뽕들이 자꾸 한국은 다음에 야당이 집권하면 친중 국가가 될 것이라서 미국이 손절할 것이라는데(그래서 미국이 일본에 몰빵할
것이라는 주장), 야당이 집권하는 것과 한국이 친중으로 돌아서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임.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퓨 리서치 센터를
포함해서 한국의 모든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 국민 중 최소 80% 이상이 중국과 시진핑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음. 한중
수교 30년 이래 최악의 수준임. 또한 이런 성향은 연령과 정치적 성향을 가리지 않고 국민 전반에 걸쳐 나타났음. 즉, 좌우 그
어느 정권이 집권하던 한국 정부와 한국 국민들 모두 결정적인 상황에서 중국을 택할 일은 절대 없다는 말임. 더욱이 그래도 예전에는
중국에 물건 팔아먹을 일이 많아서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이런 중립 외교 주장이 먹혔는데, 이제는 뭐 경제까지도 미국
밖에 답이 없으니 한국이 중국 편에 설 이유가 더더욱 없지 ㅋㅋㅋㅋㅋㅋ 결정적으로 미국이 한국을 레드팀이라고 생각했으면 대만처럼
국내에 대규모 반도체 FAB을 못 짓게 했겠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일본에 제대로 된 칩메이커가 있기만 했더라도
미국이 추진하는 반도체 공급망 프렌드쇼어링의 가장 큰 수혜는 일본이 봤을 것이라고 생각함. 계속 말하지만 반도체 산업은 천하의
미국이라도 모든 밸류 체인을 독점하는 게 불가능하고, 따라서 믿을 만한 우방국에 밸류 체인을 위임(프렌드쇼어링)해야 하는데, 지금
미국에게 가장 중요한 동맹국은 일본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거든. 예컨대 지금 일본에 글로벌파운드리 급 파운드리 회사 정도만
있었어도 미일 양국으로부터 엄청난 지원을 받았을 것임. 권석준 교수님의 주장, 이제는 중국보다도 공급망 재구축을 부활의 기회로
삼을 일본 반도체를 더 조심해야만 한다는 말에 부분적으로 동의하는 게 이 때문임.
그런데 일본 반도체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을 준비도, 능력도 전혀 없다고 생각함. 다 차려준 밥상을 1픽이 못 받아 먹으면 누가 먹겠냐? 당연히 2픽이 이게 왠
떡이냐 하고 먹겠지. 반도체 산업이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본 집약적이고 고도화된 상황에서 일본 반도체는 일단
파운드리에서는 제대로 된 칩메이커가 전혀 없고, 메모리에서는 그나마 유일한 칩메이커인 키옥시아의 경쟁력이 너무나도 뒤떨어짐.
아무런 기반이 없는 나라가 반도체 산업에 진입해서 성공하는 건 이제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있음. 그나마 중국이라면 가능할 지
모르겠지. 하지만 일본은 중국이 아님.
예컨대 TSMC와 삼전은 매년 반도체에 40~50조 원을 투자하는
상황에서(하물며 인텔도 연간 200억 불은 투자함), 일본이 국가적 역량을 겨우 쥐어 짜내 만들어 낸 라피더스의 10년 50조 원
투자는 이 바닥에서는 진짜 별 것 아닌 푼돈임. TSMC가 일본에 짓는 파운드리 FAB도 공정 기술, FAB 규모 측면에서 별
의미가 없음. 더욱이 지금 일본은 반도체 엔지니어들도 부족하다고 난리임. 왜? 1980년대 이후 거의 대부분의 일본
칩메이커들이 몰락하면서 일본의 반도체 엔지니어 양성 프로그램은 진작에 무너졌고, 또 능력 있는 엔지니어들은 죄다 외국에 나갔거든.
하지만
한국은 다름. 삼전과 하닉이라는 메모리, 파운드리 모두에서 매우 강력한 칩메이커들을 보유하고 있고, 이들은 이번 공급망
프렌드쇼어링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만큼의 막강한 자본력과 투자 여력 역시 있음. 인적 자원 역시 일본에 비하면 훨씬 풍부함. 그에
비하면 일본은 딱 그거지. 축구로 치면 외질 있던 시절 아스널이지. 외질이 아무리 많이 킬패스와 기회 창출을 해도 골게터들이
죄다 병.신이니 골을 못 넣잖아? 일본이 능력이 없어서 킬패스를 받아도 골을 못 넣으면 이제는 한국이 그 킬패스를 줏어 먹어서 골을
넣어야지.
나는 그래서 이번 반도체 공급망 재편 과정이 한국에 엄청난 축복이라고 생각함. 메모리와 파운드리에서
위협적인 경쟁자들(중국, 대만)은 미국이 대가리를 깨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원래라면 미국이 공급망의 파이를 가장 크게 나눠 줄
최혜국인 일본은 그것을 받아 먹을 능력조차 없거든. 그러면 당연히 2번 타자인 한국이 그것을 받아 먹겠지. 한국 반도체의 실력도
뛰어난 것도 맞고, 운도 좋은 게 맞는데 그 운을 언제든 잡아챌 수 있는 준비 태세도 결국에는 실력이라고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