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래의 복식사 연구에서는 일반적으로 삼⋅유⋅포의 경우 소매 폭을 기준하여 중국계통은 (광수)廣袖로, 북방계통은 (착수)窄袖로 구분되어왔다.133)
이 북방 계통의 요소인 착수가 우리에게 들어온 것으로 여겨져 고대 한국 복식의 성격은 북방 호복계통의 (고습)袴褶형식으로 구분되며 이후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착수가 차츰 광수화했다고 보아왔다.134)
그러나 고대 중국의 복식을 보면 이같은 분류의 내용과 달리 상 시대부터 전국시대까지 착수의 옷을 주로 입었다.
고조선의 고고학 유물과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복식은 이와 달리 상시대부터 춘추전국시대까지의 중국 복식에서 보이는 특징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 중국은 진제국시대부터 大袖와 착수가 혼용되었지만, 고구려 관복에는 착수가 보이지 않는다.
삼국양진남북조시대 중국 복식에는 (대수)大袖가 유행했고 북방민족들의 영향으로 착수와 (요대)腰帶의 호복을 입기 시작하며 고습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고구려 고분벽화의 복식에는 고습이 보이지 않는다.135)
고대 호복은 중국의 전국시대로부터 진⋅한시대에 이어 양진남북 조시대에 이르기까지 착수 및 좁은 폭의 옷을 주된 양식으로 했다. 그러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이같은 호복의 특징에서 보이는 착수와 좁은 폭의 옷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내용들은 복식사연구에서 삼⋅유⋅포의 경우 소매 폭 등을 기준하여 중국계통은 (광수)廣袖 로 북방계통은 착수로 구분하여 고대 한국 복식의 성격을 북방 호복 계통의 고습형식으로 구분하는 계통론에 수정을 불가피하게 한다.
실제로 고조선에 속해있던 부여⋅한 등에서는 큰 소매의 포를 입었고 이는 이후 고구려⋅백제⋅신라에 그대로 계승되었다.136) 고대 한국 袖에 관한 문헌사료에 기재된 내용에도‘(대수)大袖’137)⋅‘(대몌) 大袂’138)⋅‘(동수)同袖’139)⋅‘(통수)筒袖’140)⋅‘(용수)筩袖’141) 혹은 소매가 약간 넓다는 ‘(미대)微大’의 내용만이 보일 뿐 착수는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유⋅삼⋅포의 소매에서도 광수⋅대수⋅ 관수⋅통수가 나타나고 착수는 보이지 않는다.
이같은 (수)袖의 양식은 고대 한국 복식의 원형이 중국이나 북방 호복계통으로부터 이루어졌다는 142) 종래의 통설을 수정하도록 하는 중요한 근거들이 되 었다.
‘인형방식’의 웃옷양식도 이러한 사실을 재확인 시켜주는데 비교적 넓은 소매와 반소매의 양식일 것으로 표현되었다.
‘인형방식’은 발굴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아래옷으로 바지위에 치마를 입고 있는 모습이다.
문헌기록에 여러나라시대의 일반 남자들은 ((바지) 고)袴를 143) 아래옷으로 입었고, 여자들은 (고)袴를 치마인 (군)裙 144) 속에 입었다.145)
고구려 풍속에 (궁고)窮袴 146) 를 입었는데 대신(大臣)이나 존귀한사람 147) 및 일반인들은 모두 (대구고)大口袴 148)를 입었다. 부여에서도 (고)袴를 입었다.149) 동옥저 150) 와 백제 및 신라에서도 고구려와 같은 (고)袴를 입었다.151)
이처럼 한민족의 지역에서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고)袴를 착용한 것으로 보아 (고)袴는 고조선시대 이전부터 착용되던 복식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고(袴)의 모습이 ‘인형 방식’에서 치마 속에 바지를 입은 것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착용방식으로 보아 ‘인형방식’은 여성일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진다.
당시 이러한 짧은 치마양식 이외에 긴 길이의 치마양식이 있었음이 홍산문화유적에서 찾아진다. 신석기시대후기의 유적으로 서기전 2600년경에 속하는 요령성 적봉에 위치한 (서수천)西水泉 홍산문화 유적에서는 (군)裙을 입은 것으로 보이는 도인상(陶人像)이 출토되었다.
