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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10-31 14:02
대만애들 진짜 극혐이네요
 글쓴이 : tuygrea
조회 : 7,727  

자기네 스스로부터가 자기네 나라 지킬 생각도 별로 없는데

양안전쟁나면 장제스 들먹이면서 한국이 6.25로 전세계에서 도움받았으니 한국도 민주주의를 위해 대만 도와줘야 된다고 떼쓰는 중

정작 현실은 장제스는 지들이 한반도 먹으려고 도와준거고 그 당시 중화민국 지도에도 한반도 포함시켜놓음

평소에 혐한이나 하질 말던가 일뽕 따까리짓 하면서 발광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ㅋ

남베트남 아프간 시즌2가 보인다 보여 ㅉㅉ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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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보이양 21-10-31 14:06
   
장제스가 한반도 먹으려고 했다는건 어디서 나온 유언비어임? 설마 유튜브에서 봄?
장제스가 어찌되었건 한국을 많이 도와준건 사실입니다

없는 얘기로 은인에게 돌을 던지는거 아닙니다
     
tuygrea 21-10-31 14:11
   
유언비어는 무슨ㅋ 옛날부터 유명한 얘기인데
그 당시 중화민국 전체지도 찾아보세요 한반도까지 포함시켜놓음
          
리틀보이양 21-10-31 14:20
   
그러니까 그 유명한 얘기를 어디서 들었냐고요 출처주세요 확인좀하게
               
tuygrea 21-10-31 14:27
   
https://m.blog.naver.com/joonho1202/221762928265

1차 출처: 장제스 일기ㅋ
                    
리틀보이양 21-10-31 14:33
   
에라이... 내가 이럴지알았지 출처가 블로그... 장난하나 출처로 대고 싶으면 최소한 장제스 일기를 책으로 읽고 쓰세요 블로그 찌라시 감상문이 아니라
                         
tuygrea 21-10-31 14:35
   
1차 출처: 장제스 일기
1차 출처: 장제스 일기
1차 출처: 장제스 일기
1차 출처: 장제스 일기

장제스 일기 내용 인용해서 정리한거잖아요 시각기능에 문제있음?
                    
끄으랏차 21-10-31 14:40
   
저 이건 좀 그러네요.
장제스 일기의 내용을 가져와서 얘기하는 부분은 하나도 없고
저 글을 쓴 사람이 장제스 일기를 언급만 할뿐 그 내용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가져온건 하나도 없고 아무튼 이런 내용이라고 적은 글이네요.
반대로 우리나라 독립에 관해서
장제스가 카이로회담전에 주요 의제중 하나로 조선 독립을 명시했고
거기에 대해서 성공했을때 기뻐했다는 내용은 이미 공개된 바가 있어요.

이게 다른 문제면 그냥 뭐 그려려니 하겠는데요
장제스의 우리나라 독립문제에 대한 이런 식의 논쟁은
이게 뉴라이트랑 엮여있어요.
뉴라이트가 이승만을 빠는데서 출발하는데.
우리나라 독립에 크게 기여한게 장제스. 이 장제스와 긴밀하게 접촉한건 김구일파.
이걸 인정하게 되면 이승만이 상대적으로 공적이 없게 되거든요.
이 때문에 뉴라이트가 여기에 관해 밀던 썰이
이승만이 무려 편지를 써서 루스벨트한테 호소해서 독립하게 만들었다는거고
장제스는 사실 우리나라를 욕심내고 있었으니 도움이 아니다 식으로 몰아가는 주장을 했거든요.
여하튼 그런 식으로 그 문제를 비틀려고 시도하는 주장들이
그 뉴라이트 계열에서 나온거라 이런 얘기는 좀 진위여부가 제대로 안나오면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tuygrea 21-10-31 14:43
   
설령 뉴라이트 어쩌고가 맞다고 해도 지금 대만은 지난 중화민국과 거리를 두고 정체성을 바꾸려고 하고 있는데 장제스 들먹이면서 한국이 대만 도와줘야 된다고 떼쓰는건 논리도 없고 양심도 없는 짱꿔종특 발휘일 뿐이죠
                         
리틀보이양 21-10-31 14:46
   
그러니까 책을 읽으라고 니가 말한 내용이 책에 없다고 닌 그냥 찌라시 블로거한테 속은거라고 바보야...
                         
끄으랏차 21-10-31 14:49
   
예 그렇게 생각하시면 그걸로 주장하세요.
장제스 실제 일기 내용이 전혀 언급되지도 않는 블로그 글을 가져다가
출처 장제스 일기 이러시는건 좀 아니잖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님이 스스로 가져온 블로그 글을 제대로 안 읽어보셨다는 말밖에 안되요
장제스일기 내용을 인용해서 이러니까 장제스는 도움안된거야
라는 내용이 없어요.
장제스 일기가 공개됐다. 라는 말만 있지
그냥 장제스는 아무튼 이랬다 라고 실제 일기내용과 상관없이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정리한 글이 다예요.
                         
tuygrea 21-10-31 15:02
   
https://www.joongang.co.kr/article/13150385#home

이것도 뉴라이트 어쩌고인지??
                         
끄으랏차 21-10-31 15:44
   
지금 가져오신게 바로 그 뉴라이트발 주장중 하나예요.
대만이 회담이 끝나자마자 회담내용을 복기해서 작성한 회의록을
앨리엇회고록이 반대근거가 되는것처럼 얘기하는거 자체가 그냥 웃기는 얘기예요.
하나는 국가가 공식적으로 남긴 기록이고 하나는 개인의 회고록입니다.
더군다나 이런 류의 인용에 정말 자주쓰이는 기밀해제된 미국무부 자료 식의 프레임은
전형적인 음모론 프레임이예요.
왜 그런고 하니 미국무부는 모든 자료를 남깁니다. 부처공무원이 책상에 메모지 뜯어서 낙서하다 버린 종이도 남겨요.
무슨 말이냐면 님이 미 국무부 직원이고 지금이 근무시간이라면
여기 가생이에 남긴 댓글까지 미국무부는 기록으로 가지고 있는 격이란거예요.
님이 쓴 참글 뻘글 카더라 전부 다 남는게 미국무부 기록이란겁니다.
이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 서로 다른 관점으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경우같은게 자주 발생해서 미국무부기록만 가지고도 서로 모순을 만들 수 있어요.
즉 미국무부기록이란 말을 가지고 신뢰도가 담보되는게 아닙니다.
그게 어떤 성질의 기록이며 교차검증이 되는지 또한 따져야하는거예요.

이 건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대만이 회담직후에 복기한 회의록은
미국무부에서도 사본을 요청해서 받아가서 보관하는 자료예요.
그럼 이것도 미국무부 자료라는 위치인건 매한가진데 서로 모순이죠 ㅋㅋ

이런게 어려우시면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합시다.
그전까지 임시정부를 한번도 도운적도 없고
조선 독립에 대해서 단 한번도 거론한적 없고
만나달라고 찾아온 이승만을 만나준적도 없고 심지어 정부고위인사또한 그런 적 없는
루스벨트가 이승만에게 '편지'를 받고 조선 독립을 카이로에서 주장했다는게 말이 됩니까?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도대체 왜 독립운동가들 다 살아있던 시대에
루스벨트를 비롯한 미국인들은 3등급까지 받지도 못한 독립기여 공로 훈장을
장제스 부부를 비롯해서 대만인들 수십명이 받았고
(참고로 상위등급 훈장을 받은 미국인들은 6.25전쟁 공로로 받았습니다)
이승만 본인 스스로 장제스에게 독립의 공을 인정했던건가요?

뭐 할 말은 많습니다만 대충 이 정도로 끝낼게요.
그냥 님이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무리 그걸 찾으려고 하셔도
지금 제가 언급한 사실이상으로 루스벨트가 그랬다 라고 볼 사실근거와
정황근거를 찾긴 어려우실거예요.
단순히 그냥 아무튼 그렇다 카더라 식의 얘기가 태반이고
님이 기껏 찾아낸거처럼
그 식민지근대화론 떠들고 독재자들 옹호하던 뉴라이트애들이 퍼뜨린 소리나 나와요.
                    
