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우리나라 대형 연예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와 대형 입시 업체인 종로학원하늘교육은 글로벌 K팝 교육기관인 ‘SM인스티튜트’를 서울에 세우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런데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에서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느냐”는 문의 이메일이 1000통 넘게 쏟아졌다. 영어·중국어·일본어는 물론 인도어, 베트남어, 포르투갈어 등으로 쓰여 직원들이 밤새 구글 번역기까지 동원해야 했다고 한다. 상당수는 “해당 인스티튜트를 우리나라에도 유치하고 싶다”는 사업 제의였다. SM 담당자는 “단지 계획만 전했을뿐인데 너무 큰 관심이 쏟아져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실 여기엔 말 못 할 사정이 숨어 있다. SM엔터테인먼트와 종로학원은 2016년부터 정식 학교 형태인 ‘K팝 스쿨’을 추진했다. 4년 넘게 애를 썼지만 학교 설립과 교육과정 운영에 각종 제한을 두고 있는 우리나라 법규제 때문에 여의치 않자 ‘학원'인 인스티튜트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대신 SM은 K팝 등을 가르치는 온라인 고등학교인 ‘디지털스쿨’(가칭)을 미국 캘리포니아에 설립하고 이달 중 학교 설립 허가가 나면 개교할 방침이다. K팝을 알리고 퍼뜨릴 전진 기지가 규제 탓에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먼저 선보이는 셈이다.
SM은 학생 개개인 학업 성취도를 측정하고, 수준에 맞춰 교과 수업을 이수하도록 하는 인공지능(AI) 온라인 프로그램도 도입했다. 한 교실에 아이들을 몰아넣고 똑같은 지식을 주입하는 기존 교육 방식 대신,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결합한 이른바 ‘블렌디드 스쿨(Blended School)’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모든 수업은 영어와 중국어로 진행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이런 청사진은 국내법 앞에서 무력화됐다. 먼저 민간은 우리나라에서 ‘온라인 학교’를 설립할 수 없다. 초중등교육법상 ‘방송통신중·고교’가 운영되고 있지만, 오직 국공립만 가능하다. 외국어·예술 중점 교육도 불가능하다. 현행법상 고교생은 국·영·수 등 주요 교과를 180시간 중 절반 이상 반드시 이수해야 졸업장이 나온다. 영어 몰입 교육은 규제 대상이다. 정식 ‘고등학교’를 세우려면 학교 부지나 체육시설 확보, 일정 규모 교사에 외국인 학생 입학은 정원 외 최대 2% 등 ‘K팝 스쿨'로선 난감한 규제가 널려 있다.
‘외국인·국제학교’ 또는 ‘대안학교’ 설립도 검토했지만, 이 역시 사실상 불가능했다. 현행법상 외국인학교나 국제학교는 국내 법인이나 한국인은 설립할 수 없다. ‘대안학교’ 역시 외국어를 주된 언어로 교육하는 걸 금지하고 있다. 결국 SM은 K팝 스쿨을 ‘학원’으로 등록하고 문을 여는 방향으로 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 청소년에게 유학생 비자가 발급되지 않고, 고교 학력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단점이 고민이다. 중·고교생 대상이기 때문에 ‘심야 교습 금지’ 대상으로 밤 10시 이후엔 반드시 문도 닫아야 한다.
해외에는 다양한 교육과정과 교재를 인정하는 실험적인 학교 설립이 자유롭고, 정부의 간섭도 적은 편이다. 미국에 널리 알려진 ‘차터스쿨’은 공립학교이면서 교육과정이 자유롭고, 과학이나 컴퓨터 등 특정 과목 몰입 교육도 가능하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가 투자한 ‘서밋스쿨’도 오전에는 AI 맞춤형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고, 오후에는 토론 수업 등을 진행하는 새로운 교육 방식으로 운영한다. 주정부는 학교 설립에 있어 최소한의 교육과정 등만 심사하고 예산을 지원해준다.
이주호 전 교육부 장관(KDI 교수)은 “우리나라는 대안학교 이상의 자율성을 허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며 “미래에 새로운 형태의 학교가 나올 수 있도록 혁신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할 학교를 장려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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