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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1-05 00:35
서토사(西土史)의 바이블 (Bible)
 글쓴이 : 굿잡스
조회 : 1,531  

지금까지 짱국 정부에서고 출판된  짱국통사니 어쩌고로 수백페이지
 
짜리로 여러 종류를 봐왔지만

이 화교의 양심 고백만큼 서토사에 대한 명료하고 실체적이며 압축된

통사는 본적 없음. 이건 우리나라 전국 대학 역사교양과목의 전문으로,

어린 초등학생도 동북아 역사를 배울때 최소한 고대사의 중국이라는
 
개념과 현대의 짱국이라는 국가는 전혀 같은 뜻이 아님을 분명히
 
교육시키고 주지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서토사(西土史)의 바이블 (Bible)>


中華民族都是虛構的族名。

중화민족은 (모두) 허구의 족명이다

內幕新聞第30號
中國人都不是漢人了 台灣人那裏是漢人?

중국인은 모두 한인이 아니다. 대만인은 (那裏) 한인?


「中國」一辭在西周初年出現,當時是指首都,
是地區名辭而非地理名辭。毛傳:「中國,京師也」
,是最好的註腳。1912年孫文創立中華民國之後,
「中國」才有近代國家正式名稱的意義,是政治名辭
也是地理名辭。清末很多國家在非正式場合稱滿清為
中國,但在正式文書上仍稱「清國」,例如馬關條約
日文版第二條,「清國將左記土地主權(遼東半島、台
灣澎湖)及其上的城壘兵器製造所官有物永遠割給日本」。

'中國'이란 말은 西周 初에 출현한 것이다. 당시의 수도를 가리키고 지역이름이며 지리명사가 아니다. '毛傳'에 "中國은 京師다"라는 것이 가장 적절한 주석이다.
1912년 손문이 중화민국을 창립한 이후 '중국'은 근대국가의 정식명칭으로서의 뜻을 가지게 되었고 정치명사이며 지리명사다. 청말에 많은 나라가 있었고 정식은 아니지만 만청을 합해 중국이라 했다.
다만 정식 문서상의 이름은 '청국'이었다. 예를 들면 '마관조약' 일문판제2조에 "청국은 장차 아래 토지주권(요동반도, 대만팽호) 및 그 위의 성루병기제조소관물을 영구히 일본에 떼어준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所以,古時的「中國」是指其古都河南的洛陽地
區,「中國人」是指洛陽地區的住民,也就是漢人、
黃帝的子孫。因為傳說中的黃帝就是在洛陽盆地建
國。洛陽盆地就是中國固有領土的全部,它的面積比
台灣小很多,所以,台灣國的固有領土比中國的固有
領土還大。

옛날에 '중국'은 그 古都 하남의 낙양지구를 가리킨다.
'중국인'이란 낙양지구의 주민을 가리킨다.
한인이라 하면 황제의 자손인데 전설 속의 황제는 낙양분지에서 건국했다.
낙양분지가 중국 고유영토의 전부다. 그 면적은 대만에 비해 오히려 적다.
대만국의 고유영토는 중국의 고유영토에 비해 오히려 큰 것이다.



中國」除了是地區名辭之外也指人種,那就是
漢族,所以「中國人」就是漢族,其祖先為黃帝,只
要祖先不是黃帝者,都不是漢族、中國人。漢族原名
華夏或簡稱夏族(這和夏禹的「夏」無關),例如:
「華夏不行中國禮樂者,即可視為夷狄;夷狄行中國
禮樂者,得視為中國」。

'중국'은 지역명 외에 한족이라는 인종을 가리키기도 한다.
'중국인'이 한족이라면 그 조선(祖先)을 황제로 한다.
그 조선(祖先)이 황제가 아니라면 모두 한족이나 중국인이 아니다. 한족의 원래이름은 화하 혹은 줄여서 하족이라 부른다(這和夏禹의 '夏'와는 무관하다).
예를 들면 "화하가 중국의 예악을 행하지 않으면 이적으로 볼 수 있지만 이적이 중국의 예악을 행하면 중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漢族向為少數民族,早已被眾蕃包圍消滅

한족은 소수민족을 가리키는 것인데 일찍이 주변의 여러 번(다른 새력)에 포위되어 소멸되었다.


