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초기 무덤유적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장식품의 출토상황으로부터 다음의 내용이 정리된다.
첫째는 고조선의 비파형동검문화인 하가점상층유적에서 출토된 장식단추는 그 양식과 종류에서 고조선의 하가점하층문화와 서로 계승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는 고조선의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지는 소하
연문화의 ‘인형방식’ 웃옷에 나타난 둥근달개장식의 사용이 홍산문화로부터 비롯되어 일관되게 후기에 이르기까지 고조선 영역에 전반적으로 확산된 것은 복식문화의 시대적인 조형적 양상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달개장식의 사용이 고조선 이후 여러나라시대에 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어지고 이후 고구려의 불꽃문양을 표현한 금관과 금동관200)등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태양신을 섬기는 천신신앙201)의 문화적인 전통이 계승되어진 것으로 해석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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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모수의 (해)解는 하늘의 해, (모수)慕漱는‘머슴애’를 뜻하는 것으로 해모수는 해의 아들 즉 (일자)日子를 의미한다.208) 즉 고조선의 단군은 해의 아들이라고 불리었으며 태양신을 상징한다. 따라서 고구려는 홍산문화로부터 비롯되고 소하연문화를 이은 고조선문화를 계승하여 태양을 숭배하는 전통과 장식기법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원형의 달개장식을 매개체로 하여 태양의 기능인 열과 빛의 모습을 복식 등에 표출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오랜 기간 통시적인 발달양상을 보이는 장식기법은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복식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한민족의 고유양식인 것이다.
소하연문화의 ‘인형방식’에 나타나는 복식양식과 장식기법은 한국 고대복식의 원형이 중국이나 북방 호복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종래의 통설화 된 견해들이 모순임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아울러 홍산문화 복식의 특징적 요소들이 소하연문화로 이어지고 다시 고조선의 고유한 복식전통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옥과 청동 등을 재료로 한 원형의 장식기법은 홍산문화의 복식 전통을 이은 고조선의 고유한 장식기법으로 한민족 복식의 문화적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속자치통감 제이백일십사 원기삼십이]
《续资治通鉴 卷二百一十四 元纪三十二》记载:“后亦多畜高丽美人,大臣有权者,辄以此遗之,京师达官贵人,必得高丽女然后为名家。自至正以来,宫中给事使令,大半高丽女,以故四方衣服、靴帽、器物,皆仿高丽,举世若狂。”
"황후도 역시 고려미인으로 삼아, 대신유권자는 곧 이를 귀하게 여겨, 수도 고관귀인은 반드시 고려여자를 얻은 후에야 명가가 된다.
그렇게 된 이래, 궁중급사사령, 대반이 고려여자이며, 이런 이유로 사방의 의복, 신발과 모자, 기물 모든것을 고려를 모방해, 온 세상이 미친 것 같다."
명나라 육용의 [숙원잡기]의 기록에는,《菽园杂记》::“马尾裙始于朝鲜国,流入京师……于是无贵无贱,服者日盛。至成化末年,朝臣多服之者矣。阁老万公安冬夏不脱……。大臣不服者惟黎吏侍淳一人而已。此服妖也,弘治初始有禁例。”
마미군은 조선국(고려)에서 시작되어, 수도로 유입됬으며......귀천을 가리지 않고 복식이 날로 성했다. 성화말년에 이르러, 조정 신하들도 입게 되었다. 각로만공안이 겨울에도 여름에도 벗지 않았다.....이 복식은 요사하므로, 홍치 초시에 금지되었다.
하니하라 가주로(埴原和郞) ... 나라시대(奈良時代- 제50대 칸무(桓武) 왕이 784년 헤이안(平安)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도 한복을 입고 한국음식을 먹었으며 심지어는 한국말까지 사용했는데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 만엽집(万葉集) 등에 아직 조작되지 않은 부분은 한국어의 한국식 한자용어가 남아있다”고 말해 전체적으로 일본고사기들이 조작되었음을 밝혔다.
요서 선비족 왕조를 이은 고구려계 북연등이나 내몽골에 출토되는 나뭇잎 형식의 우리 (고조선)고구려계 금관 출토나(이런 우리 고조선 고구려 천하관을 알 수 있는 금관은 애초에 서토 내륙 황하 하한족에서는 나오지 않는 우리쪽에서 두드러지는 큰 특징 중 하나.