리틀보이양 21-10-31 14:41
   
야 무식한 인간아 내가 한마디로 정의해줄게
이순신 장군님의 일기를 난중일기라고하지 그런데! 그 난중일기에 없는 내용으로 각색해서 칼의 노래라는 소설을 쓴게 있어 
너는 지금 난중일기가 아니라 재미나 정치적 필요에 의한 소설책을 출처라고 가져온거 아니야 그러니까 지금 내가 장난하냐고 말하잖아
삼국지연의가지고 와서 삼국시대역상 출처라고 하면 내가 아~ 그렇구나 해줘야돼?
                         
tuygrea 21-10-31 14:44
   
닌 지금 장제스 일기를 칼의 노래같은 소설로 취급하고 있는거임?
                         
리틀보이양 21-10-31 14:48
   
내가 언제 대만을 도우래? 장제스가 한국에 도움을 준 역사까지 니가 뭔데 역사수정하냐고 은인에게 침을 뱉는 짓을 하니까 뭐라고 하는거 아냐 누가 ㅉㄱ들 옹호하는걸로 보여?
이해력이 딸려?
                         
tuygrea 21-10-31 14:52
   
허이구 그런 대단한 은인이 나온 나라에서 혐한일뽕짓은 왜 했대??? 아낌없이 퍼부어주는 고려천자도 아니고 88올림픽 시절부터 열등감으로 쒸익쒸익 발광하던 나라에 은인??? ㅋㅋㅋㅋㅋ 조랄 자제좀
     
카깅2 21-10-31 14:24
   
언제부터 섬짱퀴가 우리나라의 은인이었노?ㅋㅋㅋㅋ
역사책을 똥물로 인쇄해서 항문으로 읽어부렀노
          
리틀보이양 21-10-31 14:29
   
장제스에 대해 모르면 그냥 다물고 계세요 무식한거 티남
               
tuygrea 21-10-31 14:36
   
네 다음 섬짱꿔 화교 후손
                    
리틀보이양 21-10-31 14:41
   
ㅋㅋㅋㅋ 이건뭐 정신병자도 아니고
                         
tuygrea 21-10-31 14:45
   
한국어나 제대로 배워 덜떨어진 놈아ㅋ
                         
리틀보이양 21-10-31 14:49
   
와 진짜 무식한 인간들은 상대를 하는게 아닌데.. 내가 잘못했다 원숭이한테 말을 가르치는 격이지..
                         
tuygrea 21-10-31 14:53
   
네 다음 일기와 소설도 구분 못하는 놈ㅋㅋㅋㅋㅋㅋ
                         
형존나쎄 21-11-01 03:01
   
이넘 화교거나 섬찌앙개네 은혜 어쩌고 저쩌고 하는거부터가 ㅋ
                    
리틀보이양 21-10-31 14:58
   
니가 가져온 출처가 일기가 아니라 블로거의 소설이라고 이 등시나 ...
                         
tuygrea 21-10-31 15:03
   
                         
리틀보이양 21-10-31 15:10
   
너 그 블로그 읽기는 한거냐??
     
굿잡스 21-11-01 12:25
   
일단 일기장이고 어쩌고를

떠나서

지금 대만의 가장 큰 문제는

짱국에서 건너온 장제스파인 국민당이군요.

최근 반중 정서 여론으로 자국내에서 눈치를 보곤 있지만

여전히 골수 친중파 인사들이 포진해 있어 이들에 의해 각종 기술 안보 기밀등이 누설되는 상황등.

대만 내부에서 강력한 자유 민주 체재 아래 독립된 주체성을 자각하고 결집시킨다면

섬의 지형상 덩치 큰 돼지 공산 짱국이라도 함부로 덤비기에는 물리적 리스크부터 향후 국제적 파급등 손실과 무리가 상당.
     
굿잡스 21-11-01 12:29
   
그리고

서토 장제스의 당시 호의등도

우리의 독립 항쟁운동이 자국의 이익에도 부합되기에 서로의 뜻이 맞는거지(향후도 전범Jap견제등)

역사적으로 쨉쭝등 주변국은 언제든 적국으로 돌변, 침략해올 수 있는 잠재적 적국이 될 수도 있음에 동시에 늘 자각 경계할 필요가 있군요(북한도 짱국과 과거의 혈맹 관계를 떠나 주체사상이니 어쩌고 하면서 골수 친쭝파들을 괜히 숙청한게 아님)
     
굿잡스 21-11-01 12:46
   
그리고 앞서 대만의 투쟁 의지와 관련

우리의 남북한 전쟁이나 베트남전쟁을 보면

알겠지만

결국 전쟁의 승패와 향후 방향성은 다른 동맹국의 도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본인들 스스로 싸워 반드시 이겨낸다는 신념과 의지 행동임은 너무도 자명하군요.

월남전도 명분론부터 남베트남의 부정부패와 빈약한 의지로 결국 미국이나 한국등의 지원과 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지만

역으로

대만 스스로가 가진 명분과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강한 투쟁심과 독립의 의지가 존재한다면

짱국보다 더 크고 강대한 세력도 어찌 하지는 못할 겁니다.

(아무리 크고 짙은 어둠도 순수한 빛 한점을

어찌할 수 없는건 실체는 어둠이 아니라

빛 그 자체가 실존의 투명한 증표이기 때문이군요)
          
그림자13 21-11-01 20:46
   
정말 동의되는 말씀이네요.
벤벤벤 21-10-31 14:09
   
남베트남 느낌이 납니다. 결국 국론이 단합되고 자국민의 나라 지킬려는 마음이 강해야 하는데... 이건 뭐 해외 원군만 바라고 앉아 있으니... 게다가 대만내에 중국파도 너무 많구요.
     
tuygrea 21-10-31 14:13
   
전쟁 싫어하는건 어느 나라 사람이든 그렇겠지만 그래도 만약 한국이었으면 올 것이 왔구나 할텐데
대만은 이 정도가 아니라 심각해 보입니다
유안 21-10-31 14:16
   
어차피 우리랑 수교국도 아니라서 그냥 강건너 불구경만 하면됩니다.
Lopaet 21-10-31 14:23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11월 22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영중 삼국 정상 회담이 열렸다. 카이로 회담은 중국 입장에서는 근대 외교 역사상 처음으로 자국이 참여한 정상 회담이자 미국, 영국과 동등한 자격에서 참여함으로서 아편전쟁 이래 오욕의 역사를 청산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둔다. 오늘날 비 서구 국가로서는 중국이 유일하게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하나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카이로 회담 덕분이다.



중국만이 아니라 카이로 회담은 우리에게도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물론 열강 정상들이 모인 자리에 우리가 감히 끼어들 수는 없었지만, 그 대신 한국의 독립 문제가 정식 의제로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제사회에서 "듣보잡" 취급을 받았던 우리로서는 열강들 사이에서 한국이 언급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무될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제기한 사람이 장제스라는 사실은 국사책을 통해서도 배울 만큼 잘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장제스는 독립의 은인으로 여겨져 왔으며, 1992년 노태우 정권이 타이완과 단교하고 대륙 중국을 선택했을 때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배은망덕한 짓"이라며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장제스 은인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주장이 나왔다.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제기한 쪽은 장제스가 아니라 루스벨트라는 것이다. 이 같은 논란은 2010년 정치학 박사인 정일화씨가 <카이로 선언 : 대한민국 독립의 문, 선한약속>이라는 책을 내고 일부 보수 언론에서 이에 성급하게 부화뇌동하면서 불 붙었다. 이 책에서 그는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 내내 단 한번도 한국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당시 임시정부의 대미 교섭을 맡고 있었던 이승만이 루스벨트의 특별 보좌관이자 자신과 같은 감리교도였던 헨리 홉킨스에게 개인적인 로비를 통해서 루스벨트에게 한국 독립을 거론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했다. 즉, 카이로 선언문에 한국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승만의 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 학계에서는 그의 주장을 부정하는 쪽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이자 한국 해방사의 대표적인 연구가인 이완범 교수는 2013년 7월 24일 카이로 선언 70주년 기념 학술 회의에서 <카이로 선언의 결정과정에 대한 고찰>을 발표하면서 정일화씨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충분한 사료적 근거 없이 사실 관계를 호도하고 자신의 일방적인 추정과 논리 비약에 의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국 현대사 전문가인 이화여대 정병준 교수 또한 <카이로 회담의 한국문제 논의와 카이로 선언 한국 조항의 작성 과정>에서 정일화씨의 주장은 "기초 사실 확인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자료를 오독했다."라며 질타한다. 실제로 이승만은 1947년 4월 13일 난징을 방문하여 장제스를 회견한 자리에서 카이로 회담을 거론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적극 옹호해 준 것을 감사한다."라고 말했다. 이승만 스스로도 카이로 선언은 장제스 덕분이라고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이러한 주장은 기존 정설을 뒤엎을 만한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어서 순수한 학술적인 목적에서 나왔다기 보다는,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이 섞여 있다. 대한민국 건국의 공로가 누구에게 있느냐, 장제스냐, 루스벨트냐, 김구냐, 이승만이냐라는 것이다. 소위 "건국절" 논란을 비롯해 정치권에서 촉발된 대한민국 건국 논쟁은 우리 해방사를 진영 논리에 따라 자기네 입맛대로 왜곡하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면이 없지 않다. 맥락은 다르지만, 좌파 진영에서 주장하는 "미군은 점령군인가, 해방군인가" 논란 역시 마찬가지이다. 좌파이건, 우파이건 역사의 한쪽만 보면서 자신들이 만든 결론에 선별적인 자료를 끼어맞추고 이를 부정하는 근거는 무시한다. 역사는 정치와 무관해야 함에도 현실 정치와 뗄 수 없는 것이 우리 근대사이다. 그만큼 불투명하면서 서로에게 민감한 부분이 많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빈말로만 "독립 선열 정신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떠들었을 뿐, 그동안 우리 독립운동사가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고 학계 연구도 미진했기 때문이다.



