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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7-23 22:34
개신교인을 위한 역사 교육 - 청교도 편
 글쓴이 : 띠로리
조회 : 1,801  

국정원 이야기로 게시판이 뜨거운 데 별로 시덥지 않은 주제를 가지고 와서 우선 죄송하단 말씀을 드립니다.
허나 자기네 역사도 제대로 모르고 사실과 정 반대되는 이야기를 진실인 것처럼 자랑스럽게 외치는 사람을 보니 안쓰러워서 글을 쓰지 않을 수가 없네요.
 
우선 글을 급히 막 쓰다보니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시면 지적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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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puritan)이란 purify(정화)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기독교의 근본으로 돌아가자란 뜻으로 명명되었습니다.
신앙모델은 칼비니즘이었기 때문에 청빈을 강조하는 칼뱅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요. 특히 쟝 칼뱅이 돈이란 것은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고, 사람이 어떻게 버느냐와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고 했기 때문에 일상생활 뿐만 아니라 경제활동에 있어서도 청빈하고 정직한 활동을 미덕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원과 신앙기조로만 본다면 근본주의자나 순결주의자 정도로 해석되는 것이 합당하지만, 이런 삶의 철학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淸敎徒라고 불리게 되었죠.
 
 
청교도가 발생하게 된 배경은 영국 국교회, 즉 성공회와의 마찰이었습니다.
성공회는 헨리 8세가 자신의 결혼 문제 때문에 카톨릭에서 뛰쳐나오면서 만든 교파로서 형식상으로는 카톨릭과 매우 흡사하지만, 권력의 꼭대기에 교황 대신 영국왕이 위치한다는 것이 차이점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름 카톨릭에서 분리되어 나왔기 때문에 '신교'로 분류되었지만, 내용만 보면 신교보다는 구교에 가까운 교파였습지요.
하여튼 이런 애매한 포지션을 잡은 성공회는 카톨릭은 물론 영국 내 신교도들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었지요.
 
이 시기만 해도 청교도는 카톨릭으로부터의 분리, 정화를 의미했기 때문에 어떠한 특정 교파를 뜻하는 게 아니라 성공회와도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공회의 미덥지 않은 개혁과 정책들에 불만을 느낀 이들이 제임스 1세 시절에 국교 분리운동을 추진하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요, 금전관계에 부정적이지 않은 교리 덕분에 돈 좀 만지는 상인들 중에 청교도들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분리운동을 일으킬 수도 있었고, 뒤에서 말하겠지만 정치세력화도 할 수 있었던 거죠.
 
 
여튼 성공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청교도들(분리주의자들)은 종교의 자유가 있던 네덜란드나 미대륙으로 건너갔고, 유명한 메이플라워호도 이 때 등장합니다.
미대륙에 발을 붙인 청교도들은 근본주의자들에 걸맞게 '신정정치'를 펴게 되지요-_-
 
 
한편 영국 내에 남아있던 청교도들은 오랜 기간 잘 버티다가 제임스 1세의 아들인 찰스 1세 시절에 결국 청교도 혁명을 일으킵니다. 청교도 혁명이 말만 청교도 혁명이지 실상은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 지극히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터진 것이라는 걸 먼저 언급하겠습니다.

잉글랜드의 왕이자 스코틀랜드의 왕이기도 했던 찰스 1세는 성공회를 스코틀랜드에도 전파시키려고 했으나 이는 되려 반발만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이 종교적 갈등이 스코틀랜드와의 주교전쟁으로 이어지고, 주교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주교전쟁의 여파로 영국 의회와의 1차 영국내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전자가 종교적 이유라면 후자는 정치경제적 이유로...

1차 영국 내전이 여차저차해서 종식되지만, 내전을 통해 두각을 드러낸 올리버 크롬웰과 그를 견제하는 세력 사이에 또 갈등이 일어나서 2차 영국 내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 1차 영국 내전에서 힘을 잃었던 찰스 1세는 또 꼼수를 쓰고 권력을 되찾으려 하지만, 2차 내전은 올리버 크롬웰의 승리로 싱겁게 끝나고, 북산의 불안요소, 아니 영국의 불안요소인 찰스 1세는 처형당하게 되지요.
 
이 2차 영국 내전 혹은 내전의 종전과정을 청교도 혁명이라고 합니다. 왜냐? 올리버 크롬웰을 지지하던 세력이 청교도들이었고, 기타 의회파가 장로교였거든요. 성공회는 위에도 말했지만 1차 영국 전쟁에서 몰락한 왕당파.
 
이런 피비린내 나는 과정을 거치고 정권을 잡은 크롬웰은 공화정을 선포하고, 철저하게 청교도적인 정치를 실시합니다. 하지만 영국 내의 청교도는 올리버 크롬웰의 죽고 왕정이 다시 들어서자마자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지요. 근본주의적 신앙을 현실로 끌어오다보니 현실에 숨막힌 사람들이 너무나도 손쉽게 왕정을 받아들입니다.
 
 
반면 미국의 청교도들은 근본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한동안 고수하며 지금의 ISIS같은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이민족인 인디언에 대한 학살에 가까울 정도의 탄압과 '살렘 마녀 사냥'으로 알려진 종교재판, 제정분리를 요구했던 로저 윌리엄스의 강제 추방 등...
 
이런 극단적인 근본주의에 반하여 펜실베니아, 로드 아일랜드, 코네티컷 등에서 퓨리탄에 반하는 다른 교파들이 급성장하게 됩니다.

