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이런 親日이라면 응원합니다
이한수 여론독자부장
입력 2020.12.15 03:00
지금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걸그룹은 데뷔한 지 보름도 안 지났다. 지난 2일 정식으로 데뷔하기도 전에 연말 열리는 일본 가요계 최대 행사(홍백가합전) 참가를 확정했다. 다섯 달 전 선보인 ‘프리 데뷔곡’ 뮤직비디오는 조회 수 1억8000만 회를 넘어섰다. 데뷔곡은 발표하자마자 오리콘 차트 1위에 올랐다. 세계적 인기 그룹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도 이들에게 밀렸다.
일본 다수 언론은 이 신생 걸그룹이 일으킨 선풍적 인기를 “사회현상”이라고 표현한다. 유명 연예인부터 일반 국민까지 소셜미디어에 춤을 따라 한 영상을 올린다. 이 걸그룹 이름은 니쥬(NiziU). 올해 6월까지 1년간 진행한 오디션 프로그램 ‘니지(무지개) 프로젝트’에서 뽑힌 10대 소녀 아홉 명이 팀을 이뤘다. 일본 전국에서 몰려든 지원자 1만 명 중 선발했다.
일본인 걸그룹 '니쥬'. 가수 겸 프로듀서 박진영이 일본 방송과 온라인으로 방영한 오디션 프로그램 '니지 프로젝트' 에서 지원자 1만 명 중 9명을 뽑았다.
멤버는 모두 일본인이지만, 한국 연예기획사 소속이다. JYP 프로듀서 박진영(48)이 “세계에서 승부할 수 있는 걸그룹”을 목표로 일본 소니뮤직과 함께 오디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혼자 심사위원을 맡고 직접 최종 멤버를 뽑았다. 고된 훈련으로 완성형 아이돌을 만드는 한국 방식을 그대로 적용했다. 한국 걸그룹 트와이스를 동경한다는 일본 소녀들은 서울에서 여섯 달간 합숙 트레이닝을 받고 한국 아이돌 노래를 부르며 경쟁했다. 일본 시청자들은 매 회 성장하는 참가자를 보면서 감동하며 울고 웃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갓 데뷔한 걸그룹에 대해 우리 온라인에 험한 비난이 일부 올라와 있다. “K팝 정체성을 더럽힌다” “한국 기술력을 팔아먹는 짓” “과거 친일 이완용과 뭐가 달라” 같은 말이다. 박진영이 한류 아이돌 육성 노하우를 유출하는 친일 행위를 했다는 비난이다. 1600년 전 일본에 학문을 전한 백제 왕인 박사도 친일이라고 할 기세다.
우리 시민 의식 수준은 그렇게 낮지 않았다. 친일 논란은 더 번지지 않고 수그러들었다. 문화를 교류하는 일이 평화의 바탕을 일구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갈 길은 멀다. 죽창 들자던 1960년대 생 전 법무부 장관은 제쳐 두더라도 1980년대 태어난 젊은 정치인마저 ‘친일 팔이’에 나선 걸 보고 절망했다. 여당 국회의원 처지이니 검찰 파괴를 개혁으로 포장하는 일은 차라리 이해할 수 있다. 이 서른일곱 살 의원은 “독립운동이 시끄럽다고 친일할 수는 없는 일”이라며 친일 장사꾼 대열에 합류했다.
친일 굴레 덧씌우기는 이제 그만할 때 됐다. 신임 일본 대사는 한국 영화를 즐겨 보고 신승훈 콘서트에 다녀온 ‘친한파’라고 한다. 친근감이 느껴지지만, 그는 당연히 일본의 국익을 위해 일할 것이다. 반대로 우리 주일대사는 미소라 히바리 노래를 즐겨 부르는 ‘친일파’이면 안 될까. 우리 국익을 관철하고자 일본 국민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친일’을 하면 정녕 안 되는 일인가. 문화와 기업은 1류로 달려가는데 정치는 아직도 4류에 머물러 있다.
한국형 일본인 걸그룹 덕분에 한류에 대한 관심은 더 커지고, 혐한 여론은 더 누그러졌다. 박진영이 오디션 참가 소녀들에게 우리말과 일본어를 섞어가며 한 충고는 “마법 같은 말”이란 평가를 받으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일본 포털에 ‘J.Y.Park 명언’을 검색하면 주르륵 뜬다. “재능이 꿈을 이뤄주는 게 아니다. 과정이 결과를 만들고, 태도가 성과를 낳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다. 혐한 인사로 유명했던 방송인 마쓰코 디럭스도 태도를 바꿨다. 최근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박진영을 인터뷰하며 높이 평가했다. 이런 게 친일이라면,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