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무슨 한국내에서는 일본도가 쉽게 부러지니 조선 환도보다도 구리다는 이런 되도 않은 루머들이 사실인 것처럼 퍼지고 있는데 실제 당대의 기록을 통해서 일본도의 위력을 알아보자
의령(宜寧)에 거주하는 선군(船軍) 심을(沈乙)이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서 칼 만드는 법을 배워 칼 한 자루를 만들어 올리니, 일본 칼과 다름이 없으매, 명하여 군역(軍役)을 면제시키고 옷 한 벌과 쌀·콩 아울러 10석을 하사하였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JT#/dir/node?dataId=ITKC_JT_D0_A12_06A_01A_00060
"우리 나라 공인(工人)이 제조한 칼은 저들의 잘 단련(鍛鍊)된 것과 같지 못하니, 저들로 하여금 시험적으로 주조(鑄造)하게 하여 만약 보통 기구(器具)보다 특이하게 된다면 작은 관직을 제수하고 그들이 잇달아 왕래하도록 허가하여 우리 공인(工人)들로 하여금 전습(傳習)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또 예조(禮曹)에 물으니, 예조에서 말하기를, "시험하여 만들도록 하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하자, 전교(傳敎)하기를, "갑오년의 예(例)에 의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칼을 만들게 하라."
(세종실록의 기록)
https://db.itkc.or.kr/dir/item?itemId=JT#/dir/node?dataId=ITKC_JT_I0_A13_09A_24A_00030
"군기시(軍器寺)에 간직한 왜도(倭刀)는 아무리 하품(下品)이더라도 몹시 날카로우니(甚銳利) 진실로 군국(軍國)의 중한 기구인데 가볍게 화매(和賣)하는 것은 미편(未便)합니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JT#/dir/node?dataId=ITKC_JT_I0_A18_05A_15A_00020
(성종실록의 기록)
신(臣)은 왜의 땅에 와 있은 지 3년 동안 왜놈들이 날마다 군기와 창검을 수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후에 항복해 온 왜인 가운데는 반드시 칼을 알아보고, 칼을 만들고, 칼을 갈 줄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니, 충신(忠信)으로 대해 주고 녹봉을 후히 주어 날마다 달구어 만들어 내게 하고, 부산에서 만약 전일과 같이 서로 무역하게 될 경우에는 칼을 잘 알아보는 통역을 시켜 귀중한 물품을 많이 싣고 가서 사 들여오게 하여 창졸(倉卒)간의 사용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간양록』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80A_0010_010_0020
(** 1596년 1월 1일의 바로 앞에 한 장으로 다섯 줄에 걸쳐 적혀 있는 글이다.)
도양장(고흥군 도양면)의 농사일에 부리는 소가 7 마리인데, 보성 림정로(臨廷老) 1 마리, 박사명(朴士明) 1 마리를 바치지 않았다. 정명열(丁鳴悅)은 바로 길다란 서화첩(長帖)을 받아 갔다. 이는 정 경달(丁景達)의 아들이다. 갑사 송한(宋漢). 1월 3일에 배 위에서 이번에는 환도 4 자루, 왜놈칼 2 자루를 만 들었다. 아들 회가 가지고 가던 중에(이 뒤에 분실)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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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경(倭京)에 머물렀다. 군기(軍器)로 소용되는 장검(長劍) 1백 자루를 샀다.
일본에는 다른 나라 사람에게 병기(兵器)를 몰래 파는 것에 대한 금령이 있었다.
평조신(平調信)이 생시에 가강에게 아뢰기를, “조선이 조총과 환도(環刀) 등의 물품을 사고자 하니, 허락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하니,
가강이 말하기를, “싸움을 당하면 싸울 것이지, 어찌 병기 없는 나라와 그 승부를 겨뤄서야 되겠느냐? 하물며 이웃 나라가 사고자 한다면 어떻게 금지 하겠는가?”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이번에 사는 병기는 조금도 금지함이 없어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매매하였던 것이다.
(해사록)
청나라 장수로서, 우리나라에 관한 일을 맡은 자가 일찍이 일본의 보검을 구하므로, 민간에서 찾아 얻었더니 매우 좋은 칼이 있었다. 공이 이 칼을 받아 감추고, 낭관들을 시켜 다시 다른 칼을 구하게 하였더니, 다시 칼 한 자루를 구하여 올렸다. 공이 말하기를, "비록 처음 칼만을 못하지만 또한 쓸 만하다." 하고, 그것을 청장에게 주었다. 얼마 뒤에 청국 황제가 그 장수의 칼을 보고 다시 구하였는데, 공이 즉시 감추어 두었던 것을 내어주며 낭관에게 말하기를, "그때 내가 이미 이럴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하니, 듣는 자가 탄복하였다.
(연려실기록)
"일본도(日本刀)는 크고 작고, 길고 짧은 것이 일정하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장도(長刀) 하나를 소유하는데 그 칼 위에 또 하나의 작은 칼(小刀)을 꽂아두어 잡무에 쓰기 편하도록 한다. 또 하나 자도(刺刀)로 길이가 한 자인 것을 해수도(解手刀)라 하니 이 세 가지는 몸에 지니고 반드시 쓰는 것이다. 칼이 매우 굳세고 날카로워서(剛利) 중국 칼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
대개 도식(刀式)이 견고하고 예리한 것은 왜인들이 으뜸이다. 그러므로 그 도식을 그림으로 갖추어 싣는다.)