古時華夏人種稱呼洛陽盆地四周的外國人為,
東夷、西戎、北狄、南蠻。這些外國人,土地大,人口
眾多,後來輪流統治「中國」四千多年,人口居於少
數的漢族,血統上早已溶入居於多數的異族當中,亡
國也亡種,那裏還有漢族?所以,今日的中國歷史以
漢族為中心,是假歷史。以下就分析中國自稱的五千
年歷史當中,每一時期統治者的血統真相。

옛날에 화하인종은 낙양분지 四周의 외국인을 동이, 서융, 북적, 남만이라 불렀다. 외국인이 땅은 크고, 인구가 많아 후대에 흘러 들어와 중국을 4천 년이 넘게 통치했다. 인구가 적었던 소수의 한족은 혈통상 일찍이 다수의 이족에 녹아들어 망한 나라의 망한 인종이 된 것이다......
오늘날 중국역사는 한족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거짓역사다. 아래 분석은 중국이 자칭하는 5천 년 역사에 있어 각각의 한 시기의 통치자의 혈통의 진상이다.


四千六百年歷史當中漢族被蕃族統治四千兩百年

4,600년 역사에서 한족이 번족의 통치를 받은 것이 4,200년이다.

一、黃帝:是傳說中的人物,不是正式歷史。傳說他
     原姓公孫,因長於姬水(一說山東曲阜),
     故以姬為姓,是有熊君之次子,居於軒
     轅,故又名有熊氏,號軒轅。他打敗南方
     君長蚩尤而被推為領袖。據傳,有25子,
     其中14人得12姓,計為:姬、酉、祁、
     己、滕、葴、任、荀、僖、姞、嬛、依。
     此12姓為華夏、夏、漢族血緣的根源,外
     姓可判為異族,亦即蠻族。後因賜姓或封
     地等關係,外姓也有漢族。

一. 황제; 전설 속의 인물이며 정식역사가 아니고 전설이다.
원래 성은 공손이다. 희수(일설 산동곡부)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희를 성으로 했다. 웅군이라는 차자가 있었고 헌원에 살았다. 고로 유웅씨라고도 한다. 호가 헌원이다.
남방군장 치우를 쳐서 이겨 영수에 추대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25아들이 있었고 그 중 14인이 12성을 얻었다. 희, 유, 기, 기, ?, ?, 임, 순, 희, ?, ?, 의. 이 12성를 화하라 한다. '하'는 한족혈통의 근원이다. 그 외의 성은 이족으로 본다. 또한 만족이기도 하다. 후에 사성이나 봉지 등의 관계에 의한 다른 성이 한족에 있다.


二、堯舜:

  1. 堯:祁姓,陶唐氏,華夏漢人。自黃帝至堯亡
     計455年,其後漢族皆為異族統治。因堯死
     舜繼,舜就是東夷不是漢人。

2. 舜:姚姓,有虞氏,東夷蠻族。

二. 요순;

1. 요; 기성, 도당씨, 화하한족 황제로부터 요가 망할 때까지 455년이다. 그 후 한족은 모두 이족의 통치를 받았다. 요가 죽고 순이 이었다. 순은 동이인이지 한인이 아니다.
2. 순; 姚姓, 有虞씨 동이만족이다.


三、禹:一說偃姓,一說姒姓,皋陶氏,西戎或東夷。

우; 일설에는 언성, 또 일설에 사성, 고도씨, 서융 혹은 동이다.


四、商:東夷。

상; 동이다.


五、周:姬姓,來自西歧,今日陜西,與羌人混血。

주; 희성, 서방 기땅에서 왔다. 오늘날의 섬서, 강인과 혼혈이다.


六、春秋:

   1.齊:姜姓,三苗後裔(南蠻)。
   2.晉:漢人。
   3.秦:西戎。
4.吳、楚、越:都是南蠻。

춘추;

1. 제는 姜姓 삼묘의 후예다(남만)
2. 진(晉)은 漢人
3. 진은 서융
4. 오, 초, 월은 모두 남만이다.


七、秦:西戎,今之藏族系,可能是氐人,故後來氐
   人符堅建國也叫秦。史家為了區別,稱之為
    前秦。

진; 서융이다. 지금의 장족계다. 저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로 후대에 온 저인 부견이 나라를 세우고 진이라고 불렀다. 사가들은 구분하여 前秦이라고 부른다. (근본 저=氏 밑에 一)


八、漢:自稱是漢人,其實很可疑。劉邦出身卑微,
    而當時位居公、侯、伯以上者才有族譜。沒
    有族譜,而中原已被外族統治兩千年,如何
    確定是漢人?