고조선 초기 무덤유적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장식품의 출토상황으로부터 다음의 내용이 정리된다.
첫째는 고조선의 비파형동검문화인 하가점상층유적에서 출토된 장식단추는 그 양식과 종류에서 고조선의 하가점하층문화와 서로 계승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는 고조선의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지는 소하
연문화의 ‘인형방식’ 웃옷에 나타난 둥근달개장식의 사용이 홍산문화로부터 비롯되어 일관되게 후기에 이르기까지 고조선 영역에 전반적으로 확산된 것은 복식문화의 시대적인 조형적 양상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달개장식의 사용이 고조선 이후 여러나라시대에 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어지고 이후 고구려의 불꽃문양을 표현한 금관과 금동관200)등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태양신을 섬기는 천신신앙201)의 문화적인 전통이 계승되어진 것으로 해석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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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모수의 (해)解는 하늘의 해, (모수)慕漱는‘머슴애’를 뜻하는 것으로 해모수는 해의 아들 즉 (일자)日子를 의미한다.208) 즉 고조선의 단군은 해의 아들이라고 불리었으며 태양신을 상징한다. 따라서 고구려는 홍산문화로부터 비롯되고 소하연문화를 이은 고조선문화를 계승하여 태양을 숭배하는 전통과 장식기법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원형의 달개장식을 매개체로 하여 태양의 기능인 열과 빛의 모습을 복식 등에 표출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오랜 기간 통시적인 발달양상을 보이는 장식기법은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복식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한민족의 고유양식인 것이다.
소하연문화의 ‘인형방식’에 나타나는 복식양식과 장식기법은 한국 고대복식의 원형이 중국이나 북방 호복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종래의 통설화 된 견해들이 모순임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아울러 홍산문화 복식의 특징적 요소들이 소하연문화로 이어지고 다시 고조선의 고유한 복식전통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옥과 청동 등을 재료로 한 원형의 장식기법은 홍산문화의 복식 전통을 이은 고조선의 고유한 장식기법으로 한민족 복식의 문화적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속자치통감 제이백일십사 원기삼십이]
《续资治通鉴 卷二百一十四 元纪三十二》记载:“后亦多畜高丽美人,大臣有权者,辄以此遗之,京师达官贵人,必得高丽女然后为名家。自至正以来,宫中给事使令,大半高丽女,以故四方衣服、靴帽、器物,皆仿高丽,举世若狂。”
"황후도 역시 고려미인으로 삼아, 대신유권자는 곧 이를 귀하게 여겨, 수도 고관귀인은 반드시 고려여자를 얻은 후에야 명가가 된다.
그렇게 된 이래, 궁중급사사령, 대반이 고려여자이며, 이런 이유로 사방의 의복, 신발과 모자, 기물 모든것을 고려를 모방해, 온 세상이 미친 것 같다."
[숙원잡기]의 기록에는,《菽园杂记》::“马尾裙始于朝鲜国,流入京师……于是无贵无贱,服者日盛。至成化末年,朝臣多服之者矣。阁老万公安冬夏不脱……。大臣不服者惟黎吏侍淳一人而已。此服妖也,弘治初始有禁例。”
마미군은 조선국(고려)에서 시작되어, 수도로 유입됬으며......귀천을 가리지 않고 복식이 날로 성했다. 성화말년에 이르러, 조정 신하들도 입게 되었다. 각로만공안이 겨울에도 여름에도 벗지 않았다.....이 복식은 요사하므로, 홍치 초시에 금지되었다.
하니하라 가주로(埴原和郞) ... 나라시대(奈良時代- 제50대 칸무(桓武) 왕이 784년 헤이안(平安)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도 한복을 입고 한국음식을 먹었으며 심지어는 한국말까지 사용했는데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 만엽집(万葉集) 등에 아직 조작되지 않은 부분은 한국어의 한국식 한자용어가 남아있다”고 말해 전체적으로 일본고사기들이 조작되었음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