이런 청교도 사회는 늘어나는 이민자들과 근본주의에 염증을 느낀 배교자들에 의해 소수로 전락하고 그 결과 점차 근본주의적 성향을 잃게 되어, 미국독립운동이 일어날 당시에는 생활양식 정도만 남게 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미국에서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 절반 정도가 미국 성공회교도였고, 청교도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 회중교회(조합교회) 추종자들은 7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심지어는 건국의 아버지들 중에 반기독교적인 인물도, 이교도도 있었지요.-_- 청교도들이 그들의 근본주의 신앙을 고수했다면 있을 수도 없는 일.

또한 미국은 1788년에 헌법을 제정하고 1791에 1차 수정본을 내놓는데, 여기서 종교의 자유를 언급하며 종교에 관용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신정정치를 펼치며 이교도들에게 가혹한 탄압을 가했던 청교도들이 그들의 교리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면 전혀 나올 수 없는 결과로 퓨리탄의 근본주의가 정체성을 잃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미국 건국 전후해서 청교도 정신(puritanism)은 생활양식으로 남았고, 청빈, 근검, 검소 등의 좋은 이미지로 미국인에게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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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에 대한 책을 여러권 읽었다는 개신교 신자님아, 청교도 사회는 제정일치 사회가 아니었다고요?
미국의 건국은 성경을 근본으로 하는 신앙적 정신에서 이루어졌다고요?
미국의 건국정신인 청교도 정신이 생활양식이 아니라 성경적 정신이라고요? 
 
교리에 이어 이젠 자기네 족보도 제대로 몰라서 이교도에게 배워야겠습니까?
 
글자 작은 어려운 서적은 추천하기 힘들고 나다나엘 호손의 '주홍글씨'나 재미 삼아 읽어보면 당시 청교도의 생활상을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꼭 읽어 보세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꿈에서 깨어난 어지러운 마음, 아무도 없는 그 길에 홀로 서서 바라봐, 마음 속 깊은 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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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별곡 15-07-23 23:05
   
그것은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해야지요..영국 청교도들이 정권을 잡은 것은 애초에 통치나 군림 자체가 목적이 아니였습니다. 영국 국교회의 특히 찰스왕이 장로교 신도가 다수인 스코틀랜드에 탄압하고 또한 국교회를 강요하는 전제정치를 노골적으로 하려했기 때문이죠. 국교회를 통한 전제정치가 이루어지면 청교도 비롯한 프로테스탄트들이 탄압을 받고 심지어 대학살극이 벌어질수 있으니까요..생존을 위한 선택이라고 보여집니다. 구약과 같은 제정일치 사회 구현이 그 목적이 아니였습니다. 신앙관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그 당시 시대상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한 부득이한 선택으로 생각할수 있습니다.

영국 국교회의 교리와 형식은 로마카톨릭과 크게 차이가 없어요..당연히 프로테스탄트들의 반발을 살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신앙의 자유를 위해 미국에 건너간 청교도들이 신앙을 바탕으로 건국의 틀은 다진건 사실입니다.. 18세기 미국의 정착한 정착민 중 다수가 기독교인이였으니까요.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에서 인디언 학살은 참회해야할 역사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띠로리 15-07-23 23:26
   
찰스 1세는 1차 영국내전  이후엔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였습니다. 생활도 유폐되다시피 했고, 군사동원권도 다 의회에 빼앗깁니다. 의회파는 장로교와 청교도들이 대다수. 그런데 어떻게 전제정치를 하고, 어떻게 탄압을 할까요?
청교도 혁명은 전혀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에서 일어난 겁니다.

또한 청교도를 비롯한 프로테스탄트들을 탄압했다는데, 무슨 탄압이 있었지요?
이미 알고 있는게 한두개 있는데, 너무 소소한 것들이어서 탄압이라고 하긴 뭣한 것들 밖에 아는 게 없군요.
참고로 영국에선 '성 바르톨로메오의 밤'과 같은 학살 사건은 벌어진 적도 없습니다.
과연 생존을 걸만큼 대단한 탄압이 뭐가 있었는지 한번 들어봅시다.

목적을 떠나서 제정일치 사회를 이룩했다는 건 역사적 사실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라고 한다면 신앙을 위협했던 요소가 있었단 거네요? 그 요소는 뭔가요?
그리고 덤으로 제정일치 사회를 이룩한 목적이 뭐였는지도 듣고 싶군요.

마지막 줄에 대한 답변은 본문글에 있습니다. 참고로 메이플라워호가 미대륙에 도착한 게 1620년, 독립은 1783년입니다. 160년동안 청교도의 신앙이 변하지 않고 유지되었다면 그거야 말로 역사에 남을 사건이네요.
          
청춘별곡 15-07-23 23:29
   
종교적 변수와 정치적 변수가 모두 작용한거죠..의회에 모든 것을 빼앗긴건 애초에 전제정치를 하려고 했던 찰스가 자처한거죠..그에 대한 의회의 반발로 권력을 잃고 최종적으로 사형을 당하게 된 겁니다. 장로교가 다수인 스코틀랜드를 군대를 동원해 집압하고 나면 그 칼끝이 어디로 갈까요?! 당연히 영국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아닙니까?! 그것을 알면서도 의회가 앉아서 당하고 있어야 하나요?!
               
띠로리 15-07-23 23:32
   
그리고 님 말은 청교도들이 카톨릭과 같은 재정일치 국가를 이뤘어야 했다..그게 성경적이라는 겁니까?!
 재정일치 국가를 만드는 것이 성경적이 아니라니까요?! 구약이 이스라엘이 제정일치 국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말그대로 선택된 민족이였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대상은 전인류인데..이미 중세로마카톨릭의 사례를 통해 그 폐해가 더 크다는 역사적인 교훈이 있죠...반로마카톨릭을 지향하는 청교도들이 그 폐해를 계속 답습하겠습니까?!