한; 자칭 한인이다. 실제로는 의심스럽다. 유방은 비천한 출신이고 당시에 공, 후, 백 이상은 족보가 있었다. 족보가 없었기 때문에 중원이 외족의 통치를 받은 것이 2천 년이나 되는데 어떻게 한인임을 확정할 수 있겠는가.


九、三國:魏不詳,蜀漢自稱是漢人,吳為南蠻。

삼국; 魏는 알 수 없다. 촉한은 자칭 한인, 오는 남만이라 한다.


十、南北朝:
  1. 南朝:晉室南遷壓迫苗越,晉之血統不詳。
  2. 北朝:前涼:自稱漢人。
     後涼:氐族。
      南涼:鮮卑。
      北涼:匈奴。
      西涼:漢族。
      前趙:匈奴。
      後趙:匈奴。
      前秦:氐族。
      後秦:羌族。
      西秦:鮮卑。
      前燕:鮮卑。
      後燕:鮮卑。
      南燕:鮮卑。
      北燕:漢族。
      大夏:匈奴。
      成漢:氐族。
      北魏:鮮卑。
     北齊:漢族。
北周:鮮卑。

남북조;

남조; 晉왕실이 남천하여 묘월을 압박했다. 晉의 혈통은 알 수 없다.
북조; 전량 자칭 한인,
후량은 저족,
남량은 선비,
북량은 흉노,
서량은 한족,
前趙는 흉노,
後趙는 흉노,
前秦은 저족,
후진은 강족,
서진은 선비,
前燕은 선비,
후연 선비,
남연 선비,
북연은 한족,
대하 흉노,
성한 한족,
북위 선비,
북제 한족,
북주 선비


十一、隋:楊堅爲北周外戚,與鮮卑混血。

수; 양견은 북주의 외척이라 한다. 선비와의 혼혈이다.


十二、唐:李淵爲「漢」與鮮卑混血。

당; 이연은 '한이라 하는데 선비와의 혼혈이다.


十三、五代十國:

   1. 五代:

    後梁:漢族。
    後唐:突厥。
    後晉:突厥。
    後漢:突厥。
    後周:漢族。

   2. 十國:除北漢在山西之外,餘皆在江南,與漢族根據地中原無關。

5대십국;

5대; 후량은 한족,
후당은 돌궐,
후한 돌궐,
후주는 한족

10국; 북한을 제외하고는 산서의 밖에 있었다. 나머지는 모두 강남에 있었다.
한족근거지 중원과는 무관하다.


十四、北宋:自稱為漢族。比劉邦更可疑,因中原至
此已被外族統治三千年,那來漢族?

북송; 자칭 한족이라 한다. 유방에 비해 더 의심스럽다.
중원이 이에 이르기까지 외족통치 3천 년인데 ......


十五、金:西元1127年滿清始祖女真人佔領中原。

금; 서기 1127년 만청 시조 여진인이 중원을 점령했다.


十六、元:蒙古人,屬匈奴。

원; 몽골인으로 흉노에 속한다.


十七、明:自稱漢族。但是,比劉邦、趙匡胤的「漢」血統更可疑。

명; 자칭 한족이다. 유방에 비해 조광윤의 '한'은 더 의심스럽다.


十八、清:滿族,亦即女真人。

청; 만족, 역시 여진인이다.


十九、中華民國、中華人民共和國:血統上自稱漢
  人,而國籍上自稱中國人。中華人民共和國的
  人口統計,公開通報的總人口12億多之中,自
   稱漢族人口佔10億多,其餘約2億,為滿、蒙、
   藏、回、苗等53個少數民族。事實上,這12、3
億人口,都不是漢族。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혈통상 자칭 한인, 국적상 자칭 중국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인구통계, 공식
발표한 인구 12억여 중에서 자칭 한인인구 10억여를 점하고
그 나머지 약 2억이 만, 몽, 장, 회, 묘 등 53개 소수민족이라 하는데
사실상 12, 3억 인구가 모두 한족이 아니다.