전세계에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14개중 10개가 우리쪽에서 발굴. 나머지도 북방 유목쪽. 우리는 신라의 계림을 상징하는 출자 금관부터 우리 고조선 고구려 통치자의 태양신을 상징하는 불꽃 문양이나 조우관 나뭇잎 형식등 광명 하늘숭배 천손사상을 바탕으로 한 두드러지는 독자적 금관 양식이 주류)
서토 북조사를 연 북위에 황제로 등극한 고구려계 세종등 선비족 문화에도 당시 우리 고구려의 정치 문화 인적 영향력과 투사력이 상당했던 시기.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병이 100만이고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연,제,노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수(隨) 왕조의 멸망도 요동 정벌에 의한 것입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隋皇失馭 由於征遼
-삼국사기 <최치원전>
해동의 두 번을 비록 지난날 원정했으나, 감히 고구려 요수를 건너지 못했고, 백제 큰 바다의 물결을 넘을 수 없었다. 해마다 자주 병사를 보냈으나, 중국이 부서지고 소모되었다. 이미 지난날의 일이지만, 나는(당 고종) 그것을 후회한다.
서토인 하한족의 송이 신라계 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군주였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수많은 자녀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여진(女真)의 추장은 곧 신라인인데, 완안씨(完顏氏)라 호칭하였다. 완안(完顏)은 한어(漢言)로 「왕(王)」과 같다.
ㅡ『송막기문』남송 홍호가 포로로 잡혀간 송 군주의
송환을 위해 15년간 대금의 유배생활을 보내면서 쓴 견문록.
어떤 이가 이르기를, “옛날에 우리 평주(平州)의 승려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쳐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는데 이를 일컬어 금의 선조라 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평주의 승려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처음 여진에 들어가 아지고촌에 살았는데, 여진의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 태사(古乙 太師)라 하였다. 고을이 활라 태사(活羅 太師)를 낳았다. 활라에게는 아들이 많았는데, 맏이를 핵리발(劾里鉢)이라 이르고, 막내를 영가(盈歌)라고 일컬었다. 영가가 가장 재지와 용력이 뛰어나[雄傑], 뭇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영가가 죽으니 핵리발의 맏아들인 오아속(烏雅束)이 지위를 계승하였다. 오아속이 죽으니 동생인 아골타(阿骨打)이 섰다.”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권8 > 예종2(睿宗二) > 예종(睿宗) 10년 > 1월
흑수말갈은 숙신땅에 살았는데 동쪽으로는 바다에 접하고 남으로는 고구려에 접하였다. 또한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다. 일찍이 15만 병사(소수 인구였던 흑수병력수는 그중 일부를 차지)로 고구려를 도와 당태종과 대적하였으나 안시성(安市城)에서 패하였다.(주필산 전투에서 이세민의 계략에 전초 일부가 패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주력 10여만 대군은 건재 안시성의 수성과 함께 야전에서 효과적으로 당나라 대군을 내지로 들어 오지 못하게 수개월 봉쇄.
결국 당 이세민은 요동의 밀집 외곽 방어선을 제대로 뚫지 못한채 허겁지겁 도망가듯 퇴각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다 돌아와 병사)
개원의 시기에 당(唐)에 내조하자 당은 흑수부(黑水部)를 설치하고 추장들에게 도독, 자사의 지위를 주었고 당은 장리를 두어 그들을 감독하였다. 당은 도독에게 李씨 성과 헌성(獻誠)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흑수(黑水)경략사 직무를 맡겼다.
그 후 발해가 강성해지자 발해에 복속되었고 당에 대한 조공을 끊었다.
5대시 거란이 발해지역을 모두 점령하자 흑수말갈은 다시 거란에 복속되었다. 흑수말갈의 남쪽 거주자는 거란 국적하에 있었고 숙여직(熟女直)이라 불렀으며, 흑수말갈의 북쪽 거주자는 거란 국적하에 있지않았고 생여직(生女直)이라 불렀다.
생여직 땅에는 혼동강, 장백산이 있었는데 혼동강(混同江)을 흑룡강(黑龍江)이라 불렀고 소위 백산흑수(白山黑水)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금나라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高麗)에서 왔는데 나이 이미 60여세였다.
형 아고내(阿古迺)는 불교를 좋아해 뒤에 따르려 하지 않으며 고려에 잔류하면서 말하기를, "후세 자손들은 반드시 서로 모여 만나는 자가 있을 것이니 나는 가지 않겠다."하여 함보(函普)는 보활리(保活里)와 함께 갔다. 시조(始祖)는 완안부 복간수(僕幹水) 강가에 살았고 보활리는 야라(耶懶)에서 살았다.
그 후 호십문(胡十門)이 갈소관부(曷蘇館部)를 이끌고 태조에게 귀부하여 왔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 형제 3인이 이별하였고 대체로 자신은 아고내의 후손이라 하였다. 석토문(石土門)과 적고내(迪古乃)는 보활리의 후손이라 하였다.