"장제스 은인설"을 부정하는 또 다른 주장이 있다. 바로 장제스의 한반도 야욕설이다.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거론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결코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한반도를 중국의 일부로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태평양전쟁 동안 장제스 정권이 김구의 임시정부를 후원한 것 역시 임정을 중국화하고 이들을 발판삼아 향후 한반도를 자국의 위성국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적인 술책으로 여긴다. 마치 강화도 조약에서 일본이 "조선은 자주 독립국"이라는 문구를 넣은 것이 정말로 조선을 자주적인 독립국가로 인정해서가 아니라 조선에서 종주국으로서 청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속셈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는 근대 이전부터 한국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여겼던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중화관념이 깔려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또한 역사의 한쪽면 만을 보는 것이다. 원래 외교란 정치의 연장이며 어느 나라이건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에서 장제스가 아무런 이해타산 없이 순수한 의도로 우리를 도왔겠느냐, 라며 그의 기여 자체를 죄다 폄하하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분명 어폐가 있다. 그렇게 따지면 세상 어느 나라가 그렇지 않겠으며, 장제스만이 아니라 루스벨트에게도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어야 마땅하다.



장제스가 실제로 임정을 이용해 한반도를 지배할 야심이 있었냐를 떠나서, 장제스 정권과 임시 정부는 그저 지배와 피지배, 종속과 피종속이라는 도식적이고 단순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장제스가 임정을 대한 태도는 스탈린이 폴란드를 대한 태도와는 엄연히 달랐다. 1939년에 나치에게 전 국토가 점령된 폴란드는 항복하는 대신 영국으로 후퇴한 뒤 런던에 망명 정부를 수립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계속 저항하는 쪽을 선택했다. 폴란드 망명 정부는 드골의 자유 프랑스처럼 그저 몇몇 반나치 인사들의 모임이 아니라 폴란드 국민들에 의해 선택되었고 국제법에 의해 정통성을 갖춘 정부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존재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이전부터 폴란드에 대한 야심이 있었던 스탈린은 친소 공산주의 폴란드인들을 모아서 루블린에 친소 정권을 세우고 폴란드 정통 정부라고 우겼다. 전후 폴란드를 자국의 위성국으로 삼아서 서방에 대한 완충지대로 써먹기 위함이었다. 미국, 영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끝까지 영토욕을 버리지 못했으며 폴란드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소 냉전이 시작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임정은 장제스에 의해 만들어진 꼭두각시 정부가 아니라 엄연히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하여 탄생한 독립 단체라는 점에서 루블린 정권과는 태생적으로 달랐다. 비록 중국을 무대로 활동하고 중국 정부의 경제적 원조에 의존했기에 현실적으로 중국의 입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렇다고 철저하게 중국에 예속되어 중국이 시키는대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자주성을 갖추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었다. 중국과의 종속적인 관계는 어디까지나 한시적이고 조건부었다. 임정은 중국의 원조에 기대면서도 중국에 예속되지 않기 위해서 다방면의 노력을 했다. 김구가 이승만을 내세워 대미 외교에 나선 것이나 임정이 OSS 중국지부와 접촉하여 장준하를 비롯해 광복군 소속의 일부 한국인들이 미군 교관에 의해 훈련받은 것은 임정이 중국의 꼭두각시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물론 임정의 독자 행보를 중국 정부가 불편하게 여긴 면도 없지 않으며, 중국 정부는 광복군을 지원하는 대가로 자국 군대의 통제 아래 놓아 두려다가 임정의 강력한 반발을 사자 광복군의 확장을 억제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와 임정의 복잡한 갈등 또한 장제스가 임정을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 꽁꽁 묶어둘 생각이 없었다는 얘기이다. 만약 장제스가 정말로 한국을 자국의 속국으로 만드는데 임정을 발판으로 써먹을 속셈이었다면 스탈린이 그러했듯 김구를 비롯하여 중국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을 죄다 쫓아내거나 숙청하고 말 잘 듣는 꼭두각시들로 갈아치우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였을 것이다.



우리는 독립운동 시기의 한중관계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카이로 회담만 보더라도 국사책에서는 "장제스가 한국의 독립을 거론했다."라는 단편적인 사실만을 짧막하게 언급할 뿐이다. 왜 장제스가 굳이 그 자리에서 그 얘기를 꺼냈는지, 이 과정에서 임정은 어떠한 관여를 했는지, 장제스의 의도가 정말로 옛 종주국으로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회복에 있었다면 조선과 마찬가지로 과거 중국 헤게모니 아래에 있었던 베트남에 대해서는 어째서 거론되지 않았는지, 중국 이외에 다른 열강들이나 미국의 한국 독립에 대한 입장은 어떠했는지, 초안에서 "가능한 빨리(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에서 최종안에서는 "적당한 절차를 밟은 뒤(in due course)"로 바뀌었을 때 장제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등 전후 상황에 대해서는 쏙 빼놓고 있다. 그렇다보니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온갖 억측과 자기 마음대로의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장제스에게 카이로 회담은 중국 근대 역사상 처음으로 참여하는 정상급 회담이었다. 아편전쟁 이래 100여년 동안 열강들의 먹잇감 취급을 받았던 중국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대일전쟁에서 중국인들이 그만한 피를 흘려서가 아니라 서방을 상대로 외교적으로 부단히 노력한 결과였다. 더 중요한 사실은 루스벨트의 호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과 처칠은 하찮은 중국이 감히 자신들과 동격에 선다는 것 자체가 불쾌한 일이라며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다. 일본과의 싸움에서 중국인들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건, 솔직히 강대국들에게는 알 바가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오직 힘의 논리가 있을 뿐이었다. 카이로 회담은 중국의 높아진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 위상은 중국의 힘이 아니라 전적으로 미국의 호의에 달려 있었기에 장제스로서는 카이로 회담에서 서방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한마디로 스탈린처럼 노골적으로 "한반도는 우리 중국의 세력권이니 넘볼 생각마라."따위의 '건방진' 소리를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장제스는 그런 오해를 부를 만한 한국 독립을 거론한 진의는 무엇이었던가.



원래 장제스는 처음부터 카이로 회담에 솔선하여 참석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루스벨트는 참전 이래 최초의 연합국 정상 회담을 준비하면서 외교부장 쑹쯔원을 통해서 장제스도 참석할 것을 제안했다. 그럼으로서 해묵은 문제인 버마 탈환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 사이에 자신이 끼어본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들러리 역할에 불과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1943년 6월 6일자 일기에도 "회의에 참석하여 4대 거두의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한낱 허영일 뿐, 실질적으로 도움되지 않는다."라면서 "남들의 들러리가 되느니 차라리 참석하지 않는 쪽이 중국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라고 썼다. 여기에는 중국을 업신여기는 소련과 영국에 대한 깊은 반감이 있었다. 그러나 루스벨트가 재차 권유하자 장제스는 마지못해 참석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반면, 스탈린은 장제스와의 회견을 끝까지 반대했다. 결국 루스벨트는 카이로와 테헤란에서 두번 회담을 가지기로 결정했다.