  現在,中國人的血統,在中華民國稱為中華民
族,而在中華人民共和國為中國民族。不管如何稱
呼,兩種名稱都只有政治意義而無血統意義。根據以
上的分析,漢族名存實亡,中國人的血統不是屬滿、
蒙、藏、回、苗等五個主要族群,就是屬其他48個少
數民族。實際上,中國大陸30幾省的土地,自古就是
這53族的固有領土,中國統治下的各民族不但應該仔
細尋根,更應知道土地的歷史,向統治者討回本族的
固有領土和民族尊嚴,因為漢族的固有領土只有洛陽
盆地。中國民族、中華民族都是虛構的族名,都經不
起歷史、血統的檢驗,閩客是越族,不是漢族。本網
站為了遷就既有的錯誤,才把閩客也稱為漢人。

현재 중국인의 혈통은 중화민국에 있으면 중화민족이라 부르며, 중화인민공화국에 있으면
중국민족이라 부른다. 두 가지 명칭은 단지 정치적인 의미일 뿐, 혈통상의 의미가 아니다.
근거에 의해 분석해본 결과로는 한족이란 이름은 있으나 실제로는 없다.
중국인의 혈통은 만, 몽, 장, 회, 묘 등 5개 주요 족군과 그 밖의 48개 소수민족에 속하지 않는다.
실제로 중국대륙의 30여 성의 땅은 예로부터 53족의 고유영토였다..........
한족의 고유영토는 낙양분지 뿐이다. 중국민족이라든가 중화민족은 모두 허구의 족명이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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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잡스 14-11-05 00:35
   
짱국왕조보다 저는 서토사(西土史)라고 정의하고 그렇게 부르길 권합니다.

이 서토는 우리와는 달리 특정왕조의 계승으로 면면히 이어져 온 단일 계승의식도

전혀 아니며 어떤 단일 민족에 의해 지배되거나 구성된 역사와 공간 또한 전혀 아닙니

다.(제가 삼국시대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가야, 백제의 외치 영토격인 열도를 그래서

특정 국가명보다는 열도라고 부르기 권하는 시각과 같습니다. 사실 일본이라는 명칭도

이런 열도라는 동쪽 지리를 지칭하든 명사라는 것이 최근 학계에서 나름 힘을 얻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동북아는 크게 세개의 이질적 다른 문화권 즉 북방의 전형적 유목문화, 남방의 전형적

서토 농경문화. 오랜 정주생활을 하면서도 기마 문화권인 우리의 반농반목 고조선 고구

려문화권으로 존재해왔습니다.

이런 가운데 힘있는 자들은 얼마든지 서토를 지배하고 다스려 왔던 역사가 실체입니다.

누구나 지배했던 공간, 그렇기에 누구의 역사라고 말할 수 없기에 서쪽의 땅 그속의 역사

서토사(西土史)라고 하는게 더 합당하고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는 혼란을 방지할 용어

로 나름 적절하다 판단됩니다.

윗글에도 있지만 쭝국이란 애초에 낙양을 중심으로 고작 수백리를 점하든 협소한 개념에서

출발해서 추상화된 지리명사를 의미한 것입니다.(가령 중세 고려 요(금), 송일 경우

송은 중국으로 지칭했지만 요,금은 당시 쭝국으로 지칭되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http://blog.naver.com/hahmss?Redirect=Log&logNo=110172529320

서토 민족 분포도

참고로 서토에서 실체하는 최초의 왕조인 상나라 역시도 서토 내지의 왕조가 아니라

동북방에서 내려온 동이족으로 이민 정복왕조사임.
굿잡스 14-11-05 00:37
   
전한
유방은 기원전 202년 재위 5년에 비로소 황제라 칭하고 노관을 연(燕)왕으로 봉한다. 그런데 기원전 201년 노관이 흉노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방은 흉노가 갓 탄생한 한나라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40만 명의 대군을 동원, 흉노의 시조인 묵특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174)를 공격한다. 그러나 기원전 200년 유방은 백등산에서 일주일 동안이나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구출되는 등 온갖 수모를 겪고 난 뒤 흉노와 화친을 맺는다.

당시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그에 의하면 한은 거의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이 관례는 문제(文帝, 기원전 179∼157) 때까지 계속되었다).