아래에 직접 쓰신 글입니다.
'청교도들이 카톨릭과 같은 재정일치 국가를 이뤘어야 했다..'
이 문장에서 청교도는 제정일치를 하지 않았다고 파악이 되네요.
바로 아랫 문단에서 말하는 폐해도 제정일치로 해석이 되고요.

여기서도 말이 바뀝니까?
                    
청춘별곡 15-07-23 23:33
   
재정일치 국가를 이루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였습니다. 그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생존을 위한 선택이지..
                         
띠로리 15-07-23 23:36
   
'청교도들이 카톨릭과 같은 재정일치 국가를 이뤘어야 했다..' 그게 성경적이라는 겁니까?!
-> '청교도들이 카톨릭과 같은 재정일치 국가를 이뤘어야 했다..' 그건 성경적인 게 아닙니다.
-> 청교도들은 카톨릭과 같은 제정일치 국가를 이루지 않았다.

이렇게 해석이 되는데요.
이뤘어야 했다.. 라는 말도 '이뤘어야 했지만 하지 않았다'는 말의 축약형이고...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제정일치 사회를 구현했다고요.
생존이라면 미대륙에서 청교도들의 생존을 위협하던 게 뭐가 있었나요?



해피투게더 봐야 하는데 님 때문에 못 보고 있습니다. 두루뭉술하게 쓰지 말고, 객관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띠로리 15-07-23 23:34
   
아니.ㅋㅋㅋㅋㅋ
권력을 잃은 건 1차 영국내전이고, 왜 그 땐 살려두고, 2차 영국내전 이후에 사형당하는데 뭔 전제정치가 나옵니까.ㅋㅋㅋㅋ

발제글을 쓰다가 너무 길어져서 당시 상황을 싹 다 생략하고 핵심적인 것만 남겨뒀는데, 찰스 1세 당시 사건들 싹 다 역사적 순서에 따라서 적어줘요?
                    
청춘별곡 15-07-23 23:39
   
2차 내전이 원인이 스코틀랜드와 왕당파 연합군(스코틀랜드와 찰스 복권을 위한 왕당파의 밀약)에게 있으니까요..

제가 앞에서 말했듯..인디언 학살은 참회해야할 역사라고 말했습니다..
                         
띠로리 15-07-23 23:49
   
아 뒷골이야...

찰스는 12월 26일 스코틀랜드와 밀약을 맺고 마지막으로 이들의 잉글랜드 침략에 기대를 건다. 한편 남부와 서부, 켄트와 에식스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주로 의회에 반기를 든 것이지 국왕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163페이지

동맹이었던 스코틀랜드가 적으로 돌변하면서 1648년 7월에 2차 영국내전이 발발했다. 남부 웨일스에서 존 포이어가 의회에 반기를 든 것으로 시작해, 켄트, 콘월, 웨일스 북주, 링컨셔 등 지역에 잔존한 왕당파들이 차례로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2차 내전은 순전히 스코틀랜드의 병력에 의존하고 있었고 1차 내전만큼 왕당파에 대한 지지가 나타나지 않았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57&contents_id=11803&series_id=25

찰스 1세는 이미 잉글랜드 내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등에 업은 건 장로교가 태반인 스코틀랜드 군대인데, 찰스가 뭘 기반으로 종교를 탄압할 수 있죠?
심지어 찰스가 스코틀랜드에게 내건 조건이 무조건적인 종교의 자유를 인정할테니 군대를 내달라는 거였습니다.

여기에 어디서 전제정치가 등장할 수 있지요?
               
띠로리 15-07-23 23:55
   
신앙관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그 당시 시대상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한 부득이한 선택으로 생각할수 있습니다.
-> 신앙을 지키기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라고 한다면 신앙을 위협했던 요소가 있었단 거네요? 그 요소는 뭔가요?

다른 것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얼른 듣고 싶군요.
메사추세츠에 이주한 청교도들의 신앙을 위협했던 요소가 무엇인지.
                    
청춘별곡 15-07-24 01:45
   
찰스 1세가 2차 내란의 모종의 합의을 하고 밀약을 한 것 사실이잖아요..2차 내란이 직접적인 관련자이고 전범이 찰스인데...2차 내란의 성공의 목적 중에 하나가 찰스의 복권이고요.

찰스가 성공적으로 복권되면 그 다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그것에 대한 책임을 묵과해야 합니까?! 그 동안 서슬퍼런 칼날을 갈고 있던 찰스가 복권을 하게 되면 의회와 찰스를 반대했던 프로테스탄트와 반대자들을 가만히 놔두겠습니까?! 엄청난 피의 숙청이 일어나죠..

제가 말한 건 영국의 당시 시대상을 말한 겁니다만?!
                         
띠로리 15-07-24 07:35
   
신정정치는 미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 이야기인데 찰스1세가 왜 나오나요?
발제글에도 신정정치는 미대륙에서의 사건만 기록하였고, 댓글 말미에 메사추세츠라고 분명히 적혀있죠?
청교도들의 미대륙 이주는 제임스 1세 시절로 시기적으로도 안 맞습니다.

그리고 영국 내부를 보더라도 찰스1세가 복권하더라도 국내에 아무런  정치적 기반이 없는데 대대적으로 숙청을 할 거라고요?

게다가 등에 업은 스코틀랜드 군대는 같은 신교인 장로교이고, 그 스코틀랜드 군대가 떠나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찰스 1세가?
                         