장제스는 루스벨트에게 중국이 전후 세계 질서를 이끌 4대 열강의 하나로 인정받은 것에 고무되면서도 그렇다고 다른 열강들을 상대로 "앞으로 중국을 무시하지 말라"며 설칠 입장도 아니었다. 만약 그 자리에서 일본이 패망한 자리를 중국이 차지하겠다는 식으로 야심을 성급하게 드러낸다면 대번에 다른 열강들을 적으로 돌리고 그 동안 어렵게 쌓아올린 성과를 한번에 잃게 된다는 것 쯤 모를 리 없었다. 미국조차 향후 중국이 일본을 대신하여 아시아의 종주국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이 우물안 개구리인데다 서방에 대한 맹목적인 반감과 피해의식으로 가득했던 것과 달리, 국제도시 상하이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장제스는 당대 중국 지도자들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국제적인 감각을 어느 정도 갖춘 인물이었다. 그의 목적은 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되, 일본처럼 서구를 배척하면서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배타적인 세력권의 형성이 아니라 서방과의 협력 속에서 중국을 국제 사회의 아싸에서 인싸로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카이로 회담 참석을 결정한 장제스는 그 자리에서 무엇을 논의할지를 놓고 준비에 착수했다. 타이완과 동북을 비롯해 그동안 일본에게 잃은 영토의 회복과 버마 탈환 작전, 미영중 연합참모회의의 결성, 전후 점령지의 관리 등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조선 독립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중국 입장에서는 직접 관련도 없을 뿐더러 시급한 문제도 아닌 조선 독립을 주요 의제 중 하나에 포함했을까. 여기에는 중국보다 미국과 임정의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당시 조선만이 아니라 아시아-아프리카에는 많은 식민지들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들 식민지의 독립 문제가 불거질 것은 분명했다. 따라서 카이로 회담 이전에도 이미 미국은 이 문제를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었으며 루스벨트는 처칠과의 회담에서 전후 식민지 문제를 거론하기도 했다.



루스벨트는 원칙적으로 유럽식 식민지 경영이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렇다고 이들 국가들을 당장 독립시키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식민지인들 스스로 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없으므로 충분히 성숙할 때까지 열강들의 보호와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남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에서는 식민지와 다를 바 없지만, 목적이 착취가 아니라 보호와 계몽이라는 이타적이고 숭고한 뜻에 있으므로 식민지와는 다르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였다. 선진 문명인으로서 미개한 자들을 가르치고 올바르게 이끌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청교도적인 선민주의 사상은 루스벨트 만이 아니라 당시 미국 엘리트 지식인들의 공통된 사고 방식이기도 했다. 루스벨트의 구상은 신탁통치였다.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과 쿠바에서 그러했듯, 일정한 기간 동안 열강들의 보호와 계몽을 받은 다음, 때가 되었다 싶으면 말하지 않아도 독립을 시켜주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적절한 때"가 언제가 될지는 식민지인들이 아니라 미국이 결정할 일이지만 말이다.



훗날 얄타 회담에서 루스벨트와 스탈린의 밀실 야합과 해방 이후 찬탁-반탁운동으로 불거지는 루스벨트의 신탁통치 계획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의 구상이었다. 이러한 계획은 미국 언론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거론되었으며 1943년 4월 29일에는 중국 언론들이 루스벨트와 영국 외상 이든 사이에서 조선은 아직 독립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에 신탁통치를 할 계획이라는 사실을 처음 보도하면서 임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는 우리의 독립 의지나 역량을 전혀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임정 외무부장 조소앙은 즉각 충칭의 주요 언론사들을 초청하여 "조선은 역사적으로나 문화, 정치적으로 보더라도 독립 국가를 세울 능력이 있으며 외세가 대신 관리할 이유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은 즉각 독립될 것과, 만약 조선의 완전한 독립과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일본을 상대로 싸운 것처럼 조선 민족은 어떤 외세를 상대로도 끝까지 항전하겠다고 선언했다. 반탁운동은 1946년이 아니라 이미 이 때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임정은 단순히 몇몇 언론을 통해서 하소연을 늘어놓은 것이 전부가 아니라 나름대로 외교적인 노력에도 나섰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미국이나 다른 열강들과의 교섭 창구는 커녕, 변변한 정보조차 없었던 임정으로서는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는 중국이었다. 이승만 추종자들의 막연한 믿음과 달리, 임정의 미주 외교를 맡고 있었던 이승만은 영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 이외에는 외교 능력의 부재로 미 국무부에서도 그야말로 기피 대상일 뿐더러, 워낙 독선적인 성격 탓에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기에 급급할 뿐 임정과의 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임정은 중국 측 고위 인사들을 불러모아서 좌담회를 개최하고 조선의 독립을 지원해 줄 것을 호소했다. 중국 인사들은 임정 인사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고 함께 일본과 싸운다는 동지 의식도 있었다. 이들은 조선의 독립을 열렬하게 지지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외무차장 신익희는 중국 외교부의 접촉을 통해서 장제스가 카이로 정상 회담에 참석할 예정임을 알아냈다. 임정은 중국 조직부장 우톄청을 통해서 장제스와의 직접 면담을 요청했다. 7월 26일 임정의 영수인 김구와 조소앙,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등 임정의 주요 인사들이 장제스와 회견했다. 장제스는 그 자리에서 임정의 주장에 적극 공감하면서 비록 어려움은 있겠지만 자신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임정 선전부장 김규식은 언론을 통해서 장제스와 임정의 회견 사실과 "장제스가 조선의 즉각 독립에 찬성했음"을 널리 알렸다. 즉,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의 조선 독립 거론은 일부의 주장마냥 그의 일방적인 구상이나 야심이 아니라 임정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장제스의 원칙적인 약속과 별개로, 중국 입장에서 열강들을 상대로 조선 독립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은 그저 한번 툭 던져본 다음 아니면 말고 식으로 끝낼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과 영국, 소련이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보장이 없을 뿐더러, 자칫 엉뚱한 갈등을 만들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일본과 전쟁 중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을 자극하는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었고 영국은 조선 독립이 인도의 독립 운동에 불 붙일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할 것이 불보듯 뻔했다. 영국과 소련이 반대한다면 미국 또한 적극적으로 나설 리 없었다. 그렇다고 미국과 영국의 원조에 기대고 있는 중국이 단독으로 조선 독립을 강력하게 밀어붙일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하지만 중국이 주저하는 사이 오래지 않아 대일전쟁에 뛰어들 것이 뻔한 소련이 중국보다 먼저 조선의 독립을 거론한다면 조선은 친소쪽으로 기울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이러한 현실적 딜레마 속에서 그래도 중국이 먼저 나서서 조선의 독립을 거론하는 쪽이 이해득실을 따졌을 때 이득이 더 크다고 결론을 내렸다. 장제스는 중국을 출발하기 전이나, 카이로에 도착한 이후에도 자신의 일기에서 루스벨트와 처칠을 상대로 논의할 내용을 조목조목 정리했으며 "전후 조선 독립 문제"도 빼놓지 않았다.



1943년 11월 21일 오전 7시 장제스는 정상들 중에서는 카이로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 처칠은 오후에, 루스벨트는 다음날 오전이었다. 11월 23일 오전 첫 정상 회의가 열렸다. 회의의 주제는 가장 시급한 문제인 대일작전에 대한 것이었다. 이날 저녁 장제스는 루스벨트의 숙소에서 저녁 만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일본 패망 후 만주와 타이완, 펑후열도의 중국 복속과 더불어 조선의 독립에 힘을 실어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 측은 만찬에서 논의된 사항에 대한 별도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장제스의 비서장이자 나중에 유엔 헌장에 중국 대표로 서명하는 왕충후이( 王寵惠)는 회담 내용을 꼼꼼히 기록하면서 루스벨트가 장제스가 제안한 조선 독립에 찬성했다고 썼다. 이 날 작성된 장제스의 일기에도 이렇게 적혀 있다. "조선 독립 문제에 있어서 나는 루즈벨트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것과 조선 민족이 독립을 얻어야 한다는 나의 주장에 동조해 것을 요청했다.(朝鲜独立问题,余为此事特别注重引起罗斯福之重视, 要求其赞助余之主张,使朝鲜人民达成独立之目的。)" 이것만 보더라도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 독립을 거론한 쪽이 장제스임은 분명하며, 정일화씨의 주장은 미국 역할론을 강조하기에 급급하여, 최소한의 사실관계조차 확인하지 않은 역사 왜곡인 셈이다.