둘째,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조공을 한다.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어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중국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발효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했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 액수도 한과 흉노 사이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는데, 대체로 한의 조공액은 매년 늘어났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한이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을 흉노의 속국으로 만든 묵특선우는 흉노의 전성시대를 열었으며 우리 한민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당시 동호(東胡; ‘동쪽 오랑캐’를 의미하는 한자어. 고조선 외에 부여, 예맥, 진번, 임둔, 진국 등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가 매우 강성하였는데, 동호는 흉노를 경멸하며 묵특의 천리마와 연지(흉노의 후비(后妃)의 칭호)를 요구했다. 부하들이 동호의 무례함을 나무라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라고 하자 묵특은 ‘인접한 나라 사이에 어찌 말 한 마리와 여자를 아끼겠는가’라며 순순히 동호의 의견을 따랐다. 당시 두 나라 사이에는 1000여리의 황무지가 펼쳐 있었는데, 동호가 이를 갖겠다고 나섰다. 신하들은 버려진 땅이므로 주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묵특은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라며 동호를 습격하여 왕을 살해하고 백성과 가축을 노획했다.

패전한 동호를 대신하여 흉노는 유목기마민족의 패자로 떠올랐고, 묵특은 자신의 치세 동안 대대적인 정복활동을 벌여 아시아 초원에 있는 거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다.

한족이 이른바 ‘흉노 공포증’에서 벗어난 것은 기원전 141년 한나라 무제(武帝)가 즉위하면서부터다. 괄괄한 성미의 무제는 고조 유방 이후 60 년간 지속된 굴욕적인 대(對)흉노 유화정책을 버리고 강경 대응에 나섰다. 무제는 기원전 129년부터 기원전 119년까지 10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위청과 곽거병 등으로 하여금 기병대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10년간의 한·흉노 전쟁으로 한나라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흉노의 피해는 더욱 컸다. 무제가 죽은 후 한나라와 흉노는 대략 300년에 걸쳐 공존하며 평화롭게 지낸다



후한

후한(後漢, 25-220)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25-57)는 중국 남부와 월남의 북부를 다시 정복했다. 기원전 209년에 묵특의 지휘아래 유목제국을 수립한지 250여년이 지난 AD 47년, 흉노제국에 내란이 일어나 몽골초원 전체가 산산조각이 났다. 덕분에 요서 초원지대의 오환(烏桓)과 선비(鮮卑)는 제일 먼저 흉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실호기, 후한 명제(明帝, 57-75)는 전한 무제를 본받아 흉노를 다시 한번 통제해 보려 했다.

일찍이 AD 48년에 흉노제국이 남과 북으로 양분되자, 조정관료인 장궁(臧宮)은 흉노의 약세를 틈타 “고구려,” 오환, 및 선비와 연합하여 흉노를 공격하자고 주장했었다. 1 당시 광무제는 전쟁을 반대하는 자신의 신조를 강하게 피력했다. 49년, 광무제는 푸짐한 선물과 국경무역을 제공해 선비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명제가 즉위한 다음 해인 58년 이후에 후한 조정이 선비 부족장들에게 정기적으로 갖다 바친 금액은 년간 2억 7000만냥에 달했는데, 그 규모는 같은 기간 동안 남흉노에게 바친 것의 세배에 달하였다.


북위때(남북조)


북위는, 한편으로는 정복한 중국 땅을 중국식 관료제도로 다스려 다른 유목민족에 대해 우위를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중심의 유목민 전통을 바탕으로 부족의 정예들로 군대를 조직해서, 정복한 한족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시종일관 유지할 뿐 아니라, 쳐들어 올 가능성이 있는 다른 유목민족들에 대해서도 군사적인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모용선비가 시작하고, 탁발선비가 이어 받은 2원적(二元的) 국가조직은 요(遼) 금(金) 청(淸) 같은 정복왕조의 귀감이 됐다. 만주는 거의 모든 정복왕조를 낳고 키운 산실이며 요람이었다

홍원탁 (서울대 교수)

만주의 여러 부족들 중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 해 가장 유목민적이었던 탁발 선비는, 전연(前燕)이 만들어낸 이원 통치 체제의 장점을 살려, 처음으로 북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이민족 왕조를 수립했다.1 모용 선비족은 탁발의 북위(386-534)조정 내에 주요 지배귀족의 하나로 살아남았다. 변경지대의 한족들은 어느 때고 초원 혹은 삼림지대 출신의 이민족 부족 중 제일 강하다고 생각되는 편에 붙었다. 탁발 선비의 언어는 아마도 거란어의 직계 조어(祖語)이었을 것이다.2

