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열풍은 장기적으로 국내 엔터계를 고착화시킬 것이라고 예상된다.
엔터 시장의 특성을 결정하는 것은 소비자들의 성향이다.
지금까지 케이팝의 위상을 만들어 낸 것은
익숙한 것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것에만 반응하는 젊은 소비층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새로운 물이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젊은 층에게도 똑같이 통해왔던 것이다.
반면 트로트 소비층은 트로트라는 틀을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런 보수적인 성향이 방송과 음악 생산자들에게는 안정성을 안겨 줄 것이다.
트로트를 원하는 소비층에게 트로트만 제공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전처럼 방송과 음악에서 항상 새로운 장르, 창법, 비주얼, 안무, 스타일링, 미술을 고민 할 필요가 없어진다.
트로트 인물, 트로트 장르, 트로트 창법, 트로트 비주얼, 트로트 안무, 트로트 무대 미술만 준비하면 된다.
덕분에 방송과 음악 제작사들은 제작 신입을 받을 필요성도 적어질 것이다.
어차피 중년층의 취향은 중년층이 잘 맞춰 줄 테니.
그냥 하던 사람이 계속 하면 되는 것이다. 굳이 참신한 인재를 받을 필요가 없어진다.
그럼 결국 생산되는 방송, 음악 작품들은 마치 일본마냥 정체된 상태로 남게 될 것이다.
특히나 아이돌 제작이나 출연처럼 다인원, 장기간의 대규모 투자의 위험성을 감수할 필요성이 없이
솔로 트로트 가수를 배출하면 훨씬 적은 투자로 더 많고 안정적인 수익이 약속된다.
지금 당장만 하더라도 트로트 솔로가 수십만장의 앨범을 팔고, 모든 방송과 광고에서 부르지 못해서 안달하며
방송, 음악 생산자들에게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수익을 주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이돌 기획사들은 그럴일이 없다'라고 말할지 몰라도 이미 아이돌 기획사가 트로트 가수 배출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점점 '새로운 물'을 생산할 필요성을 잃어가게 될 것이고, 그런 물을 만들 사람을 받을 필요도 없어진다.
이렇게 가정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리가 없다'
'트로트가 나온다고 젊은 층이 트로트 음악을 소비하겠냐? 계속 아이돌이나 보컬 곡을 듣지'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새로운 물'이 '고인 물'로 변해버린 실제 예를 보면 그게 무조건 말도 안되는 일은 아니라고 본다.
1. 고려라는 고인 물을 타파하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물을 만들었지만, 결국 조선도 고인 물이 되었고 망했다.
조선이 고인 물이 된 것에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변화를 거부하는'-'고인 물 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2. 근세에 들어서 일본의 다수의 기업들이 세계적으로 성공 했다가 갑자기 다 같이 몰락한 이유도 같다고 본다.
3. 특히 일본의 음악 시장이 '고인 물'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일본의 음악도 예전에는 '새로운 물'이었고 세계적으로도 신선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음악 시장에서 안정적인 수익을 낼 '악수회 아이돌' 시스템을 만들어내고 부터
그 소비자가 시장의 주류로 자리매김하며 시장 전체를 고착화 시켜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이 악수회 아이돌 소비층의 특성이 트로트 소비층의 특성과 상당히 유사하다.
악수회 아이돌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일본의 돈과 시간이 많은 중년 남성층이 큰 돈을 쓰면서 부터다.
(일본 남아이돌을 소비하는 여성층이 젊다고 하더라도 소비 성향에서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안정적이고 강력한 소비력을 가지고,
가수를 자신들이 원하는 '미숙한 아이돌'로 계속 남아있 게 만들었다.
즉 자신이 소비하는 제품이 변하지 않기를 원했고, 생산자들도 그런 점을 노려서 제작했다.
그렇게 일본은 나이와 돈이 많은 사람이 시장의 칼 자루를 쥐게 되니까 젊은 층은 시장에 순응 하기만 했다.
한국이라고 안 그럴까? 한국도 결국 돈 때문에 새로운 물을 계속 판 거지, 젊은 층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니다.