장제스와 루스벨트 사이에서 논의된 안은 홉킨스에 의해 정리되어 또 다른 참여자인 처칠에게도 전달되었다. 그러나 영국이 걸고 넘어졌다. "일본 패망 후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문구를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한다"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중국 측이 거세게 반발하자 영국은 카이로 회담에서 굳이 상관도 없는 조선 독립 문제를 논의할 이유가 없으며 소련의 의견도 들어봐야 한다는 이유로 아예 논의 대상에서 빼줄 것을 요구했다. 이들로서는 조선의 독립 자체는 영국의 이익과 상관없지만, 단순히 조선 한 나라만이 아니라 인도를 비롯해 가뜩이나 격앙되고 있는 영국 식민지들에도 엉뚱한 불똥이 튈까 걱정이었다.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절의 제국주의자였던 처칠은 대영제국의 힘은 오직 식민지에서 나오며 식민지가 없으면 대영제국도 없다고 굳게 믿었다. 따라서 식민지 문제에서 한발짝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결국 루스벨트가 절충했다. 루스벨트는 조선 문제는 소련과 협의할 대상이 아니라며 영국의 항의를 일축하고 카이로 선언문에 포함시켰다. 그 대신 조선의 독립은 인정하되, 그 시기에 대해서는 "가능한 빨리"에서 "적당한 때가 되면"으로 바꾸었다. 처음부터 조선을 신탁통치한 다음에 독립시킬 생각이었던 루스벨트로서는 나중에 제 발목을 잡힐만한 문구를 넣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제스도 여기에 대해 불만을 가지거나 굳이 태클을 걸지 않았다. 그로서는 조선의 독립을 명문화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임정에 대한 체면 치례를 한 셈이었다. 더 이상 이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해봐야 도리어 역효과만 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시급한 문제는 얼마든지 있었다. 홍콩 반환 문제에 있어서도 처칠은 고집불통이었고 루스벨트의 중재도 소용없었다. 결국 장제스는 이 문제에 대해서 서로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음으로서 전후에 다시 논의키로 했다.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한낱 조삼모사나 다름없는 카이로 선언문이 발표되었을 때 임정의 반응은 "기쁨을 감출 수 없다."였다. 김구는 "3천만 동포를 대표해서 세 거두에게 감사를 표한다."라고 담화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들은 일본 패망 후 조선의 독립이 보장되었다는 사실에만 주목했고 그게 언제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될 지, 그 안에 감추어진 열강들의 진짜 속내가 무엇인지 따위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국제 정치에 대한 무지함과 둔감함 속에서 그저 어떻게 되겠지 하는 식으로 막연히 열강들의 선처에 기대었을 뿐, 아무런 계획이나 대비조차 없었던 이들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뒤에야 자신들이 속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대안이나 타협책을 찾는 노력 없이 그저 맹목적인 반탁 운동을 재개하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세상 물정 모르는 것이었고 그런 방식으로 미-소가 굴복할 리도 없었다. 투쟁은 해 보았되, 정치를 해보지 못한 임정의 한계였다. 덕분에 어부지리를 차지한 쪽은 임정이 아니라, 민족을 위해 내세울 만한 업적은 없지만 정치적 기민함과 권력에 대한 감각만큼은 누구 못지 않았던 이승만과 김일성이었다.



비록 카이로 선언문이 우리에게 즉각 독립을 실현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저 열강들의 립서비스에 불과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시기가 문제일 뿐, 강대국 지도자들은 조선을 일본의 통치에서 독립시켜야 한다는 것에 원칙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더 이상 조선의 독립이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일본과 같은 추축국 중 하나인 이탈리아의 식민지, 패전 후 나치와 결탁한 비시 프랑스령 식민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 없이 유독 조선 독립만이 명문화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상황에서는 분명 파격적인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일본이 패망하니까 식민지인 조선이 독립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막연히 생각할 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패전국의 영토를 과연 어디까지 인정할지를 놓고 강대국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이로 회담에서 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인 1914년을 기준으로 그 이후에 획득한 영토와 그 이전에 획득한 영토를 서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식민지 대국인 영국으로서는 패전국 식민지 문제가 자국 식민지 독립 문제에 불똥튀지 않도록 선을 그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루스벨트는 처칠의 주장을 일축했지만 그렇다고 명확하게 결정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루스벨트가 죽은 후 트루먼은 태평양전쟁을 조속히 끝내야 한다는 강한 압박을 받아야 했다. 특히 반공주의자들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스탈린을 경계하면서 소련의 대일 참전을 막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강요하는 대신 적당한 선에서 절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루스벨트의 전임자였던 후버 전 대통령이었다.



일본은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 항전하는 명분으로 소위 국체, 즉 천황제의 존속을 내세웠지만 진짜 속내는 따로 있었다. 식민지의 유지였다. 일본은 만주를 비롯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강탈한 영토를 포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그 전에 차지한 영토인 조선과 타이완은 국제법 상 정당한 획득이므로 승전국들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한 인구가 7천만명에 달하는 일본으로서는 식민지 없이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이 일본 지도부의 생각이었다. 일본 지도부는 비밀리에 중립국을 통해서 연합국측에 접근하면서 조건부 항복을 협상하려고 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천황제는 몰라도, 식민지는 안된다는 입장을 고집했다. 왜냐하면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의 독립과 타이완의 중국 반환을 선언했는데 이제와서 자신이 함부로 뒤엎을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카이로 선언문이 트루먼의 족쇄가 된 것이었다. 일본 지도부는 중국 영토인 타이완은 포기하더라도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조선만큼은 끝까지 손에 쥐고 있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미국의 입장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두발의 원폭과 소련군의 침공이 시작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에 동의했다. 달리 말해서 카이로 선언문에 조선 독립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트루먼은 일본을 대소 봉쇄의 한축으로 쓰기 위해서 조건부 타협하여 우리는 여전히 일본의 일부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중국 근대사에서 정치적으로 비중이 큰 인물일수록 왜곡되거나 와전된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공산당이 역사를 자신들의 집권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도구로 악용했기 때문이다. 이분법적인 논리에 따라 공산당에 우호적인 사람은 미화하고 반대로 소위 "인민의 적"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깎아내렸다. 쑨원만 해도 비록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공산주의에 매우 우호적이었으며 국공합작을 수용하여 공산당이 중국 역사의 전면에 나오게 한 공을 높이 평가하여 "혁명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가 중국 민중을 위해서 평생을 혁명에 바쳤다는 사실만 강조하고 친일파에 독선적이고 권위적이며 친일 군벌들과 타협했다는 사실은 덮어졌다. 그의 아내였던 쑹칭링 또한 "조국과 결혼한 여자"라며 포장되었다. 장쉐량은 시안사변을 일으켜 항일통일전선을 실현했다는 이유로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반면, 그가 만주사변에서 저지른 실수는 죄다 장제스의 탓으로 돌려졌다. 반면, 장제스처럼 반공주의 지도자들은 악당이 되었다. 일본과 싸우기 전에 국내를 우선 통일해야 한다는 소위 "선안내 후양외" 정책은 일본에 대한 투항주의로 규정되었다. 루거우차오 사변이 폭발했을 때 그가 굴복 대신 항전을 선택한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항일 여론에 마지못해 따른 결과라는 것이었다. 장제스의 "선안내 후양외"가 말 뿐인 구호가 아니라 실제로 경제 군사 개혁이 뒤따랐다는 사실은 외면했다.



소위 공산당 혁명 사관은 1991년 한중 수교 이후 친중 좌파 학자들에 의해 우리 사회에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다. 당시 군부 독재에 대한 비판과 민주화 바람이 맞물리면서 장제스는 패망한 남베트남이나 우리의 군부 독재 정권에 대입되었고 이를 타도한 마오쩌둥은 인민의 해방자이자 아시아의 체게바라로 포장되었다. 그가 우리 독립 과정에서 기여했다고 알려진 공은 죄다 날조이거나 음흠한 술책으로 여겨졌다. 여기에는 타이완에서 철권 통치를 했던 장제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만이 아니라 최근 중국 공산당의 사드 보복에서 촉발된 반중 감정과 별개로, 삼한 시절부터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중국에 대한 뿌리깊은 경계심도 깔려 있다. 시진핑을 비롯해 오늘날 중국 지도자들이 소위 "대국굴기"를 내세워 국제사회의 룰을 함부로 무시하고 주변국에 횡포를 부리는 것처럼, "아마도 그럴 것"이라며 장제스 역시 그와 같은 부류이지 않겠느냐라고 여긴다.



