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승은 입은 2백여 여인들-미 한겨레 저널 김현철 칼럼 니스트
1960년대 후반까지 영화 두 편에 주연 여배우로 출연, 한국 영화의 톱스타로서 앞날이 촉망되던 미모의 영화배우(서울 명문대 출신)가 당시 결혼 1년 만에 첫아들까지 얻는 등 행복한 신혼생활로 동료 선후배 배우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 호사다마’라 했던가? 운명의 여신은 이 여인의 행복에 샘이 났던지 행복한 이 가정에 살살 바람을 불어 넣었다.
어느 날 난데없이 청와대의 채홍사(採紅使, 연산군 때 전국의 창기 중 미인을 뽑아 왕에게 바치던 벼슬아치) 한 분이 집에 나타난 것이다. “각하께서 모셔오라는 명령이십니다. 잠간 청와대에 다녀오시게 화장하시고 15분 이내로 떠나실 준비를 하세요“하는 게 아니가!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워낙 박정희대통령의 부름에 응했던 연예인들이 많았던 시절이라 ‘내게도 올 것이 왔구나!’하는 체념과 함께 사랑하는 남편과 갓난 아들의 얼굴이 눈앞에 스쳤다. 그러면서 “이제 갓난애의 엄마로서 신혼 유부녀입니다. 홀로 있는 연예인들이 많은데 저는 좀 빼 줄 수 없을까요?”하고 애원했다.
당시 많은 연예인들이 각하의 부르심을 영광스럽게 받아들였던 것과는 달리 이 여인은 현 남편과 만날 때 까지 연애 한 번 못 해 본 순진한 여성이었으니 각하의 부름은 상상도 못 했던 충격 바로 그것이었다. 허나 각하가 어떤 사람이라고 그런 말이 통했겠는가.
“잠간 다녀온다는데 웬 말이 그렇게 많아요?”하고 위압적인 자세를 취한 채홍사의 자세를 보고 더 반항했다가는 자신도 또 영화제작 스탭인 남편도 당장 영화계에서 매장될 것을 안 여인은 순순히 따라나설 밖에 없었다.
안내된 곳은 청와대가 아닌 그 옆의 다른 장소(후에 알고보니 궁정동 안가)로 그 다음 날 새벽까지 각하의 ‘성노예‘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눈이 퉁퉁 부어 집에 돌아오니 남편은 뜬 눈으로 밤을 샌 듯 샐쭉해진 얼굴에 눈물이 글썽, 역시 울고 있는 부인의 설명을 듣고 부드럽게 위로해 줬다. “옆집에서 검은 차가 당신을 태우고 갔다기에 다른 연예인들처럼 우리에게도 차례가 온 것을 알았다”며 부인을 부둥켜안고 한 없이 울었다.
그런데 1회용으로 끝나던 다른 연예인들과는 달리 이 여인에게는 1주에 한 번씩 계속 채홍사가 찾아 왔다.
한 달이 지났다. 그간 체념 속에서 살아 온 남편은 이날따라 울상을 하면서 “여보, 놀라지 마, 나 오늘 무시무시한 곳에 끌려갔다 왔어, 최단 시일 내에 당신과 헤어져야 두 사람 모두 심신이 편할 거라는 협박이야, 아무래도 우리 갈라서야 하나봐. 어쩌지? ”하며 울먹였다.
부부는 밤새도록 뿌리칠 수 없는 운명을 원망하며 울고 또 울었다. 둘이 모두 사는 길은 빠른 시일 내에 이혼하고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길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결론 밖에는 다른 길이 안 보였다.
그러고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남편은 바로 그 뒷날부터 자취를 감추었고 방안에서는 남편이 쓴 쪽지 한 장이 발견됐다. “여보,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이 밖에 기다리고 있어, 따라가야 해. 날 찾지 마. 그게 당신도 사는 길이야. 우리 아이를 잘 길러 줘. 먼 훗날 다시 만나, 사랑해 여보. ” 이게 마지막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각하는 한 밤 중에 여인과 몸을 섞고 나더니 내가 부자 미국인을 소개할테니 당장 결혼해서 미국으로 가 살라고 명령했다.
여인은 무슨 후환이 있을지 두려워 목을 앞뒤로 흔들었지만 내심은 각하의 속박에서 해방된다는 희망 섞인 기쁨도 자리했다.
신랑은 뜻밖에도 60이 넘은 미국계 할아버지로 신부될 여인의 아름다움에 마냥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노인은 결혼 후 6년 만에 많은 재산과 두 아들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다.
40여 년 전에 이토록 기구한 운명을 지녔던 할머니(현재 75)가 순간이나마 행복했던 신혼시절을 회상하며 현재 미국 하늘 아래 전 남편의 아들, 미국인 남편의 두 아들 등 세 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 후 전 남편과는 자신이 재혼한 탓도 있어서 완전히 소식이 두절 되었다고 한다.
최근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유과학문화기구)가 전 세계 독재자들의 ‘인권유린보고문’을 발행했다는 소식이다.
그 중에는 김정일이 미인을 납치 후 자기 종신 첩으로 썼던 사건도 포함돼 있단다.
필자가 궁금한 것은 박정희가 일회용품 내지 소모품으로 쓰던 2백여 명의 여성(김재규 변호인 이동일 변호사가 확인한 채홍사 한 명의 수첩에 기록된 것만 2백여 명임)에 관련된 내용은 왜 포함돼 있지 않느냐는 것, 이 점에서는 단연 박씨의 악행이 김정일의 추종을 불허했으니 말이다.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에게 사살 당하던 해, 그와 청와대에 같이 살았던 장녀 박근혜의 나이는 27세였다. 철이 난 후 아버지의 몹쓸 짓이 계속되었음을 말한다.