태조가 국경에서 요병을 패배시키고 야율사십(耶律謝十)을 사로잡자 양복(梁福), 알답자(斡答刺)로 하여금 발해인을 회유하면서 말하기를, "여직(女直)과 발해(渤海)는 본래 한 집안입니다."라 하였다. 대체로 초기에는 모두 물길 7부였다.
시조(始祖)는 완안부(完顔部)에 이르러 오래 살았는데 그 부 사람들은 일찍부터 타족 사람들을 죽였고, 이로 인해 양족은 원한으로 싸움이 그치질 않아 해결되지 않았다. 완안부(完顔部) 사람들이 시조에게 말하기를 . "만약 당신이 완안부 사람의 복수심을 서로 풀어주어 양족이 서로 죽이지 않게 해 준다면, 완안부에 나이 60에 미혼녀가 있으니 서로 결혼시켜 주고 완안부 사람이 되게 할 것이요."라 하였다.
시조(始祖)는 말하기를, "좋습니다."고 하였다. 마침내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 타이르기를, "사람 1명을 살인한 후 싸움이 해결되지 않으면 손상은 점점 더 커집니다. 살인사건들에 대해서는 주모자 1명만 처벌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물건으로 보상토록 하면 싸움도 그치고 이득도 될 것입니다."라 하니, 피해자 가족들은 이에 따랐다.
시조와 사람들은 규정하기를, "만일 사람을 살상할 경우, 살인자가 피살자 가족에게 자기가족 1명, 암말 10마리와 수말 10마리, 암소 10마리, 황금 6냥을 주면 즉시 양측은 화해하고 사적인 싸움을 하지 않기로 한다."고 합의하였다. 이 합의에 의거하여 위 사건은 이 규정대로 시행되었다. 여진(女眞)의 풍습에 살인하면 소와 말 30마리 보사아은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살상한 자들의 배상이 규정대로 시행되면서 완안부 사람들은 이 규정을 믿고 준수하였으며 시조에 대한 사례로 청우(靑牛) 1마리를 주고 60세 된 여자를 신부로 데려가는 것을 허용하였다. 시조는 마침내 청우를 이용하여 신부집에 보낼 결혼예물을 마련함과 동시에 그의 자산을 마련하였다. 후에 아들 둘을 낳아 오로(烏魯), 알로(斡魯)라 하였고 딸 하나를 낳아 주사판(注思板)이라 하였는데 이로써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
신라계 황제의 대금의 여진족은 본인들의 부족한 내치 행정과 문화를 오랜 지역 공동체였던(요동) 우리 발해인(고구려계)과 연합 이들을 황실의 외척으로 대거 받아들이면서 수준 높은 문화와 도시문명을 유지했고(서토 송을 멸망시키면서 북경에 고구려계 국무총리격인 장호가 중도 건설 총지휘)
이후 쿠빌라이는 내부분열시기에 이런 북방의 요, 금이 닦아놓은 강북을 기반(발해인들은 원 초기에도 정체성을 유지) 대칸에 올랐고
이후 고려가 강화를 맺고 부마국이 되면서 이런 몽골 황실의 문화적 욕구 역시 수준 높은 고려가 충족시키게 되군요.
이 때문에 원 조정내에 고려양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고
이후 원을 몰아낸 명조차 이런 기존 상류 문화의 고려양이 전기에도 상당히 유행.
남북국시대 발해 이후
북방의 패자가 되는 요나라도 5경 체재를 유지하는데
요나라의 실질적 수도격인 중경대정부나
발해땅의 동경등은 우리 발해인 주도로 건설되었군요.
(기본적으로 서토 황하의 하한족 왕조에서는 이런 다중 수도 체재를 선호하지 않군요)
이런 5경 체재는
우리 고조선 고구려 문명권에서 나오던 5부체재가
이후 고구려의 신성한 태왕이 거하는 곳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을 점하며 천하를 지배하는 5부 대도시 행정으로 발전 이후
남북국시대 발해 5경과 신라 5소경으로
다시 요나라 5경으로 이어지고 이후 신라계 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대금이 요, 송을 격파 고구려계가 북경에 중도 건설을 총지휘(도시문명과 건설을 주도)
서기 1334년 5월, 원(元)나라 사람의 요청으로 고려 사경승(寫經僧·불경의 글과 그림을 필사하는 승려)이 제작한 감색(紺色) 종이에 금가루로 그린 변상도(變相圖·불교의 경전 내용이나 가르침을 알기 쉽게 그린 불화)가 발견됐다. ‘고려사(高麗史)’는 원나라가 고려 사경승을 원으로 보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을 정도로 고려의 사경(寫經)기술이 뛰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그림은 이 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현전 최고(最古) 유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