청춘별곡 15-07-24 12:36
   
답답한 분이시네요. 님이 올린 글 피드백 하잖아요..

당시 스코틀랜드와 밀약한 것이 찰스와 왕당파 잔당이고..그들의 내전이 승리로 돌아가면 영국의 권력은 찰스와 왕당파에게 돌아가고 당연히 반대자들은 다 숙청당할게 뻔하지 않습니까?! 스코틀랜드와 왕당파 연합군이 전쟁에 패배한 의회를 가만히 둘 것 같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애초에 밀약을 조건이 찰스의 복권이고 단순히 찰스가 스스로  허수아비가 왕이 되려고 그런 무리수를 두었겠습니까?! 님말대로 이겨도 얻을게 없고 지면 자신의 생명도 부지하기 어려운데 왜 미친짓을 하죠?!
찰스의 복권은 의회파에게 있던 권력을 찰스와 왕당파에게 돌려주는 것인데....찰스(왕당파)와 스코틀랜드의 밀약은 권력을 되찾는게 목적입니다..

그리고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학살도 순수한 종교적인 의도가 아닌 정치적 목적도 크죠..아메리카의 원주민이 인디언들인데 수많은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영토에 들어오는데 호락호락 놔둘까요?! 비교적 순박한 인디언들도 있겠지만..보통 인디언들은 직접 사냥을 하는 호전적인 전사들인데...그래서 인디언 학살이 잘 한 짓이라는게 아니라..서로 공존을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죠. 그리고 인디언들이 모두 학살로 죽은게 아닙니다. 전염병으로 죽은 인디언들이 더 많아요..청교도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남부 아메리카 대륙의 16세기 에스파냐 정착지에서 발원된 천연두와 열병이 이에 대한 항원이 전혀없는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에게 치명적인 병원이였고 학살보다도 전염병으로 죽은 인디언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죠..콜럼버스 신대륙 발견당시 500만명으로 추산되는 멕시코 국경지대의 인디언들이 1620년에는 25만명으로 줄었습니다. 멕시코 국경지대에 한해서만요..

제가 인디언 학살을 정당화하거나 축소하려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봐야죠..인디언 학살은 잘못된 것이지만..인디언들 죽음에는 전염병이 더 크게 작용한 겁니다.
                         
띠로리 15-07-24 14:01
   
신정정치는 미대륙 이야기인데 계속 영국 내부 이야기를 하는 게 말돌리기로 밖에 안보입니다.
그래도 페이스에 맞춰서 영국 이야기부터 하죠.

권력의 기본은 군사력입니다.
2차 내전 당시 왕당파는 변변한 병력도 없이 거진 스코틀랜드의 군사력에 의존했습니다.

그런 마당에 숙청을 해요?

1차 내전 이후 찰스 1세의 상황은 권리청원에 의해 조세권도 빼앗기고, 1차 내전의 결과로 징집권도 빼앗기고, 신병도 유폐되다시피 한 상황입니다.

민심은 이미 두 차례의 전쟁으로 돌아섰고,  특히 수도인 런던 사람들은  옥스포드에 주둔하며 런던에 칼날을 겨누고 있던 찰스1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불어 유럽 특유의 동군연합 때문에 같이 찰스 1세의 지배를 받긴 했지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서로 다른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 스코틀랜드 군대를 끌어들이면 평판은 더 안 좋아지겠죠.
아니 이미 그 전에 아일랜드의 군대를 끌어들이려 했던 전력 때문에 평판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숙청을 한다고요?

찰스 1세가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기존의 국왕 대접만 받아도 감지덕지였던 상황이었습니다.

모든 권력을 빼앗기고 몸도 유폐되어있던 처참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왜 얻을 게 거의 없는 전쟁을 재차 일으키려했는지 추측을 해보자면, 그의 집권기 모습과 유언이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집권기에 정치를 독단적으로 처리하고 하였고, 이에 반대하는 의회를 수시로 해산하였으며, 죽기 전에는 '내가 죄를 저질렀다고 하여도 난 그대들의 왕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죽습니다.
적통에 의해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흔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그 자체로 당연하다.'라고 많이들 생각합니다.
찰스 1세도 단지 자기가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로 가고 싶어서 전쟁을 일으킨 게 아닐까 추측을 합니다. 스코틀랜드의 군사를 빌릴 때 내건 약속도 단 하나, 왕위 회복이었고요.


그리고 미국의 청교도들이 인디언을 두려워해요?
청교도들이 먹을 게 없어서 옥수수와 감자 등 음식물과 옷가지들을 지속적으로 제공해줬던 게 누구지요? 바로 인디언들입니다.
이에 감사하는 의미로 1년 후 추수기에 인디언들을 초대하고 축제를 엽니다. 이게 추수감사절의 기원이고요.

하지만 이 일이 있고 1년이 지난 1622년에 청교도들은 또다시 인디언의 추장들을 만찬에 초대하지만, 만찬회 자리에서 그들을 암살해버리고, 머리를 효수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인디언들은 전염병으로 인구수가 줄어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잔인한 행위에 제대로 된 보복도 못하고 집과 땅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청교도들이 인디언들의 집과 땅을 점령한 사실은 뽀나스!

이걸로 끝이 아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인디언 학살을 시작합니다. 인디언에게 공격받기는 커녕 되려 공격적으로 수탈을 했어요.