돈이 안 되는 소비층의 목소리는 무시되며, 돈이 된다면 고인 물을 썩은 물로 만들어도 좋다고 할 것이다.
시장이 그렇게 변하고 나면 젊은 층은 무기력해지고 시장에 순응하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미 새롭고 강력하게 등장했던 조선 초기, 일본 기업, 일본 음악이 몰락했던 것처럼
우리나라 소비층의 성향도 무기력해지고, 기득권에 의한 고착화가 일어나는 역사가 '또' 반복 될 수 있다.
4. 재미있게도 트로트도 새로운 물이었다. 국악, 민요라는 고인 물에 대항하여 서양 현대 악기들을 받아들여서
만들어진 새로운 물이었지만
결국 그렇게 등장한 새로운 물도, 그 소비층이 나이가 들고, 기득권이 되면
그 기득권을 놓고 싶지 않기 때문에 변화를 거부하는 고인 물이 된다.
5. 한국인들에겐 타고난 트로트 수용성이 있고, 특히 아예 그냥 트로트 신동으로 태어나는 애들도 많다.
나이 상관 없이 세계 어디서나 트로트같은 음악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층은 일정 비율로 존재할 수 있고
그중에 젊은 층도 자연스럽게 트로트를 소비하게 될 것이다.
또한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큰 빛을 받지 못한 가수들이 트로트로 전향했지만
이젠 아예 처음부터 트로트로 안정적인 성공을 원하고 시작하는 지망생들이 늘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결국 트로트는 '우직하게' 시장을 잠식 하게 될 것이다.
트로트 소비층에겐 돈과 시간이 훨씬 많다.
젊은 층의 음악은 돈과 시간이라는 측면에서 훨씬 기반이 빈약하다.
어쩌면 결과가 정해져있는 싸움일 수도 있다.
6. 아이돌 음악이 국내에선 고인 물이기 때문인 것도 있다.
그래서 트로트 열풍 이전부터 아이돌은 주류 방송에서 점점 설 자리가 없어지고 온라인 미디어로 옴겨갔지만
여전히 대중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송 출연은 굉장히 중요하다.
방송에서 인지도가 없으면 방송, 광고, 공연 섭외도 어려워질 것이다.
결국 젊은 층을 겨냥한 아이돌 음악은 점점 수익성이 떨어지는 길 밖에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은 국내 기반을 잃어버린다는 말이 된다.
쉽게 '이젠 아이돌 음악은 세계 시장만 바라보고 가면 된다'라고 말 할지 몰라도
해외에 전달 될 케이팝 소재를 생산하던 방송과 음악 생산자들이 점점 그 작업을 멈추게 된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국내에서의 수익이 불안정하면 다음 앨범을 제작할 자금이 없게 된다.
7. 이후 가장 심각한 것은 새로운 창작자들을 받을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하고, 그게 성공적인 사업이라면
거기에 맞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양성하고 채용해야 한다.
그런데 고인 물 화 되면 그럴 필요성이 적어진다.
그럼 교육, 훈련, 채용 분야도 멈추게 된다.
그런 과정으로 망한 것이 일본의 조선 사업일 것이다.
(일본은 조선업 투자가 줄고 설계·연구인력을 감축하자 동경대 등 일본의 대학교들은 차례로 조선학과를 없앴다 )
-결론과 요약-
트로트 열풍은 그 소비층의 특성 때문에 사라지지 않고 계속 되며
한국의 방송과 음악의 생산과 소비의 특성을 고착화 시킬 것이며
그렇게 방송과 음악의 중심이 트로트로 옴겨가면
케이팝의 선두주자였던 아이돌 음악은 국내에서 위축되면서 해외로 나갈 힘을 갖기 어려워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트로트계는 국내 소비층만으로 충분히 안정적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케이팝 해외 시장의 위축에서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실제로 보여준 사례가 바로 일본의 경우이다.
'그건 일본인의 보수적 특성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조선 말기, 일본의 몰락한 대기업들, 일본 음악, 트로트.. 이런 모든 대표 고인 물들이 사실은 모두 처음에는 '새로운 물'로서 혁신을 이끌었던 것을 떠올려 본다면
우리나라에도 얼마든지 고인 물 특성과 역사가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