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이야기로 게시판이 뜨거운 데 별로 시덥지 않은 주제를 가지고 와서 우선 죄송하단 말씀을 드립니다.
허나 자기네 역사도 제대로 모르고 사실과 정 반대되는 이야기를 진실인 것처럼 자랑스럽게 외치는 사람을 보니 안쓰러워서 글을 쓰지 않을 수가 없네요.
우선 글을 급히 막 쓰다보니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지적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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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puritan)이란 purify(정화)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기독교의 근본으로 돌아가자란 뜻으로 명명되었습니다.
신앙모델은 칼비니즘이었기 때문에 청빈을 강조하는 칼뱅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요. 특히 쟝 칼뱅이 돈이란 것은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고, 사람이 어떻게 버느냐와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고 했기 때문에 일상생활 뿐만 아니라 경제활동에 있어서도 청빈하고 정직한 활동을 미덕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원과 신앙기조로만 본다면 근본주의자나 순결주의자 정도로 해석되는 것이 합당하지만, 이런 삶의 철학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淸敎徒라고 불리게 되었죠.
청교도가 발생하게 된 배경은 영국 국교회, 즉 성공회와의 마찰이었습니다.
성공회는 헨리 8세가 자신의 결혼 문제 때문에 카톨릭에서 뛰쳐나오면서 만든 교파로서 형식상으로는 카톨릭과 매우 흡사하지만, 권력의 꼭대기에 교황 대신 영국왕이 위치한다는 것이 차이점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름 카톨릭에서 분리되어 나왔기 때문에 '신교'로 분류되었지만, 내용만 보면 신교보다는 구교에 가까운 교파였습지요.
하여튼 이런 애매한 포지션을 잡은 성공회는 카톨릭은 물론 영국 내 신교도들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었지요.
이 시기만 해도 청교도는 카톨릭으로부터의 분리, 정화를 의미했기 때문에 어떠한 특정 교파를 뜻하는 게 아니라 성공회와도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공회의 미덥지 않은 개혁과 정책들에 불만을 느낀 이들이 제임스 1세 시절에 국교 분리운동을 추진하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요, 금전관계에 부정적이지 않은 교리 덕분에 돈 좀 만지는 상인들 중에 청교도들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분리운동을 일으킬 수도 있었고, 뒤에서 말하겠지만 정치세력화도 할 수 있었던 거죠.
여튼 성공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청교도들(분리주의자들)은 종교의 자유가 있던 네덜란드나 미대륙으로 건너갔고, 유명한 메이플라워호도 이 때 등장합니다.
미대륙에 발을 붙인 청교도들은 근본주의자들에 걸맞게 '신정정치'를 펴게 되지요-_-
한편 영국 내에 남아있던 청교도들은 오랜 기간 잘 버티다가 제임스 1세의 아들인 찰스 1세 시절에 결국 청교도 혁명을 일으킵니다. 청교도 혁명이 말만 청교도 혁명이지 실상은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 지극히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터진 것이라는 걸 먼저 언급하겠습니다.
잉글랜드의 왕이자 스코틀랜드의 왕이기도 했던 찰스 1세는 성공회를 스코틀랜드에도 전파시키려고 했으나 이는 되려 반발만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이 종교적 갈등이 스코틀랜드와의 주교전쟁으로 이어지고, 주교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주교전쟁의 여파로 영국 의회와의 1차 영국내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전자가 종교적 이유라면 후자는 정치경제적 이유로...
1차 영국 내전이 여차저차해서 종식되지만, 내전을 통해 두각을 드러낸 올리버 크롬웰과 그를 견제하는 세력 사이에 또 갈등이 일어나서 2차 영국 내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 1차 영국 내전에서 힘을 잃었던 찰스 1세는 또 꼼수를 쓰고 권력을 되찾으려 하지만, 2차 내전은 올리버 크롬웰의 승리로 싱겁게 끝나고, 북산의 불안요소, 아니 영국의 불안요소인 찰스 1세는 처형당하게 되지요.
이 2차 영국 내전 혹은 내전의 종전과정을 청교도 혁명이라고 합니다. 왜냐? 올리버 크롬웰을 지지하던 세력이 청교도들이었고, 기타 의회파가 장로교였거든요. 성공회는 위에도 말했지만 1차 영국 전쟁에서 몰락한 왕당파.
이런 피비린내 나는 과정을 거치고 정권을 잡은 크롬웰은 공화정을 선포하고, 철저하게 청교도적인 정치를 실시합니다. 하지만 영국 내의 청교도는 올리버 크롬웰의 죽고 왕정이 다시 들어서자마자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지요. 근본주의적 신앙을 현실로 끌어오다보니 현실에 숨막힌 사람들이 너무나도 손쉽게 왕정을 받아들입니다.
반면 미국의 청교도들은 근본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한동안 고수하며 지금의 ISIS같은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이민족인 인디언에 대한 학살에 가까울 정도의 탄압과 '살렘 마녀 사냥'으로 알려진 종교재판, 제정분리를 요구했던 로저 윌리엄스의 강제 추방 등...
이런 극단적인 근본주의에 반하여 펜실베니아, 로드 아일랜드, 코네티컷 등에서 퓨리탄에 반하는 다른 교파들이 급성장하게 됩니다.
이런 청교도 사회는 늘어나는 이민자들과 근본주의에 염증을 느낀 배교자들에 의해 소수로 전락하고 그 결과 점차 근본주의적 성향을 잃게 되어, 미국독립운동이 일어날 당시에는 생활양식 정도만 남게 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미국에서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 절반 정도가 미국 성공회교도였고, 청교도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 회중교회(조합교회) 추종자들은 7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심지어는 건국의 아버지들 중에 반기독교적인 인물도, 이교도도 있었지요.-_- 청교도들이 그들의 근본주의 신앙을 고수했다면 있을 수도 없는 일.
또한 미국은 1788년에 헌법을 제정하고 1791에 1차 수정본을 내놓는데, 여기서 종교의 자유를 언급하며 종교에 관용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신정정치를 펼치며 이교도들에게 가혹한 탄압을 가했던 청교도들이 그들의 교리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면 전혀 나올 수 없는 결과로 퓨리탄의 근본주의가 정체성을 잃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미국 건국 전후해서 청교도 정신(puritanism)은 생활양식으로 남았고, 청빈, 근검, 검소 등의 좋은 이미지로 미국인에게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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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에 대한 책을 여러권 읽었다는 개신교 신자님아, 청교도 사회는 제정일치 사회가 아니었다고요?
미국의 건국은 성경을 근본으로 하는 신앙적 정신에서 이루어졌다고요?
미국의 건국정신인 청교도 정신이 생활양식이 아니라 성경적 정신이라고요?
교리에 이어 이젠 자기네 족보도 제대로 몰라서 이교도에게 배워야겠습니까?
글자 작은 어려운 서적은 추천하기 힘들고 나다나엘 호손의 '주홍글씨'나 재미 삼아 읽어보면 당시 청교도의 생활상을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꼭 읽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