보스턴에 거주 하고 있던 청교도들은 광활한 농토를 차지하려는 욕심으로 월등한 무력을 앞세워 인디언들을 내몰았고, 뉴잉글랜드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피쿼트 부족 도 모두 살육당했다.
청교도 목사들의 지시를 받은 청교도들은 1637년 피쿼트족에 대하여 날조된 살인혐의를 씌워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그리고 일부 살아남은 인디언들을 노예 상인들에게 팔아버리고 거의 대부분의 뉴잉글랜드 인디언 지역을 차지 하였다.
- 전쟁과 학살, 부끄러운 미국, 41페이지
 
1637년, 청교도들은 대담하게도 민병대를 조직하여 원주민 촌을 습격하여 500명을 죽이고 살아남은 부녀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잡아 서인도에 팔아 버렸다.
그리고 청교도들은 "우리는 오늘 600명의 이교도들을 지옥으로 보냈다."고 하며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다.
이 사건은 청교도들이 북아메리카에서 '기독교 제국주의'의 본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최초의 대표적인 대학살이며, 침략전이라고 할 수 있다.
- 기독교 죄악사 하, 160~161페이지

그런데 그 인디언들이 두려워서 신앙을 지키기 위한부득이한 선택으로 신정정치를 했다고요?
                         
청춘별곡 15-07-24 14:18
   
스코틀랜드와 찰스의 왕정파가 승리하게 되면 반대 의회파들이 어떻게 될거 생각하십니까?! 왕정파가 세력을 잡게 되는데요. 바로 숙청되지 않더라도 반대파는 전쟁의 패배로 군권을 상실케되고 시간이 지나면 더많은 권리를 상실하겠죠. 그리고  찰스와 왕정파는 그동안 상실했던 지지기반을 회복하려 할테고 어느정도 권력기반이 정비하게 되면  다시 반대파을 숙청할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님말대로 여러 실정 만발하고 의회를 무시하고 전횡을 일삼으려 했던 찰스의 죽음은 죽을 만해서 죽게 된거 아닙니까?! 죽을만 해서 죽게된 것을 왜 문제를 삼으시는지요?!

그게 땅을 점령하기 위한 목적이지 신정정치 실현을 위한 것은 아니였지요.. 뭐 개인적으로 인디언들에게 개종을 강요한 사례도 있었겠지만..공식적인 입장은 아니였다는 말입니다..어쨌든 학살은 참회할 역사죠..그것을 신정 정치라고 볼수 없죠..그저 다른 민족이나 나라가 다른 민족의 땅의 빼앗는 이런 일반적인 영토확장..땅따먹기죠..
                         
띠로리 15-07-24 14:47
   
동양적 사고방식으로 서양을 이해하려고 하시네...

서양은 봉건제에서 기반한 통치시스템으로 국민이 왕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지 않습니다.
동양에서 공후백자남의 작위는 단순히 명예직으로 작위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서양은 자기 영지가 있어야 합니다. 영지 내에서의 징집권을 비롯한 모든 권리는 영주에게 있는 것이고, 왕은 단지 영지를 소유한 영주들을 다스리는 겁니다.

고릿적의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도, 마리아 테레지아, 프리드리히 2세, 구스타프 1세, 발렌슈타인 등 유명인들이 대거 등장했고, 무기 체계도 신식무기로 무장한 이후의 7년 전쟁도 혈연적 정통성에 의한 영지 싸움이었습니다.
위에 언급한 동군연합도 이런 사고방식이 바탕이 되야 성립하는 거고요.

군권을 몰수당해요? 의회파와 그 식솔들을 다 처형시키고 한 집안의 씨를 말리지 않으면 그럴 일은 없습니다. 갓난애기 한 명만 남아도 영지는 온전히 상속됩니다.
1차 내전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던 왕당파가 2차 내전에서 이름이나마 내걸고 참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시스템 덕분이고요.
유럽에서 용병을 많이 고용했던 이유도 영지에서 징집을 할 수 없던 사람들이 군사력을 기댈 수 있는 방법이 용병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소영주 뿐만 아니라 프랑스나 영국 등의 왕들도 용병을 산 적이 있습니다. 영주들이 군사를 모집해오지 않으면, 왕으로선 강제징집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게 땅을 점령하기 위한 목적이지 신정정치 실현을 위한 것은 아니였지요..
-> 위에 적었던 말 복붙합니다.
"목적을 떠나서 제정일치 사회를 이룩했다는 건 역사적 사실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라고 한다면 신앙을 위협했던 요소가 있었단 거네요?"

목적 유무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청춘별곡님은 이전에 신정정치를 한 적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그 말이 틀렸다며 신정정치를 했다는 사실을 언급한 겁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신정정치를 할 수 밖에 없는 위협이 있었다면서요? 그 위협이 뭔가요?
한발 양보해서 신정정치 유무를 따져서 몰아붙이지 않고, 그쪽의 논리에 들어가서 위협요소를 묻는데 왜 객관적인 답변은 안하고 자꾸 목적 타령합니까?

진짜 간단하게 묻습니다.
1. 미국의 청교도들이 신정정치를 했다/안했다.
2. 미국의 청교도들이 신정정치를 했고, 그것이 누구 말대로 신앙에 대한 위협 때문이었다면, 그 위협은 무엇이었는가?
                         
청춘별곡 15-07-24 16:54
   
그 당시의 특수한 시대상황을 간과하시면 안되죠...종교개혁 시대 이후에는 주로 카톨릭 세력에 의하여 프로테스탄트와 반카톨릭 세력에 대한 학살이 난무하던 시대였습니다. 비록 반카톨릭 연대에 영국 성공회에 속했지만 형식과 교리는 카톨릭과 큰 차이가 없었으며 국교회를 통해 프로테스탄트들을 지속적으로 억압하려 했죠.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 때문에 상대에게 빈틈을 보이면 엄청난 대학살을 당하는건 특별한 일이 아니였습니다. 이후에 피의 여왕 메리 시대에 벌어진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한 대학살극을 보시면 당시의 시대상이 그리 녹록치 않았음을 알수 있죠..

