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월남전에 한국이 참전한 계기는?
- 박통시절 경제 개발을 위해 해외 원조가 필요했는데 당시 최고 원조국이었던 미국은 개발원조를 원천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개발원조를 받기 위한 대안으로 미국이 참전한 전쟁에 동맹국 참전을 하겠다며 미국에 국빈으로 방문했을 때 박통이 먼저 미국의 캐네디 대통령에게 제안했습니다.
- 하지만 캐네디는 일차적으로 이 제안을 거절했고 추후에 전쟁이 확전되고 여러 상황들이 미국에게 불리해지자 참전을 허락 받아 참전하게 됩니다.
- 이에 따라 한국군 최초로 해외 전투부대를 파병하게 되는데 해병대의 청룡부대와 육군의 백마부대, 기갑부대인 맹호부대가 참전하게 됩니다. 그 외에 수송대와 해군도 참전하게 됩니다.
2. 한국군은 어떤 작전을 펼쳤나?
- 한국군의 참전은 사실 용병적인 성격이 컸습니다.
첫째로, 한국군의 봉급은 미국이 지불한다.
둘째로, 한국군의 장비를 현대화하는 것도 미국이 수행한다.
셋째로, M16이라는 최신 소총과 그외 장비를 본국에서도 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넷째로, 파병분 손실 국내 전력을 미국이 채운다 등이었습니다.
- 이런 조건으로 용병처럼 전쟁에 참여했지만 한국군은 미군의 지휘를 받지 않는 독립된 사령부를 두는 동맹국 자격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채명신 장군을 초대 월남 파병 한국군 사령관이 됩니다.
- 채명신 장군은 한국전쟁 당시 북의 빨치산 전술을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한 게릴라전의 귀재로 누구보다도 공산국들의 전략에 능통했던 지휘관이었습니다.
- 때문에 미국과는 다른 전략과 전술로 전투에 입했는데 미국이 적을 탐색하고 색출하여 박멸하는 작전을 수행했다면, 우리 군은 민간인과 적을 차단하고 구분하여 안전지대를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안전지대를 확대해 나가면서 적을 고립시키고 퇴치하는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 대표적인 한국군 전술이 '중대전술기지'였는데 중대 단위로 원형의 화력 진지를 구축하고 고정 진지를 바탕으로 거점을 방호하여 적을 차단하고 전선을 유지하며 안전지대를 확보하는 전술이었습니다.
- 미군은 이에 대해 대규모 단위의 분대 침투에 취약하다고 했지만 한국군은 제공권이 미군에게 확보된 상태에서 화력 지원이 용이한 화력 진지는 가장 효율적인 방호 거점이라고 파악했었던 것입니다.
- 실제로 해병대 1개 중대가 북베트남 정규군 1개 연대를 맞아 접전을 펼쳐 승리한 전과가 있는데 4시간 동안의 접전에서 300여 명의 적을 사살하고 아군 피해는 20명 안팍으로 적어 중대 전술기지의 효력을 여실히 보여준 전투였습니다.
- 이를 통해 미군도 한국군 전술을 참고하게 되었고, 호치민은 북맹에게 한국군과의 직접적 교전을 피하라는 전군 명령도 내리기도 합니다.
- 한국군은 이러한 거점 방어를 통해 확실한 전후방을 만들고, 후방에 대해서는 대민지원을 통해 현지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여 주민들 스스로 한국군을 믿고 베트콩 등의 저항 세력을 고발하거나 색출하는데 도움을 주도록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 한국군은 농번기에는 추수 및 파종 지원을, 주로 도로는 공병대를 투입해 확장이나 포장을 해 주었고, 의무대를 통해 민간 진료를 실시하고, 부대 내에 학교까지 설립해 주민을 다독이며 주민 전체를 한국군 편으로 돌리려 했습니다.
- 그 결과 한국군 주둔지에는 베트콩 등의 게릴라 출몰이 적었고, 연합군 중 가장 치안이 완벽한 지역으로 안정화 되었습니다.
3. 한국군의 전쟁 범죄와 양민학살
- 한국전쟁 때에도 미군이나 국군에 의한 양민 학살이 있었습니다. 이는 어떤 방식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전쟁 범죄가 확실합니다.
- 하지만 왜 한국군이나 미군이 양민을 죽여야 했는지에 대해 이해가 좀 필요합니다.
- 즉, 중국공산군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공산국가들은 게릴라 전술을 매우 잘 활용합니다. 그러나 정규군이 펼치는 게릴라 전술은 특작부대의 전술로 볼 수 있지만 이들 공산군은 지역 주민을 간첩 등으로 포섭하여 반정부 세력을 결집해 민간인들에게 총과 무기를 쥐어 주고 이들의 지속적인 후방 봉기를 조장하여 피해를 준다는 점입니다.
- 이렇기 때문에 적 세력과 민간인이 구분하기 힘들어지고 테러 세력의 본거지로 보이는 마을에서 누가 테러 세력이고 누가 민간인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자 이른바 작전의 편이를 위해 모든 마을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입니다.
- 적이 유도한 것이라도 이렇게 민간인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전쟁 범죄가 맞습니다.
- 한국군은 이러한 공산군의 전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채명신 사령관 역시 한국전쟁 당시 대 빨치산 부대를 창설하고 운용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민간인과 베트콩을 분리하는 전술에 능했습니다.
- 때문에 한국군 주둔지에는 민간인이 베트콩을 신고하는 체계까지 만들어져 이었습니다.