부족 출신 군대 덕에, 보급이 잘되는 기병대를 보유했던 북위는 초원지대 깊숙히 원정군을 보낼 수 있었다. 거의 모든 부족들은 부대 단위로 조직되어, 할당된 지역에 거주하면서, 국경수비 공동체의 구성원 역할을 하였다.3 부족민과 군사에 관련된 문제는 각 부족 고유의 전통에 따라 처리되었다 정복된 한족 거주지역은 한족 관료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나, 고위직은 대부분 선비 귀족들이 차지했다. 전통적으로, 한족들의 이상은 능력주의 사회인데 반해, 유목민족들은 세습적 귀족제도를 고수했다. 북중국 귀족가문들은 대부분 한족이 아닌 이민족 출신이었으며, 이들은 정복왕조 중앙정부의 고위직을 대부분 독차지하였다.

중국대륙 북부의 선비족 유적지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을 보면, 시베리아와 몽골초원 유목민들의 초기 예술적 전통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 뿐만 아니라, 당시 선비족들이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위치했던 옛 박트리아와 교류가 있었고, 로마 통치하의 중동과 교역을 했으며, 초기적 불상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인도와도 접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낯익은 사람들은, 섬서성에서 발굴된 (5호16국 시대) 갑옷을 입은 말 모양의 토기를 보고, 고구려 토기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특히 호흐호트(呼和浩特)에서 출토된(맨손으로 빚어 만든) 말과 마부의 토기는 신라 토기로 오인될 정도다. 한국 사람들은 이런 모양의 토기에 너무나도 친숙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정복한 중국 땅을 중국식 관료제도로 다스려 다른 유목민족에 대해 우위를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중심의 유목민 전통을 바탕으로 부족의 정예들로 군대를 조직 해서, 정복한 한족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시종일관 유지할 뿐 아니라, 쳐들어 올 가능성이 있는 다른 유목민족들에 대해서도 군사적인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모용선비가 시작하고, 탁발선비가 이어받은 2원적 국가조직은 요(遼), 금(金), 청(淸) 같은 정복왕조의 귀감이 되었다. 만주는 거의 모든 정복왕조를 낳고 키운 산실이며 요람이었다. Barfield(1989: 105)는 “한(漢)이 멸망하고 첫 번째 만주족 정복국가(탁발북위)가 등장하기까지는 150년이 걸렸고, 당이 망하고 나서는 75년이 걸렸으나, 명(明)이 망할 때는 거의 동시에 만주족 정복왕조가 들어섰다. 한족왕조가 망하고 나서 정복왕조가 들어서기까지의 시간은 점점 단축되었지만, 그 방식은 똑같았다.”고 말한다.


당나라

수나라가 고구려에 대패하고 망하자 체력을 보존하고 있든 돌궐이 남하하여 휘젖자

당나라 이연과 이세민도 위수지맹으로 신하로 칭하면서 돌궐에 조공을 바쳤고

토번에게도 털리자 공주부터 공물을 갖다 바쳤다.




요나라때


거란(요나라)은 송과 적대적인 대치상태를 지속하다가,

결국 1005년에 송나라가 매년 20만 필의 비단과 10만 량의 은을

거란에게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었다.

1005년 조약과 1042년에 개정된 조약은 근 백 년간 평화를 지속시켰다.

송나라 조정은 열등한 지위를 수용하고, 계속 공물을 바쳤다.



금나라

송은 금(金)나라에 의해 멸망하면서

흠종,휘종 두군주가 만주로 압송되었다.

기어 내라가 세운 남송은 몽골제국(원元)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원나라때

몽고족은 제1신분으로서 통치하고 색목인(위구르인, 아랍인등)이 제 2신분이었고 다음은 서토에 살았던

거란, 선비족등은 3신분을 차지하고 끝까지 원의 지배에 항쟁했던 남송인이(한족) 4신분으로 특히 차별을 받

으며 노예 계층으로 분류했다.. 원은 몽골어를 공식언어로 지정했고, 과거제를 폐지하는 등의 정책을 통해

서토인의 정치진출을 막았으면 사고파는 물건과 다르지 않았다.