청교도들이 영국에서건 미국에서건 공식적으로 신정정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고수하고 생존을 위한 방면으로 정치를 하게 된 것이지..신정정치를 구현해서 모든 시민들을 개종하려는 것이 아니였다는 말씀입니다. 신정청치는 로마카톨릭과 영국 국교회처럼 국가가 공식적으로 개인의 신앙까지 간섭하고 개종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이뤄지죠..청교도들이 영국에서 한동안 정권을 잡았지만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영국에서 청교도들이 정치를 한 것은 카톨릭세력에 대항해서 자신들의 신앙를 수호하고 고수하기 위한 방편이고 성공회 세력과 어느 시기까지 뜻을 같이했으나 결국 틀어진 것이죠...크롬웰에 의한 통치기간을 신정 정치라고 끝까지 우기신다면...온건한 신정 정치라는 정도로 타협할 여지는 있습니다만...로마카톨릭과 같은 전제적인 신정 정치는 절대 아니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로마카톨릭과 같은 신정정치를 구현하지 않았습니다. 인디안 탄압과 학살은 영토 확보라는 정치적인 동기가 컸고요..

그리고 반기련이나 안티들이 모함하거나 과장하는 것처럼 인디언들이 죽음의 주된 요인은 학살이 아니였습니다.. 물론 학살도 한 요인이긴 했으나 인디언들 다수가 죽게된 주된 요인은 전염병입니다.
                         
띠로리 15-07-25 10:38
   
이 글을 마지막으로 이 발제글에 대해서는 더는 적지 않겠습니다.



그 당시의 특수한 시대상황을 간과하시면 안되죠...종교개혁 시대 이후에는 주로 카톨릭 세력에 의하여 프로테스탄트와 반카톨릭 세력에 대한 학살이 난무하던 시대였습니다. 비록 반카톨릭 연대에 영국 성공회에 속했지만 형식과 교리는 카톨릭과 큰 차이가 없었으며 국교회를 통해 프로테스탄트들을 지속적으로 억압하려 했죠.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 때문에 상대에게 빈틈을 보이면 엄청난 대학살을 당하는건 특별한 일이 아니였습니다. 이후에 피의 여왕 메리 시대에 벌어진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한 대학살극을 보시면 당시의 시대상이 그리 녹록치 않았음을 알수 있죠..

-> 블러디 메리는 열렬한 카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성공회를 지지한 엘리자베스1세, 제임스 1세, 찰스 1세와 같이 볼 수 없습니다. 이 셋 중에 가장 종교적으로 완고했던 제임스 1세 시절만 하더라도 청교도들 천명이 모여서 천인 탄원서(Millenary Petition)를 왕에게 제출할 정도로 수면 위에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제임스 1세가 탄원서의 내용을 대부분 거절하긴 했지만, 여기서 KJV 성경이 나왔죠.
그리고 당시 영국에서 청교도들에게 내려진 최고의 처벌은 '청교도식 예배 예식을 성공회식으로 바꾸라는 것'와 '탄원 금지'였습니다. 종교적 이유로 청교도인을 한 명이라도 처형한 기록은 본 적이 없어요. 비숍전쟁으로까지 사태가 커진 스코틀랜드 장로교와의 갈등도 다른 사건이 아니라 '성공회 기도문'을 예배에 적용하라는 명령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세력도 '기도문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해 빡친 찰스'가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침해당했다고 생각한 장로교도'들이었고요.
맨 처음 댓글에 단 '이미 알고 있는게 한두개 있는데, 너무 소소한 것들'이라고 한 부분들이 바로 이 내용입니다.
영국에서 종교핍박이 없던 건 아닙니다. 근데 그 대상은 프로테스탄트들로부터도 이단으로 몰렸던 재세례파였고, 일반적인 프로테스탄트의 목숨을 앗아가는 처벌은 들은 바가 없네요.

당시 영국 내부 상황이 이런데, 영국인들이 유럽대륙국가들의 예를 보면서 불안해했을 거라고요?
(참고로 시기적으로도 제임스 1세의 집권기는 신교도들을 박해하던 블러디 메리가 죽고, 50년이 지난 시점이고, 블러디 메리의 집권기는 5년 밖에 안됨.)
자기 이름을 직접 거명하며 왕에게 종교개혁을 주장하던 영국의 쳥교도들이요?




청교도들이 영국에서건 미국에서건 공식적으로 신정정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 신정정치를 안했다고요?
본문에도 적어놨죠? 로저 윌리엄스가 제정분리를 요구하다가 추방당했다고.
제정분리를 요구했다는 것은 이미 그 이전에 제정이 일치되어있었다는 말입니다.

아래는 로저윌리엄스로 검색만 해도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신정정치(神政政治)마저 부정하는 극단적인 민주주의 사상으로 인하여 매사추세츠주에서 추방당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로저 윌리엄스 [Roger Williams] (두산백과)

로저 윌리엄스(영어: Roger Williams,1603년?-1683년 1월과 3월 사이)는 개신교 신학자이다. 성공회 사제였으나 침례교회로 교파를 옮겼다. 종교의 자유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한 로저의 사상은 미국 민주주의 역사발전에 기여했으나, 자신의 종교적 신념때문에 청교도 공동체에서 추방되었다.

그리고 살렘 마녀 재판은 뭐죠? 종교와 상관없이 정치에서 사람을 마녀로 몰아 사형에 처하고 하나요?