장제스는 19세기에 태어난 사람이고 아직 청조가 건재하던 시절에 성장기를 보냈다. 오늘날 우리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본다면 그는 봉건적이고 유교적인 사고를 가진 "옛날 사람"이었다. 소위 사대와 책봉이라는 중국 중심의 문화에서 자라난 그가 현대적인 마인드로 우리를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비록 군인 출신임에도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유연한 사고를 갖추고 있었으며 적어도 대륙 시절에만 해도 당시 중국 지도자들 중에서는 그나마 "깨인" 축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임정을 지원한 것이 전적으로 중국의 이익을 배제한 순수한 의도만은 아니었겠지만, 그렇다고 조선을 중국의 일부로 여겼다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 바깥에 대한 인식이 의화단과 크게 다를 바 없었던 마오쩌둥과 달리, 장제스는 세계 질서가 중국이 아니라 미국 중심이며 설사 동아시아에서 사대-책봉이라는 철 지난 중화 헤게모니를 부활하고 싶어도 미국과 소련이 이를 용납할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여러 세력이 맞부딪치는 극동은 명청 시절처럼 더 이상 중국 한 나라가 제 입맛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임정과의 관계에서도 중국의 꼭두각시로 삼아서 중국의 뜻에 따를 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평등하지는 않더라도 임정의 입장을 최대한 존중하는 쪽이었다.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 독립을 거론한 것 역시 임정의 요청에 따른 것이지 일부의 막연한 주장마냥 장제스가 임정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꺼낸 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즉각 독립"을 실현하지 못한 것은 그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열강들의 이해 타산과 힘의 논리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에는 중국의 힘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열강들 중에서 그나마 우리를 존중하고 우리의 말에 귀 기울여 준 유일한 지도자는 장제스였다. 루스벨트만 하더라도 자신의 주관적인 선입관과 편협한 사고만으로 "식민지인들은 미개하여 자치 능력이 없으니 보호하고 가르쳐야 한다."라는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과 밀실 야합하면서 스탈린이 한반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를 물었을 때 루스벨트는 "한 40년 신탁통치하면 된다."라고 대수롭지 않은 문제인양 대꾸했다. 그의 눈에 조선인들을 비롯한 식민지인들은 하나같이 그저 가난하고 무지하면서 정치적으로 미성숙한 미개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어떤 역사와 문화를 가졌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서로의 차이를 무시하고 미국의 가치관을 주입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따위는 알 바가 아니었다.



루스벨트를 계승한 트루먼 역시 한반도 신탁통치를 소련과 논의하면서 당사자인 조선인들의 입장을 들어보거나 설득하려는 노력 따위는 없었다. 그저 우리 미국이 너희를 위해서 이렇게 하기로 정했으니 마땅히 따라야 한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조선인들더러 자치 능력이 없으니 우리가 대신 다스리겠다고 말하면서도 미국인들이 그 이상으로 조선의 사정에 무지하다는 사실은 망각했다. 또한 조선인들 입장에서 가장 절실한 재정적 원조에 대해서도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3년에 걸친 미 군정의 남한 통치는 일제나 소련 군정 이상으로 대혼란과 부작용, 우리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미국의 의무를 강조하면서도 그에 따르는 실질적인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것이 미국 엘리트들의 모순이자 도덕적 위선이었다. 게다가 소련과의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루스벨트가 내세웠던 소위 이타적 봉사주의는 온데간데 없었다. 어느 새 한반도는 미-소의 전략적 이익을 위한 완충지대라는 희생양이 되면서 남북의 허리가 잘려나갔다. 하지만 미 군정은 미국의 방식에 따르기를 거부하는 조선인들을 대화와 설득 대신 탄압으로 일관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제주도를 피바다로 만든 4.3의 비극이었다. 하지만 장제스의 야심 운운하면서도 막상 여기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 아이러니랄까. 그만큼 우리 해방사가 관심 밖이라는 얘기이다.



<참고자료>

蔣介石日記 揭秘, 張秀章

카이로선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시준

카이로선언의 기초와 한반도 독립 조항의 의미, 장박진

카이로회담에서의 한국문제와 蔣介石, 배경한

카이로회담과 한중관계, 배경한

카이로 회담의 한국문제 논의와 카이로 선언 한국 조항의 작성 과정, 정병준

한국의 독립에 관한 미국의 인식과 정책, 차상철

카이로선언과 일본의 영토문제, 박은진

한국광복군의 창군과 항일투쟁, 백기인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의 「和平工作」과 연합국의 대응, 김기조
     
tuygrea 21-10-31 14:28
   
https://m.blog.naver.com/joonho1202/221762928265

1차 출처: 장제스 일기ㅋ
          
리틀보이양 21-10-31 14:34
   
장제스의 일기를 책으로 읽어보세요 그 블로그 찌라시입니다
               
tuygrea 21-10-31 14:37
   
1차 출처: 장제스 일기
1차 출처: 장제스 일기
1차 출처: 장제스 일기
1차 출처: 장제스 일기

장제스 일기 내용 인용해서 정리한거잖아요 시각기능에 문제있음?
                    
리틀보이양 21-10-31 14:43
   
야 무식한 인간아 내가 한마디로 정의해줄게
이순신 장군님의 일기를 난중일기라고하지 그런데! 그 난중일기에 없는 내용으로 각색해서 칼의 노래라는 소설을 쓴게 있어 
너는 지금 난중일기가 아니라 재미나 정치적 필요에 의한 소설책을 출처라고 가져온거 아니야 그러니까 지금 내가 장난하냐고 말하잖아
삼국지연의가지고 와서 삼국시대역상 출처라고 하면 내가 아~ 그렇구나 해줘야돼?

심지어 그책에는 니가 말한 내용이 없어 그러니까 책이나 읽어보고 떠들라는거야
                         
tuygrea 21-10-31 14:45
   
닌 지금 장제스 일기를 칼의 노래같은 소설로 취급하고 있는거임?
                         
리틀보이양 21-10-31 14:50
   
니 블로거가 사기라고 이해가 안돼? 장제스 일기에 그런 내용이 없다고 그러니까 내가 책이나 읽어보고 글을 쓰라고 하는거 아냐
                         
tuygrea 21-10-31 14:54
   
그래그래 백번 양보해서 니 말대로 저런 내용이 없다고 치자
근데 장제스의 중화민국에서 탈피하며 무논리 혐한일뽕으로 발광하던 나라를 왜 도와줌??
                    
리틀보이양 21-10-31 15:03
   
없다치자는 뭐야? 그리고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왜 떠들지? 내가 언제 대만을 도와주자고 했어?
역사왜곡하지말라는거잖아 장제스에 대한 찌라시로 왜 없는 얘기하냐고 쩍바리 ㅅㅋ들 처럼 
대만 안도와줘도돼 수교도 안했고 별 상관도 없는 나라야  ㅇㅋ?
카깅2 21-10-31 14:25
   
전쟁나도 절대 안도와줄거니까 니들끼리 알아서 해라
GootShot 21-10-31 14:25
   
대륙 짱/깨 스파이 바글바글 하고,스스로도 지킬 의욕도 없을텐데
미,중간 놀이터가 한반도에서 대만으로 바뀌면 땡큐, 왜구 새끼들 후빨하는것들이 ㅋㅋ
가생루리 21-10-31 14:28
   
대만 니들은 일본좋아 하면서 일본힌테  도와 달라고 해
퀄리티 21-10-31 14:31
   
일뽕인데다 차이니즈 타이페이 이기까지 한 변종생물의 섬
Lopaet 21-10-31 14:54
   
가끔 넷상에서 대만을 까는 글을 보면, 한국 전쟁 당시 병력 지원 요청을 대만의 장제스 총통이 무시했다, 라는 식의 이야기가 자주 눈에 띕니다. 논파된 것으로 알았는데 여전히 많이 돌아다니더군요. 따라서 아예 이를 다룬 논문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사실 장제스 본인은 한국전쟁에 상당히 큰 관심을 보였고, 전쟁 다음 날인 6월 26일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보를 보내 '우리 양국은 反共과 반침략에 있어 같은 입장에 있으므로 소식을 듣고 깊은 관심을 표하는 바입니다.' 라고 입장을 표명합니다. 그리고 본인 일기에도 예상했던 바다, 라며 반응을 기록했죠.