청나라때

청조의 對 한인 정책은 협조하면 유화책을 구사하지만, 반항하면 철저하게 도살하는 유혈강경책이었지요, 예컨대 화남과 화북을 잇는 군사적 경제적 거점이었던 揚州城(양주성)을 함락시켰을 때 청군은 끝까지 저항한 한인 80만명을 학살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팔기는 반문명적이고 야만적인 군대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만주족은 중국인구의 0.03%에 불과했습니다. 소수가 다수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본때를 보인 것입니다』

청조가 과거제도를 유별나게 중시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과거제를 통해 능력과 장래성이 있는 漢人을 관료로 발탁하겠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이를 통해 사대부와 지방의 紳士(신사) 계급을 통제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과거 합격자가 관직에 바로 등용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生員, 監生, 貢生, 擧人 등의 학위소지자로서 사회적 특권을 누릴 수 있었고, 상급 시험인 進士試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청조는 이들이 관계에 진출하기 위해 지옥과 같은 多단계의 과거준비에 얽매이게 유도함으로써 체제에 불만을 가질 겨를이 없도록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청대의 과거합격자 110만명 중 관료가 되었던 사람은 2만7000명에 불과했습니다

만주족의 土風(토풍)을 지키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청조는 발상지(본거지)에 사는 만주족이 한족식 집을 짓거나 한족교사를 초빙해 글을 배우는 것조차 엄격하게 금지했습니다. 中原에 들어간 만주족들은 元을 세운 몽골족처럼 한족에게 몰리면 언제라도 말을 타고 바람처럼 달려 고토로 되돌아간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중의 얘기입니다만 청조는 대만이나 산동반도 같은 곳은 쉽게 할양했지만, 조선에 대한 종주권은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아 청일전쟁까지 치렀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이 그들의 본거지와 인접해 있기 때문이었지요』

-임계순교수의 `淸史'


청나라는  만주족은 그들의 충성심을 확인 시키기 위해 변발을 강요했고 이에 반항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처단했다.

< 정사의 실제 기록>

남북조시대의  기마민족인 선비족(鮮卑族)이-<사기> <흉노전>에는

흉노를 호라 하고, 예맥 조선을 동호라 하였고,- 흉노가 동호를 하

북성으로 밀어내게 되는데 동호 ,예맥, 조선은 사기의 흉노열전,

조선열전, 소진열전에서 다르게 이칭 하지만 그 방향과 위치는 같

다. 즉 동호를 고조선으로 기록하고 있다.이후 후대

< 위지 동이전>에는 동호의(고조선) 후손이 선비, 오환이라 하고

예는 부여, 맥은 고구려라고 하여  선비, 오환, 부여, 고구려 등을

다르지 않는 갈래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와 후한서는 선비 부여 고구려등을 동이 열전에서 함께 분류하고 있다.
아싫다뭐야 14-11-05 01:07
   
대만 독립파들이 쓴 내용이네요...ㅎㅎ...반응 한번찾아보니...대만 독립 원하는 사람은 순순히 인정하네요...ㅎㅎ
gagengi 14-11-05 01:45
   
한족의 초대 황제라는 사람도 홍산문화의 왕이라는 것이 현재 중국역사학의 입장입니다. 즉 홍산문화 사람이 남하해서 중원을 식민지로 개척하고 문명을 전파한 것입니다.  일본문명이 백제에 의해 전파된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문명은 한민족의 홍산문화에 의해 전파되었습니다. 동북아시아는 중국문화권이 아니라 한국문화권입니다.

중국‘황제’는 동이족 (경향신문기사):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73623
원형 14-11-05 07:06
   
서토도 좋게 봐준말입니다.

그냥 지나. 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 같군요.

그리고 현대 들어 서토는 유럽까지 들어가죠.
정욱 14-11-05 09:51
   
그냥 지나.
야스나가 14-11-05 10:01
   
열등감 추하네요
     
굿잡스 14-11-05 10:41
   
ㅋㅋ(하긴 글 쓴 이외의 화교인들이 대체로 좀 그렇긴 하죠 ㅋ)

야스>당신과 당신나라의 추한 열등감을 말하심?ㅋ

열도에 발견된 가야갑옷을 보곤 뭔 왜갑옷 드립에

해동같은 지리명사를 삼국시대 이후 나라 헤이안의 극소수 귀족시대를 열었던

백제인들이 사용하면서 시작된 일본이라는 국호 명칭에 관한

최근의 연구자료를 들고 와서 웃긴 쉰소리나 작렬하지

않나 ㅋ 이제는 잡게에서 음식으로 되지도 않는

소리나 하더만ㅋ(추~잡하게시리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