*제정일치와 신정정치가 단어가 다르다고 할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해 신정정치에 대한 정의도 가져옵니다.

신의 대리자가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정치 형태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정 정치 [神政政治]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2002. 9. 25., (주)신원문화사)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신(神)에 의한 정치’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직업적 종교인에 의한 정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권정치 [theocracy, 神權政治] (21세기 정치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지배자가 신 또는 신의 대리인으로 간주되고, 절대적인 권력으로써 인민을 지배하는 정치체제.
[네이버 지식백과] 신권정치 [theocracy, 神權政治] (두산백과)
개짖는소리 15-07-23 23:59
   
종교는 환상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과 의사 ,철학자, 정신분석학파의 창시자)
     
개짖는소리 15-07-24 00:03
   
종교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질병이다.

-버트란드 러셀 (철학자. 수학자, 노벨문학상 수상자)
          
개짖는소리 15-07-24 00:04
   
올바르게 읽는다면 성경은 무신론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된다.

-아이작 아시모프 (과학자, 집필가)
     
띠로리 15-07-24 00:04
   
지금의 경우엔 미국을 건국한 위인들의 명언이 더 유용하지 않을까요?

[토머스 제퍼슨]
기독교는 여태껏 인간이 갈고닦은 가장 비뚤어진 체제

[벤저민 프랭클린]
등대가 교회보다 더 유용하다.
          
개짖는소리 15-07-24 00:05
   
기독교의 신학연구는 무의미에 대한 연구이다.

-토마스 페인 (미국혁명의 영웅)
최강대한 15-07-24 02:41
   
역사교육 필요한애들 많네. 일베충 니들이 암만 짖어대도 김구선생, 윤봉길의사를 비롯한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80프로 이상이 개신교인이었단다.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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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1
     
개짖는소리 15-07-24 03:31
   
역사교욱같은 소리하고있으시네요
김구선생 ?윤봉길의사 천주교였습니다 일제식민지시대때 천주교의 행태좀알아보시고요
그리고 김구선생은 거의 모든 종교를 섭렵햇죠 모르시면 인터넷에서 5분만투자해서 살펴보시고 타자두들기고 쓰세요
그리고 독립운동강의 80퍼센트가 개신교라는 말은 어디서본거며 어디서 들은겁니까?
     
띠로리 15-07-24 07:39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개신교인, 그리고 그 중 4명은 친일파로 변절.
독립운동가의 80%는 어디서 나오는 말인지...

만주와 연해주의 무장독립운동은 거진 대종교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개신교 80%는 어디서 나온 걸까...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조선장로호는 알까?
개신교 내에서 자랑스레 언급하는 신사참배 거부운동 당시 처형되거나 옥사한 사람은 50여명(체포된 사람은 2000여명)이고, 폐쇄된 교회는 200여채 밖에 안됐다는 건 알고 있으려나?

결정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종교가 이 글과 무슨 연관성이 있어서 여기에 언급한 걸까...
또한 내가 어딜봐서 일베충이란 거지? 개신교 애들은 거짓말하지말라는 십계명은 안 지켜도 되는구나.
          
청춘별곡 15-07-24 13:00
   
길선주 : 한국 최초의 목사. 3.1운동 때 서울에 늦게 도착. 총감부에 자수하였으나 무죄로 풀려남. 독립유공자에서 제외됐었으나 2009년 건국훈장 수여.

이승훈 : 기독교측 수장이자 교육자. 1906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음. 30년 작고. 33인중 가장 늦게 풀려남.

김창준 : 기독교측 대표. 함경북도 만세 운동 주도. 해방 후 사회주의 기독교 운동. 남북연석회의가 열린 1948년경 월북. 독립유공자에서 제외.

박동완 : 기독교측으로 3.1운동 경기지방의 시위 주도. 신간회 상임이사. 1923년 하와이로 망명. 41년 병사.

신석구 : 기독교 대표. 3.1 운동 후 '38년 신사 참배 거부. '45년 전승 기원 예배 거부로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9년 감리교 북한 지역 총 책임자로 기독교 민주당 결성. 같은 해 진남포 4.19 사건으로 북한 당국에 검거되어 50년에 처형.

신홍식 : 기독교 대표. 평양 남산현 교회 목사로 있다 3.1 운동 참가. 신사 참배 거부. 1937년 사망.

양전백 : 평양 신학교 졸업. 목사로 있다 3.1 운동참여. 목회사업에 전념. 105인 사건에 연루.

오화영 : 감리교 목사. 6.25 때 서울에서 납북되어 1962년 병사. 북한의 평양 애국 열사릉에 안치. 89년 3.1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96년 11월 위패만 국립묘지에 안치.

이명룡 : 기독교 대표. 105인 사건 연루. 3.1 운동 후 미국으로 망명. 1956년 병사.

이필주 : YMCA 초대 체육 교사로 일하다 목사가 되었음. 1932년 병사.

최성모 : 감리교 목사. 이필주를 만나 3.1 운동에 가담. 황해도 시위 주도.

이갑성 : 기독교 신자.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 31운동, 민립대학 설립운동, 신간회 운동, 흥업구락부 사건 주도 등에 일제와 타협하지 않은 인물 중 한 사람이었지만, 1980년대에 변절했다는 주장 뿐 아니라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런 거 없다. 2005년 삼일절 특집 SBS 뉴스추적에서 심층취재한 결과 오히려 요시찰인 인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매일신문에서 2010년에 이 떡밥에 낚여 친일파 언급했다가 정정기사를 냈다. 매일신문은 역사속의 인물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고도 친일파로 매도된 억울한 '희생자'였다고 평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김병조 : 기독교인. 33인 중 유일하게 체포되지 않았음. 상해에서 임시정부 상임이사, 사료편찬위원 등을 역임. 독립혈사 간행. 북에 머물렀단 이유로 유공자 포상이 안되다 1990년 3.1절이 되어서야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손병희 : 천도교측 수장. 1921년 사망. 딸 다섯 중 셋째 딸 손용화는 소파 방정환의 아내.