(무예도 보통지)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청사(청나라사신)를 접견하였다.상이 말하기를, "왜검(倭劍)을 사서 보내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소방(小邦)이 힘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근래 왜인이 병기(兵器) 무역을 전혀 허락하지 않으므로, 지금 10년이 되도록 아직 사지 못하였습니다." 하니,사신이 말하기를, "그 말씀대로 돌아가 고하겠습니다." 하였다.
(인조실록)
옛날 조조(晁錯)가 병법을 논하면서 ‘기계가 예리하지 않으면 자기의 군졸을 적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이 기계와 관련 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본 검이 좋은 이유는 쇠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쇠를 단련하는 기술이 정교하여서입니다. 우리나라도 남쪽에서 양질의 철이 많이 생산되니 백 번 정도 쇠를 담금질하여 두드려 만들기를 일본의 방법대로 한다면 또한 예리한 검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승정원 일기)
일본 사람은 칼을 만드는데 칼날은 왼쪽으로 비스듬하게 하고 그 끝은 뾰족하게 하였다. 칼날이 무디면 다만 그 비스듬한 한쪽만 갈아도 칼날이 날카로워지는 까닭에 갈기가 쉽고 오래 쓸 수 있다.
그들은 칼을 제조할 때 강한 쇠와 유연한 쇠를 각각 붙여서 만들기 때문에 늘 날카롭고 잘 무디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개 칼이란 칼날이 너무 얇으면 쉽게 닳고, 등이 너무 두꺼우면 무겁기만 하고 또 쇠만 많이 허비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 칼은 그 두꺼움과 얇음을 꼭 알맞게 하고 또 칼날도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하였으니, 연구해 만든 것이 아주 묘하게 되었다.
현실은 주변국 조선이나 중국마저도 일본도가 한중일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호평함.
흔히 인터넷 영상에서 일본도vs서양도랑 비교해서 일본도가 서양보다 강도에서 약하게 나오는데 그건 그때당시 서양은 동아시랑 다르게 강철을 사용했기 때문.
애초에 서양은 동아시아랑 다르게 강철을 사용해서 갑옷같은 것도 플레이트 아머를 입었기 때문에 그런 방어구조차 뚫을수 있게 진짜 단단한 강철로 강도에만 몰빵을 해서 만든 것이니 애초에 플레이트 아머같은 강철이 일반적이였던 서양과 그렇지 않았던 동아시아랑 비교하는게 무리가 있고 일단 한중일 중에서는 확실히 일본도가 가장 좋고 높은 평가를 받았던 거지.( 일본이 철이 안좋기 하지만 그 안좋은 철을 극복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칼 제련 방법을 개발하고 이래서 주변국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
그리고 무슨 임진왜란때 조선이 발린 이유가 무슨 일본 조총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현실은 그때당시 조총은 시대적인 한계로 그때당시 기계기술이 굉장히 조잡해서 숙련된 병사가 장전하는데도 무슨 30초나 걸렸고(삼단 사격으로 어느정도 극복은 가능하지만 일단 조총자체가 워낙 장전시간이 걸리니 기술적인 한계로 그런 전법들로만으로는 완전히 커버가 안되었고) 거기다가 당시 날씨에도 영향을 받아서 습도가 높으면 고장나기 일수인데다가 기본적으로 불을 붙여서 발사하는 구조다 보니 바람불거나 비오면 그냥 쓰지도 못하고 거기다가 조총이 활이나 대포보다 기본적인 사거리도 짧을 뿐더라(특히 조총은 사거리가 겨우 100m인 반면 조선의 천자총통 같은 경우는 사거리가 무려 1.4km에 달하고)거기다가 총알도 직선으로 날아가서 활처럼 곡사도 불가능하고 거기다가 당시 장전을 할때 화약가루를 넣어야 하기 때문에 여러명이 한번 쏘고나면 연기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서 그 이후에는 제대로 장전하거나 조준하기도 어려웠는게 현실(그나마 장점은 맞았을때 관통력이 높은 것이랑 활은 기본적으로 배우는데 몇년 걸린다면 조총은 3개월 정도면 된다는 점인데 그것도 당시 조총이 기계부품이 들어간다는 점 때문에 워낙 비싸서 대량으로 보급하는게 힘들기 때문에 실제로 전쟁 당시에도 일본의 조총 비율은 대략 10%정도였음.
거기다가 조선은 사실 화약무기 관련에서도 조총보다 사거리도 훨씬더 길고 위력도 더 좋은 승자총통, 천자총통,신기전,비격진천뢰 등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무기빨은 조선이 훨씬 더 좋은게 현실이였고.(무슨 조선군이 아즈텍이나,잉카군도 아니고 총 소리에 놀라서 도망쳤다는것도 진짜 무식한 소리인게 애초에 한국은 역사적으로 일본보다 훨씬 더 빨리 대포같은 화약 무기를 사용했던 국가고 조선시대에도 전쟁도중 잘만 사용했고, 사실 행주대첩도 각종 총통이나 신기전으로 도배를 해놓고 유리한 고지에서 싸웠으니 무기빨로 승리한 것이고.)
그냥 조선이 초반에 개털린것도 그냥 일본군에 비해 창술,검술같이 기본적인 전투력 차이 때문에 발린 것인데(실제로 조선군은 일본군과 창,칼들고 근접전 가면 그대로 썰리기 일수였고) 자신들의 무능함을 숨기기 위해서 조총 때문에 졌다는 식으로 되도않은 무기탓을 해되는 것이지.(흔히 게임에서 지면 장비탓을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