그는 생각보다 날카롭게 정세를 판단했으며, 북한의 배후에 소련이 있다고 주장하며 북한 제제 결의로는 침공을 저지할 수 없다고 언급했습니다. 여기에 국민당 외교부장을 통해 유엔 안보리에 소련이 남한 침공의 진정한 침략자이며, 북한은 소련의 괴뢰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한 청원 제출여부를 연구하도록 요청했으나 대만 측이 소련을 오히려 자극한다며 역으로 처지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미국이 경고하자 그제서야 입을 다물게 됩니다.



대신 장제스는 한국에 파병을 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으며 개전 다음 날인 26일부터 논의에 착수합니다. 또한 주한 대만대사인 邵毓麟은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P-51 10기를 받았으나 조종사가 부족해 대만의 지원을 요구할 수도 있으며 이에 대비해야한다는 전문도 보냈죠.



이에 한국에 조종사를 파견해주겠다고 제안하는게 어떻냐는 의견이 대두되었으나 장제스는 신중하게 한국이 미국에 요청을 하고, 미국이 대만에게 다시 요구를 한다면 그 때 가서 생각해보자고 이야기를 합니다.



구체적인 파병안은 6월 29일, UN 안보리로부터 파병 승인을 받자 나왔으며 장제스는 즉시 육군 3개 사단을 파견할 것을 명령합니다. 파견될 부대는 劉廉一 장군이 지휘하는 제67군을 주력으로 하여 제80군의 제201사단을 따로 차출해 약 3만 3,000명으로 된 1개 군을 신편하고, C-46 수송기 20기로 이들을 수송하려고 하죠.



장제스도 의외로 신경을 써준 부분인데, 제67군과 제80군 소속 제201사단은 공산군과의 교전을 통해 풍부한 경험을 갖춘 베테랑들이었으며 적지 않은 성과를 냈었던 정예부대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 파병을 두고 내부에서 논란이 벌어집니다. 군부를 중심으로 당장 자국을 방위한 전비도 태부족인 상태에서 정예 3개 사단을 빼버리면 어쩌자는 거냐고 반발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외교부를 중심으로한 정부 관료들은 같은 반공 국가인 한국이 위기에 처했으며 다음은 자신들일 것이라며 파병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게 되죠.



4시간 동안의 난상토론 끝에 장제스는 외교부의 손을 들어줬으며 이후 파병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고 7월 1일에 장제스는 劉廉 一장군을 호출해 파병부대에 대한 지휘권을 인계했습니다.



물론 장제스도 생각은 있었습니다. 정예 3개 사단을 빼버리면 전력 공백이 생길 수 밖에 없었고 "만약 우리 군대를 한국에 파견한다면 전반적인 전략과 최대 병 력을 미리 결정해야 하며 최소한 10만 명 이상의 예비부대가 있어야 한다." 라며 추가 예비대 전력을 구축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대만 국민당 정부와 장제스는 한국에 파병을 할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전적으로 이제 이들은 미국의 손에 따라 파병이 될지, 혹은 불발될 지가 갈리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문제는 미국 측이 대만의 군사 지원을 탐탁치 않게 보았고, 이들이 3개 사단을 파병하면 중국이 본격적으로 북한을 지원하는 빌미를 준다고 했으나 실상은 대만이 이 기회를 이용해 미국의 군사원조를 쟁취하려들 것으로 보았습니다.



미국은 대만의 참전 의사는 감사히 받겠으나, 대만 본토 방어가 더욱 중요하다고 언급했으며 '“미국정부는 한국파병이 대만의 방어병력 일부를 감소시키는데 따 른 이해득실을 최종 결정하기 전에 맥아더 사령부 대표가 대만의 중국군사당국과 대만 방어계획에 대해 모든 것을 협상해야 할 것 같다고 여긴다.' 라고 사실상 거절 의사를 밝힙니다.



여기에 대만이 병력을 뺀다면 그 공백을 미군이 메울 것인데, 차라리 더 강력한 미군이 참가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도 언급했으며 조금 자존심 상하는 말로 대만 측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대만 국민당군은 중화기가 부족하고 병사 급여를 지급할 돈도 없으며 수송 능력도 매우 결핍되어 있는데, 굳이 국민당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한다면 미군이 현재 지고 있는 부담을 가중시키게 될 것이므로 당분간 파병요청을 받아들 이기 어렵다, 라고 극딜을 가하죠.



75,000명의 한국군을 재무장시키는데도 바쁜데 대만군 33,000명이 추가되면 보급상 더욱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한 것 입니다. 거기에 당사국인 한국 정부도 딱히 대만군의 지원을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역시 대만의 참전 의사는 매우 감사하지만, 국군 병력은 충분하며 필요한 것은 중화기와 전차, 그리고 항공기라며 사실상 병력 지원 요청을 거부합니다. 그러면서 북진 시, UN군과 미군이 돕지 않을 때가 된다면 그 때서야 대만 국민당군의 지원을 요청하겠다며 통볼르 보내죠.



당사국과 미국이 딱히 탐탁치 않게 여기자 대만이 군대를 파병할 논리는 사실상 사라지고 자존심만 팍팍 구기게 된 셈이 되었습니다. 장제스는 계속해서 중국-일본-한국 연합군을 결성하여 미국의 지휘 통제 아래에 북한의 공세를 저지해야한다고 했지만 소리없는 아우성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50년 11월이 되어서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다시 한 번 국민당군을 파견할 준비를 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미국 측에 본토 수복 의사가 있는지 여부를 물어봅니다.



그러면서 동북 지방, 즉 만주로 국민당군이 진격하는 것에 대해서도 물어보며 UN군의 패배에 대해서도 국민당군이 지원할 수 있는 것은 성심껏 돕겠다며 강한 의지를 표명하죠.



그는 ABC 뉴스 논설위원을 방문하는 자리에서 UN해군과 공군이 국민당군을 엄호해준다면 지상군으로 밀고 들어가 여전히 잔존해서 버티고 있는 다른 국민당군과 합세할 것이며, 중공의 통제를 받고 있는 많은 부대가 이탈해올 것이라며 대만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럴 의사는 미국에게 없었습니다. 맥아더는 아예 대만 측 사절단에게 '지금과 같은 때에는 중국 정부가 한국의 정세에 대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어떤 의견도 밝히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 렇지 않으면 자유중국이 세계대전을 도발하려 한다는 국제 여론이 형성될 것이고 그러면 중국에 도리어 불리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식의 언급을 날립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계속해서 자국에 대한 파병보다는 대륙을 직접 공략해 중공군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어달라는 요청만 보냅니다. 또한 한국의 외무장관 역시 국민당군이 참전하는 것은 좋으나 피아식별 문제가 있지 않느냐며 분명한 반대의사를 밝혔죠.



한국 측은 개전 초기부터 국민당군의 지원 의사 자체를 받을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미국은 海南島로 진격해서 제 2전선을 열어 중공을 견제해주길 바랬습니다.



그러나 장제스는 이를 반대했고 한국파병을 통 해 반공대륙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그의 희망과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요구를 거부합니다. 그렇게 지지부진하던 파병 논의는 정전 협의가 시작되면서 사그라들게 되죠.



장제스는 매우 아쉬워했다고 하는데, 만약 국민당군이 한반도에 직접 왔더라면, 혹은 제2전선을 여는데 장제스가 작전을 허가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역사에 IF는 없지만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할 여지를 남겨줍니다.
     
tuygrea 21-10-31 14:57
   
장제스가 한국을 순수하게 도와줬다 아니다 논란은 둘째 치더라도 지들이 필요할 때만 선택적으로 유리한 논리만 들먹이면서 무논리 혐한 발작하는 나라를 왜 도와줌?
          
Lopaet 21-10-31 15:06
   
중화주의를 자초한 것은 애초에 이성계와 정도전의 자발적인 선택이었음.

대만과 중국의 갈등을 우리는 표면적으로 관망하면서 국익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선택해야 겠지만, 대만으로선 중국의 정통성을 가진 나라라는 고집도 있고 중국으로선 패권국이라는 자존심이 있는 상태

우리로선 중국이 까불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더 좋은. 그러면 인도 - 미국 태평양 라인쪽에 지원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함.

분명한 건 대만은 625당시 한국에 대한 지원의사를 밝혔었고,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는 대만으로선 명분꺼리가 됨.