한용운 : 불교 대표. 공약 삼장 작성. 말년 가난과 중풍에 시달리며 몇 푼 안되는 원고료로 연명하다 광복을 불과 1년 앞둔 1944년 사망.

권동진 : 1882년 일본 망명 후 1905년경(?) 천도교 입문. 3.1 운동후 신간회 부회장으로 광주 학생운동 참여. 증손 권혁방씨는 33인 유족회 회장.

권병덕 : 1894년 손병희와 함께 동학농민운동에 참가, 천도교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감사원장, 선도사 등을 역임. 1947년 타계.

김완규 : 한일 합방 후 천도교 입문. 3.1 운동후 도사직을 맡고, 민중 계몽운동. 1949년 타계.

나용환 : 23세 때 동학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포교 사업. 1936년 병사.

나인협 : 19세 때 동학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교사 활동. 1951년 병사.

백용성 : 불교 대표. 법명은 용성진종대사. 16세 때 출가하여 해인사 스님들의 봉기 주도. 불교 정화 및 대중화에 힘써 서울시내에 최초로 포교당 세움. 대각사 창건후 60여종의 불경어록과 저술을 남겼다.

박준승 : 29세 때 천도교 입문. 3.1 운동 때 임실, 남원, 장성 등 호남지방 민중 봉기 주도. 1921년 옥사.

양한묵 : 1898년 일본에서 손병희를 만나 동학에 입문. 1905년 헌정동지회를 만들고 구국운동. 19년 10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으로 순국.

오세창 : 개화론자 오경석의 아들이자 천도교 신자. 한성순보 기자. 만세보, 대한민보 등의 사장. 해방후 매일신보, 서울신문 사장. 53년 사망.

유여대 : 모사로 3.1운동 당시 의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다 오후 늦게 서울도착. 일경에 붙들렸다. 1937년 사망.

이종일 : 천도교 대표. 보성사 인쇄소 사장으로 선언서 인쇄. 1925년 작고.

이종훈 : 천도교 대표. 1931년 만주에서 병사.

임예환 : 동학혁명에 동참, 3.1 운동에 가담.

홍기조 : 22세 때 천도교 입문, 손병희와 평안도 천도교 독립운동 주도. 3.1 운동 후 평안도 용강에서 독립운동. 1938년 병사.

홍병기 : 천도교 대표. 고려 혁명위원회 조직.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신의주에서 체포. 1949년 작고.


변절자들


박희도 : 33인중 최연소자. 3.1 운동 후 잡지 '생활사'창간. 이후 여제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당시 신문 가십란의 단골스타가 되었으며 결국 친일성향의 월간 잡지 '동광'(동양지광)의 창립인, 주간으로 있으면서 친일로 완전히 변절했다. 1948년 반민특위에 회부되었다가 51년 사망.


최린 : 천도교. 선언문 초안 작성. 1934년 중추원 참의, 37년 총독부 조선어판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 39년 임전보국단장을 역임하는 등 친일에 앞장섬. 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때 그나마 눈물로 참회하는 진술을 하였다. 6.25 때 납북.


정춘수 : 3.1 운동 당시 감리교 목사로 함경남도 원산에서 만세운동 지도. 1934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고문당했다. 신사참배 및 창씨개명 행위로 변절자로 간주되나 위의 사람들에 비해 적극적인 친일 행적은 없다. 독립유공자에서 제외, 51년 사망. 청주시의 우암산에 조성된 삼일공원에도 이 사람을 포함한 충청북도 출신의 민족대표 6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으나 1996년에 시민들이 철거해서 지금은 5개다.
               
띠로리 15-07-24 14:32
   
박희도도 개신교 인사입니다.
이갑성은 이와모토 마사이치로 창씨개명도 하고, 위에 적힌대로 밀정짓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다행히 아닌가 보군요.

최린까지 변절자가 4명인 것을 개신교 인사 중 4명으로 잘못 알고 있었나봅니다.
다시 보니 개신교 인사 2명, 천도교 인사 1명, 그리고 한 명은 고릿적 정보를 잘못 알고 있었네요.
잘못된 정보를 알게 된 점 감사합니다.

위에 유여대 선생님도 개신교 목사인데, 저 분은 종교가 적혀있지 않네요.
                    
청춘별곡 15-07-24 17:03
   
중간에 띠로리님의 감정을 자극했던 점은 사과 드리겠습니다. 님께서도 그렇겠지만 서로가 생각하는 관점과 토태가 다르기 때문에 해석의 차이도 있고 의견일치를 보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나름 좋은 토론 감사드리고...저 또한 한편으로 배우고 갑니다.
날개를펴고 15-07-24 15:12
   
이런 걸 잘 설명한 옛 속담이 있습니다. 소 귀에 경 읽기.
소가 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소의 잘못이 아닙니다. 소니까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띠로리 15-07-24 15:18
   
다 부질 없네요.
여기서 그만둬야겠습니다.
이런 거 길게 쓴다고 주머니로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혤로가생 15-07-24 22:48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쩌나 구경만 해봤더니

아저씨 항복하신거예요?ㅋㅋㅋ
               
띠로리 15-07-25 10:40
   
글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면 그냥 쉬다 가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