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 국내 반도체 업계의 화두는 극자외선(EUV) 장비였습니다.
네덜란드에 본사가 있는 ASML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업체뿐 아니라 미국의 인텔, 대만의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제조업체들을 고객으로 두고 있습니다. 연간 40대가량의 EUV 장비를 생산하고 있지만 공급이 수요를 쫓아가지 못해 반도체 업체들 간 장비 확보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ASML은 반도체 업계의 '슈퍼 을'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 난야 등의 업체들도 앞다투어 EUV 장비 확보에 나서면서 경쟁이 더욱 심해지는 상황입니다.
극자외선 파장의 광원은 기존 불화아르곤(ArF) 광원보다 파장의 길이가 10분의 1 미만으로 짧아 더 미세한 회로를 그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10㎚(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급 미만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EUV 노광장비가 필수적인 것이지요.
자연스럽게 반도체 패권경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도 이 EUV 장비가 민감한 주제로 떠올랐습니다. 이미 일찌감치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는 이전부터 중국에 EUV 장비가 반입되는 것을 주시하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로이터통신은 지난 18일 미국 백악관 관계자 등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 장쑤성 우시의 SK하이닉스 D램 반도체 공장에 네덜란드 ASML이 독점 생산하는 EUV 노광장비 반입이 어려울 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
물론 아직 미국 정부가 이러한 입장을 명확하게 밝힌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로이터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미 백악관 고위 당국자는 SK하이닉스의 EUV 장비 반입을 허용할 것인지 묻는 말에는 언급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당국자는 조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군 현대화에 쓰일 수 있는 최첨단 반도체 개발에 미국과 동맹국의 기술을 활용하는 것을 막는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는데요.
이에 따라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으로 SK하이닉스만 피해를 볼 것이란 전망도 나왔습니다.
SK하이닉스는 한국과 중국 양쪽에 D램 반도체 공장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2월 ASML과 2025년까지 4조7500억원 규모(약 20대)의 EUV 장비를 들여오기로 계약한 상황인데요. 이미 SK하이닉스의 최첨단 공장인 경기도 이천의 M16에서는 해당 장비가 가동 중입니다. 중국으로의 EUV 장비 도입이 늦어진다면 중국 공장의 공정 개선이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다만 이에 대해 SK하이닉스 측은 "EUV 장비는 국내 도입도 아직 초기이며, 중국 우시 도입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면서 "국제 규범을 준수하며 중국 우시 공장을 운영하는 데 문제없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힌 상태입니다. 국내 공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정 수준이 낮은 중국 공장에 EUV 장비를 도입할 때까지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당장 생산에 차질이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란 입장입니다.
그러나 반도체 업계에서는 미국의 이런 방식의 제재가 장기화하면 SK하이닉스가 중국 우시에 운영하고 있는 공장의 공정 개선에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시 공장은 SK하이닉스 D램 생산량의 30% 이상을 생산하고 있으며 이는 전 세계 D램 생산량의 10%를 넘어서는 양입니다.
반도체 공정은 그 특성상 끊임없이 첨단 장비와 공정을 적용해 제품을 개량하고 생산 효율을 높이는 것이 필수적인데요. 나노 단위 경쟁이 펼쳐지는 초미세공정에서는 투자 시기가 조금만 늦어져도 세계 경쟁력에서 크게 밀려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SK하이닉스 중국 우시 공장이 경쟁사인 삼성전자나 미국의 마이크론처럼 적기에 EUV 장비로 공정을 개선하지 않는다면 비용 절감과 생산 속도 개선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어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해 업계 최초로 D램 생산에 EUV 공정을 적용한 삼성전자는 최근 업계 최선단인 14나노미터 D램 양산에 돌입한 바 있습니다.
다행히 중국 시안에 낸드플래시 공장을 운영하는 삼성전자의 사정은 다소 나은 편입니다.
EUV 장비는 D램과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정에 집중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인데요. 다만 EUV 장비를 시작으로 반도체 장비 전반에 대해 미국 측 제재가 강화된다면 삼성전자 또한 공정 개선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앞서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국가안보상 위협을 우려해 자국 주요 반도체 기업인 인텔의 중국 내 생산시설 확대에 제동을 걸기도 했습니다. 인텔은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를 해소하기 위해 최근 중국 청두 공장에서 핵심 재료인 실리콘 웨이퍼 생산을 늘리려고 했다가 정부의 반대로 계획을 철회했습니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태가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에도 영향을 미칠지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입니다.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는 경쟁 당국의 기업결합 승인 심사 대상 8개국 가운데 중국의 승인만 남아 있는 상태인데요. 당초 연내에 승인이 예상됐지만 미국 측 행보에 불만을 품은 중국 정부가 애꿎은 하이닉스에 화풀이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는 실정입니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매일경제와의 통화에서 "사실상 미국 정부가 중국 내에서 EUV 장비를 활용한 반도체 생산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라며 "미국 상무부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업체들이 영업 비밀까지 제출한 상태에서 중국으로의 생산장비 반입까지 막는 것은 과도한 조치"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국내 반도체 업체들의 생존을 위해 이미 미국 내 반도체 부족 현상 완화를 위해 이들 업체들이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