- 그럼에도 일부 전방 작전 지역에서 베트콩이 휴가 나 외박 나온 장병을 납치하거나 살해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 정찰 나간 대원들을 민간인으로 위장한 베트콩이 급습해 죽이는 경우도 많았으며, 부비트랩을 설치해 잔인하게 살해하고,
- 이렇게 살해한 장병의 시신을 훼손하여 효수 하는 등의 비윤리적이며 비인도적이고 전근대적인 전술을 자행하자 단위 소부대의 지위관 등에 의해 우발적으로 진행된 양민학살 사건이 발굴조사 되기도 했습니다.
- 그 외에도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적이 잔혹하다보니 우리 장병도 잔인해져 팀 단위 정찰 수색 임무를 맡은 장병들 사이에서 사살한 베트콩의 신체 일부를 잘라 수집하는 등의 전쟁 범죄 등도 암암리에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 그러나 애초에 우리의 전략 전술에서 대규모 양민 학살이 일어날 수 없는 환경이었고, 우리 군 스스로가 많은 대민지원을 통해 현지인과의 돈독한 관계 유지를 목적으로 했으므로 이에 반하는 행위는 지휘부 차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 일부 베트남 지역에서 한국군에 의한 양민 학살의 증거라며 '증오비'라는 것을 내세우는데 그 증오비라는 것이 현지 주민의 신고나 증언으로 몇 명만 말이 맞으면 국가에서 세워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 사실 남베트남군과 한국군은 외양상 구분이 어려워 자칫 남베트남군의 학살 행위를 우리가 덮어 썼을 수도 있고,
- 양민 학살을 증언하는 사람들의 말들이 대부분 억측이나 과장이라 그 신빙성도 얕으며 대부분의 증언자들이 베트남에서 전쟁 영웅의 후손이거나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베트남 정부가 공산식 선전선동의 목적으로 조직적으로 이를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 정황이 이럼에도 김대중 정부때부터 우리 나라는 한국군에 의한 잔혹 행위를 사과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보상을 추진해 왔습니다.
- 더불어 한국 정부와 베트남 정부가 합동으로 조사 본부를 세워 진상을 규명하고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자고 제안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 정부가 이를 거부했고, 우리 정부는 사실 여부 파악도 못했지만 계속적으로 사과와 지원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 개인적으로 볼 때 한국군에 의한 전쟁 범죄가 전혀 없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건 전쟁 범죄는 미화할 수도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베트남이 주장하는 규모와 내용으로 한국군이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는 부분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여러 정황과 역사적 사실들이 충분히 뒷받침하고 있다고 봅니다.
때문에 이 문제는 진상 규명을 통해 우리가 사과하거나 치뤄야 할 응당한 보상은 해야겠지만 아닌 것은 확실히 아니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베트남 당국이 이러한 과거사 청산 노력을 회피하고 있으니 우리가 나서서 더 큰 사과나 더 큰 보상은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베트남은 월남전을 스스로가 이긴 전쟁이라고 보고 있고, 미국과 치른 전쟁이라 여기고 있으며 한국군은 용병 정도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제 3 자 취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우리가 나선다는 것은 괜한 오지랖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간 차원에서 사과와 보상을 하는 것은 이해되나 이들도 전적인 사과와 보상에 치중하지 말고 제대로 된 역사 연구와 고증을 통해 정부가 못 하는 진상 규명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현시점에서 대부분의 민간 활동은 마치 우리가 죄인인 것처럼 표현하고 있고 현지인의 말만 그대로 믿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불쾌하고 어이가 없다고 느낍니다.
일부 깊이 없는 배경지식을 갖는 사람들이 이들의 말만 믿고 우리가 일제와 다를 게 없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도 참 어이가 없습니다.
4. '라이따이한'
- 베트남 현지에서 한국-베트남 혼혈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말입니다.
- 이들은 월남전 당시 월남에 일하러 갔던 노무자들이나 일부 간부급 군인들이 베트남 현지 여성과 '현지 처' 개념으로 함께 살다가 생겨난 아이들입니다.
- 한국군 철수 이후에도 노무자들은 남아 전쟁 특수를 노렸는데 북맹이 승리하자 강제로 귀국하면서 현지처와 아이를 버리고 떠난 형태가 되었습니다.
- 물론 실제로 책임을 안 지려고 떠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 이 문제에 대해 우리 정부차원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현지에서 차별과 멸시를 받은 것은 알겠으나 이들에 대해 한국 정부는 현지 교육 사업, 지원 사업 등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벌써 하고 있지 않나요?
- 더불어 많은 현지 진출 한국 기업과 민간 단체에서도 이들을 지원하고 있는데 벌써 이들의 나이도 중년이 넘고 있어 어떤 면에서는 잊혀진 이야기 지나가는 이야기일 뿐일 수 있습니다.
- 왜 이렇게 이야기 되나면 이는 일종의 개인 가족사라는 것입니다.
-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일제의 위안부와 이 일을 연계하여 한국군이 베트남 여성을 성적으로 폭행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일제는 정부와 군에서 여성들을 속여 강제로 성노예로 삼고 핍박했는데 이것을 연애로 함께 살던 베트남 여성의 경우와 같다고 본다는 것자체가 모순임에도 일부의 몰지각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상의 정리에서 요즘 인터넷 상에 떠도는 베트남전 한국군 만행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이 사실 규명이 안 된 것들이고 우리는 정부차원 진상 규명과 사과, 보상 노력을 진행하려고 했고, 또 하고 있음에도 우리 정부를 일제와 동일시하고 한국군을 일제의 만행군과 동을시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왜구들의 책동으로 밖에 안 보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제대로 알고 반박하고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