중공이 대만을 함부로 못한다는 것이 결론나면, 티벳, 위구르, 외몽골등의 식민지들도 희망이 생김.
               
tuygrea 21-10-31 15:09
   
ㅋㅋㅋ 필요할 때만 중화인, 하나의 중국 들먹일 때는 대만인? ㅋㅋㅋㅋㅋㅋ
                    
Lopaet 21-10-31 15:23
   
대만의 정치 구조가 그렇게 돼있다. 토착 독립 세력인 민진당과 자유중국 세력인 국민당의 대결구도이다가 점차  독립쪽으로 방향이 잡히고 있지... 우리로선 나쁘지 않은 방향임.
리틀보이양 21-10-31 15:04
   
없다치자는 뭐야? 그리고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왜 떠들지? 내가 언제 대만을 도와주자고 했어?
역사왜곡하지말라는거잖아 장제스에 대한 찌라시로 왜 없는 얘기하냐고 쩍바리 ㅅㅋ들 처럼 
대만 안도와줘도돼 수교도 안했고 별 상관도 없는 나라야  ㅇㅋ? 그런데 거짓말은 하지말자고
한국인이 수준떨어지게 그런짓하면 안되잖아
     
tuygrea 21-10-31 15:05
   
          
리틀보이양 21-10-31 15:14
   
이승만 외교력 띄워주기 아.... 차라리 전두환을 찬양하지그러냐?
분별력좀 키워라 언론사도 좀 구분해서 보고 알았냐?

그리고 가짜 찌라시좀 그만봐 정신이 썩는다
안타까워서 글남긴다
바론 21-10-31 15:14
   
친일파를 도우는일은 절대 없을것.
nigma 21-10-31 15:18
   
남의 나라 일인데 극혐하 것 까지 있겠습니까?
이미 이 사이트에 여러차례 나온 얘기지만 대만의 진짜 문제는 중공의 위협이 아니라 자신들의 스텐스라 생각합니다.
대만이 친중세력이 정치, 경제, 군사에 너무 많고 미국사이에 줄타기 하고 있는데 미국이 애초 대만에 너무 많은 기회와 특혜를 준 것도 실수라 생각합니다.
중공이 미국애 도전하기 까지 첨단산업들을 따라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대만과 중공의 산업경제적 유착, 그리고 일본의 유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덕(중공이 강탈하고 훔치고 했으니...)도 있습니다.
대만의 중국과 경제적으로 밀착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이해는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고 선을 넘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특히 TSMC등은 중공 반도체에 기여한 바가 큽니다. 미국이 TSMC를 너무 키워준 것은 큰 전략적 실수라 생각합니다.)
미국등 서방은 대만과의 경제산업체인을 조정할 때 까지는 대만을 감싸겠지만, 만약 그럼에도 중공이 도발 해온다면 미국은 대만을 그냥 넘겨줄리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고 따라서 대만이 살아남던 중공에 넘어가던 산업기반들이 무사하거나 온존하기는 힘들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만은 미국이 있다고 안심할 게 아니라 스스로 자신들을 지켜려는, 또는 중공에 대한 저항의 의지가 있어야 하고 또 유사시 우리나라나 일본으로 긴급 피난도 고려하고 계획히야 할 거라 생각합니다.
     
Lopaet 21-10-31 15:30
   
이런 의견이 상식적인 의견이죠.

대만 자체적인 국방력 강화의 노력이 없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만이 모병제로 전환한다는 것도 좀 비상식적으로 보이고

민진과 국민당의 갈등에 있어 아직도 정치적 방향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 가장 맹점같아요.

국짐당과 민주계열의 갈등이 심한 우리나라도 최소한 국방에는 소홀하지 않는데 말이죠
nomore 21-10-31 16:19
   
단교?
MoralGaze 21-10-31 20:29
   
장제스가 말하는게 뭐든 우리나라가 대만을 도와줄 제대로 된 명분이 없는건 사실인데 왜 장제스 일기니 뭐니 하면서 발작하는건지 글쓴이분을 이해할 수가 없네요. 지금 주류만 봤을때는 장제스가 우리나라를 먹으려고 한다 이런 내용은 비주류로 인식되고 있는게 팩트 같은데.

우리나라를 애초에 먹으려고 했다면 상식적으로 상해에 임시정부 만드는거 승인 해줄 이유가 있었을까요?
     
승리만세 21-11-01 02:04
   
괴뢰화를 하려면 당연히 자신이 후원하는 세력을 키우는게 당연한겁니다.
소련도 그랬고요. 전후에 소련에 망명온 각국 지도자급 인사들을 다시 동독 폴란드등 소련점령지에 정치지도자로 보내 정권을 세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아시다시피 소련의 위성국들이 됬고요
임시정부는 도망칠데가 중국밖에 없었고 장제스는 그들을 받아서 손해볼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전후 어떻게든 쓰임새가 있었으니까요.
감독 21-11-01 00:49
   
중국에서 독립운동하는 조선인들을 본 뒤에 감명받아서 임시정부를 도와준건 물론이고, 카이로 회담에서도 조선의 독립을 적극 지지해준 장제스는 우리에게는 고마운 양반입니다.
미,영,소련,중국이 모인 자리에서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게 쉬운일은 아니었을테니까요.
(예를 들면 인도를 식민지로 두고있는 영국입장에서 일제강점하의 조선의 독립만을 지지할수가 없으니까요..그러고보니 장제스가 인도의 독립에도 약간 일조를 하긴했네요 ㅎ)

그건 그렇고 장제스 들먹이면서 도와달라고 때쓰려면, 최소한 지들이 먼저 목숨걸고 지키는 폼이라도 내던가가 먼저 아닐까 싶은데요.
승리만세 21-11-01 01:55
   
장개석이 직접한국을 병합할 생각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한국을 괴뢰화시키려는 야욕은 확실히 있었던것 같습니다.
국제사회에 한국은 전통적으로 중국에 속해있었단 논리로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연합국에 어필했고 결국 일본으로부터 떼어냈죠. 여기서 독립후 점진적으로 직접합병하냐 위성국 괴뢰국등을 세워서 소련처럼 수많은 나라를 거느리며 소련에 맞서 동아시아지역의 중화패권에 입각한 연방을 만드느냐, 그런 구상을 하고있긴하다가 정작 중요한 국공내전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물건너간거죠
사실 임시정부 최대 후원세력이기도 했지만, 그 빌미로 국민당에 종속되어 아무것도 할수도 없었고 간섭과 통제에 벗어나려면 곧장 국민당군이 쳐들어와 강제로 진압하고 강제무장해재 당하는 일도있었죠. 이런 정황만봐도 장개석은 독립된 한국을 어떤식으로든 최소한 중국의 속방, 연방의 일개구성원으로 만들 야심은 분명있던것같습니다.
과부 21-11-01 13:37
   
위에 많이 싸우시는데 사실 승리만세님의 의견이 거의 맞는걸로 보입니다.
신해혁명의 쑨원도 조선을 다시 수복해야 할 속국으로 보고 있었으니 장개석도 그렇게 봤다고 보는게 그리 무리는 아닐듯 하네요.대만에 방문했을때 대만 현지 가이드도 비숫한 말 하더군요.
중국이 보는 속국은 한마디로 번국의 개념입니다.
몇년전 보안법이 통과되기 전에 중국과 홍콩, 마카오와 같은 개념이죠.
ㅉㄲ넘들은 기본적으로 그런 마인드가 심어져 있고 그렇게 교육 받고 있다고 보시면 무방합니다.
그래서 조선족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그리 말썽 부리고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이 결여되어 있는것이죠.
뷰티샵 21-11-01 14:51
   
대만은 이미 그간 한짓에서 돌아올수 없는 강을 건넛지... 쪽본자본에 물들어서 태극기 태우고 난리도 여러번했지... 섬짱* 인식강하지... tsmc 목표는 삼성타도지... 저것들은 맞아봐야됩니다.  쳐 맞아서 폐허가 된후 도와주면 됩니다.
션이 21-11-01 16:00
   
장재스가 어쨌건 카이로 회담때 한마디 한거갖고 전쟁을 도와준다는건 웃기는 일임
6.25때 도와줬으면 명분이나 서지만 도와주려했다 정도로는 의미가 없고 그 이후 한국과 갈라서기전후 양국관계는 그리 좋지않기도 하고 도와줄 의리가없음
그냥 전쟁물자를 판매는 가는함
뭐 지네 좋아하는 일본얘들에게 사겠지만
푸른마나 21-11-01 20:46
   
한마디로 대만과 중국의 관계는 우리나라와 북한같은 관계라는 거네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