박근혜 역시 아버지처럼 2백여 피해자들이 한낱 소모품 정도로 보였겠지? 왜냐면 40 여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그 여자들을 한 분이라도 찾아가 아버지 대신 사죄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직접 가서 아버지의 잘 못을 사과한 것을 보면, 박근혜가 사과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박정희에게 불려갔던 모든 여성들이 영광스러워 기뻐하는 중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우리나라의 역대 어느 임금도 유부녀를 자기 노리개로 빼앗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천인이 공노할 일이기 때문이다.
어느 임금님보다도 잔인했던 독재자의 딸이 어찌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인지? 언제쯤이면 우리 국민의 의식 수준이 대통령 될 자와 되어서는 안 될 자를 가릴 수 있을 만큼 성장한다는 것인지 답답할 뿐이다.
박정희가 상습적으로 권력형 성폭력을 가하고 김씨의 남편을 협박하여 강제이혼을 시키고, 성노예로 취급하다가 35세 연상의 미국인에게 강제로 결혼을 시켜 미국으로 추방당한 사람이 천재무용가이자 영화배우인 김삼화(金三和)씨로 밝혀졌다.
김씨는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를 졸업했다. 6세부터 무용을 시작하여 조선무용연구소 한성준(韓成俊)에게 사사했으며, 성신여중 재학 당시 15세의 나이로 미국 대통령 특사 환영연회에서 공연을 하는 등 “천재 소녀 무용가”로 불리며 일찍부터 재능을 인정받았다.
1955년 김기영 감독의 <양산도>에서 주연을 맡으며 영화 데뷔를 했다.
출처 - http://www.amn.kr/sub_read.html?uid=9908
10·26사건을 수사한 합동수사본부 수사 제1국장 백동림은 박정희에 대한 김재규의 불만과 비판이 마침내 미움으로까지 증폭된 데는 박정희의 복잡한 여자 관계도 작용하였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재규는 박 대통령의 여자 관계가 지나칠 정도로 난잡하다고 여러차례 불평을 했답니다. 10·26사건을 수사하면서 대통령의 여자 관계를 수사했는데, 대상이 너무 광범위하여 중간에 그만두었습니다"7)
10·26사건의 현장이었던 궁정동 안가와 같은 대통령 전용 '관립요정' 모두 5곳이나 있었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박정희를 우한 '채홍사'역할을 맡았는데,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런 음탕한 술자리를 한 달에 10여 차례나 열었으며 궁정동 안가를 다녀간 연예인만 해도 1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경호실장 차지철도 '채홍사'역할을 맡았는데 그가 TV를 보다가 지명한 경우가 30%쯤 되었다고 한다.8) 그래서 "저기 걸린 달력에 나온 미녀 모두가 안가를 다녀갔다"9) 라는박선호의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박세길의 말마따나, 그건 '패륜의 극치'였다고 봐야하지 않을까?10)
"채홍사가 구해온 여자들은 먼저 경호실장 차지철이 심사했다. 차지철은 채홍사에게 '돈은 얼마든지 주더라도 좋은 여자를 구해 오라'고 투정을 부리곤 했다. 그래서 대통령의 채홍사란 중정 의전과장보다는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붙여져야할 이름이었다. 차지철의 심사에 이어 여인들은 술자리에 들어가기 전 경호실의 규칙에 따라 보안 서약과 함께 그 날의 접대법을 엄격하게 교육받았다.11)
박정희 자신이 여자들을 직접 지명하기도 했다. 그가 영화나 TV를 보다가 맘에 든 배우나 가수의 이름을 대며 '한번 보고 싶다'고 그러면 즉시 불려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수십 명의 일류 연예인들, '누구나 한번 듣기만 하면 입을 딱 벌릴 만한 TV드라마와 은막의 스타들'이 궁정동 안가의 밤 연회에 왔다는 것이다.12)
박정희의 가학적 섹스관
김교식은 "모든 증언들이 일치하듯 박정희의 여자 관계는 가학적이고 철저하게 자기만족 위주였다"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것은 심리학적으로 표현할 때 일종의 자아도취이며 불안으로부터의 탈출 심리에 준한 것이었다. … 박정희는 자신이 이순신이나 세종대왕 같은 위대한 역사의 인물로 남기를 원했다. 그러나 장기집권과 독재를 통해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수많은 비판과 '독재자'라는 오명이었다. 그 오명이 박정희에게는 일종의 열등의식으로 전화했고, 그 열등의식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여자에 대한 철저한 유린과 정복이 동원됐던 것이다. 그가 말년에 특히 젊은 여자를 선호했던 것도 노쇠현상에서 오는 열등감을 해소하려는 하나의 방편이었다."13)
또다른 이유가 있었을 법하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다녔고 그들의 군인 정신이 몸에 배어 있"어 섹스에 관한 한 자신에게나 부하에게나 매우 관대했"는데, 그건 박정희가 "사나이 세계에서 관능의 발산은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일본적인 섹스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14)
"거기에다가 일본 무협소설의 무사도라는 것이 가미되었다. 일본 무사들은 거침없이 여자들을 정복하고도 아무런 죄악감을 느끼지 않는다. 박정희도 그 무사관의 영향으로 마구잡이로 여러 여자들과 복잡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 따위를 전혀 느끼지않았을 것이다.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