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전까지는 중국지역의 수많은 왕조와 싸움으로 점철된 역사였고 조선들어서 성리학 덕분에 중국색을 받아들여서 여기저기 중국색이 나타나긴 했지만 당나라 복색을 가져왔다는건 어불성설이지. 중국애들이 가장 착각하는것중 하나가 우리가 내내 중국을 숭상했다이지만 앞서 적었듯 고려까지는 한족말고 중국을 차지한 넘들과 계속된 투쟁의 역사였고 조선에서 성리학을 국가교리로 삼으면서 당시의 명나라가 같은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다는것땜에 형님노릇을 인정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중국사람을 인정한게 아닌 성리학 개념을 숭상한것일뿐 이후 청나라, 공산당으로 이어지면서 저것들과는 너무도 큰 사상적 흐름때문에 아예 서로다른 개별적인 문화로 변질되서 같은 성질을 찾는게 더 어려운 실정. 시진핑의 개인 사상주의가 어떤 과거의 사상보다 우선시되는 공산주의 국가가 과거의 사상은 공산주의 이념과 모순된다며 문화대혁명등을 거쳐서 다 때려부셔가며 부정해놓고선 우리가 조금 문화적으로 잘나간다니까 니들은 우리 문화종주국이라는 개소리를 하기에는 중국색이란게 이젠 있기나 한건지 중국애들 스스로 반성해야 할텐데 그저 좋은건 우리거 나쁜건 우리거 아님을 외치며 호도하는 애들은 사실 중국공산당 이념을 부정하는 매국노가 되는 아이러니가 존재함. 오히려 우리는 유교사상중 좋은것 나쁜것(이틀테면 반상의 구분)을 선별해서 필요한것만 선별 흡수해서 성장하고 있는중. 옛것이 훨씬 좋았으면 뭐하나 현실이 개차반인것을.
중국문명이라는 것 자체가 죄다 산둥지방에서 시작했고
산둥은 만주문화의 후기문명임.
중국 거대도시들이 왜 동북쪽에 치우쳐 있는가.
어째서 청동기나 철기가 동북쪽에서 차츰 전해져 내려왔는가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봐.
벼농사를 제외한 중국의 모든 문명유산은
동북쪽에서 아래로아래로 전해져 내려온것들뿐.
이게 다 우연이지?
글자 그대로 나팔 모양을 닮은 청동기인데 암석 거푸집이 아니라 밀납 원체를 사용한 제작이다. 흔히 '실납법'이 라고 한다. 이와 흡사한 청동기는 놀랍게도 만주 심양의 정가와자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 정가와자 유적, 특히 3319호는 자타가 공인하는 고조선의 왕묘이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한반도의 청동기문화가 만주의 고조선 청동기에 계보가 있음을 시사한다 ㅡ정인성 교수
명나라 육용의 [숙원잡기]의 기록에는,《菽园杂记》::“马尾裙始于朝鲜国,流入京师……于是无贵无贱,服者日盛。至成化末年,朝臣多服之者矣。阁老万公安冬夏不脱……。大臣不服者惟黎吏侍淳一人而已。此服妖也,弘治初始有禁例。”
마미군은 조선국(고려)에서 시작되어, 수도로 유입됬으며......귀천을 가리지 않고 복식이 날로 성했다. 성화말년에 이르러, 조정 신하들도 입게 되었다. 각로만공안이 겨울에도 여름에도 벗지 않았다.....이 복식은 요사하므로, 홍치 초시에 금지되었다.
19세기 말, 만주족 팔기군 병사가 한족 성주(시장)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지만, 팔기군 병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을 정도로 청나라 내내 만주족들은 정복자이자 지배자라는 신분적 특권을 누리고 살았다.
서구 열강의 공세에 몰려 위험한 상황에서도 청나라의 지배층들은 "나라를 외국에게 넘겨줄 지언정, 집안의 종(한족)에게는 절대로 줄 수 없다."라고 단언했을만치, 청나라는 엄연한 정복 왕조였다.
1850년대, 한족들로 구성된 태평천국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남경을 지키던 만주 팔기군 병사들이 태평천국군에게 모조리 살육당하자, 분노한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에 가담한 반란군 병사들이 항복해와도 절대로 항복을 받아주지 말고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바람에 태평천국의 난은 16년이나 오랫동안 계속되고 말았을 정도로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민족적 갈등은 심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