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에 쓴 글의 댓글로 적은 글인데, 해당 글은 한참 아래로 내려갔고, 댓글도 많이 달려서 보는 분이 적을 것 같아서 새글을 다시 팝니다.
이전 글에서도 썻지만, 젠더이슈가 수면 위로 올라오고 사회갈등으로 터지게 된 것은 남녀가 정면으로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정권까지는 젠더이슈가 있더라도 그것이 성별 갈등으로까지 번지지는 않았습니다.
미수다 사태나 하나고 여교사 사건처럼 특정 집단이나 특정인을 대상으로 잡고 분노를 표출했었죠.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1. 젠더이슈에 분노한 남성들의 공격의 대상이 젊은 여성 전체로 번진 것이 최근의 일이다.
2. 젠더갈등이 길거리로 나오게 된 것이 남녀간의 직접적인 충돌로 이어졌다.
3. 혜화역 시위 때부터 현 정부에서 메웜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는 군가산점 폐지 논란부터 2010년 정도까지의 이슈들과 정황들을 써보겠습니다.
한국에서 젠더갈등의 시작은 98년 군가산점폐지 논란 때부터였습니다.
당시에 이화여대 학생들이 나와서 헌법소원을 신청했으나 1차는 실패하고, 2차로 장애인을 데리고 나와서 재차 헌법소원을 신청한 이후에서야 헌법소원이 들어갔죠.
제가 어린 시절이었고, 아직 군대는 먼 미래였음에도 불구하고 엄청 분노했었습니다.
몇 년 후에 대학생이 되었을 때, 이화여대 다니는 여학생이 저 좋다고 따라다닐 때에도 단지 이화여대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만남을 거절했을 정도로 그 분노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남성들의 분노를 집약한 당시의 명언이 아직까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요? 깔깔깔"
이미 군가산점이 폐지된 이후에 있던 토론회에서 김신명숙에게 한 남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남성들은 총을 들고 나라를 지키고, 여성들은 펜을 들고 나라를 지킨다고 하셨는데, 저도 총 대신 펜을 들고 나라를 지키고 싶습니다."
이에 대한 김신명숙의 답변이
"그래서요?"
이 답변을 듣고 여성쪽 패널들이 폭소를 터뜨렸죠.
나중엔 김신명숙의 그래서요와 패널들의 비웃음이 하나로 합쳐져서 '그래서요? 깔깔깔'이 되고, 김신명숙이 모든 비난을 한 몸에 받게끔 기억의 왜곡이 발생했지요. 비웃음마저 김신명숙이 한 것으로 많이들 기억하실 겁니다.
그리고 이 군가산점제 논란은 1999년에 헌재위헌판결을 받고도 2003년까지 계속 됩니다.
다른 이슈에 묻혀서 사라진 게 아니라 수 년에 걸쳐 계속 문제점이 지적되어 왔었습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이연숙의 발언입니다.
이연숙은 군가산점제 부활 반대를 주장하며 '군인은 집지키는 개' 발언을 남겼습니다.
http://web.humoruniv.com/board/humor/read.html?table=pds&number=87932
http://www.투데이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678
(투데이를 today로 바꿔주세요. ww.티오 가 금칙어래요.ㅠㅠ)
그런데 이 때 젠더갈등이 터지지 않았던 것은 이 사건 당시에 남성들의 분노의 표적은 이화여대에 국한되었기 때문입니다. 군가산점 폐지 이후 이화여대 사이버 총공도 있었고, 그 때문에 이화여대 서버가 다운된 일도 있었죠.
게다가 이화여대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군인 비하 퍼포먼스를 끊임없이 시도했습니다.
국방부 정문에 페인트 투척하면서 '군대는 전쟁을 일으키는 집단이고,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이다. 그러므로 군대는 해산해야 한다!' 라며 시위를 했고,
군인들이 임신부를 찔러죽이는 퍼포먼스를 하며 군인들은 모성을 파괴하는 자들이라며 군대 해산하라며 시위를 했고,
이라크 파병 당시에는 태극기를 태우며 대한민국 국군을 침략군이라며 시위를 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런 모든 시위들이 군가산점 폐지 이후 여성징병제에 대한 요구가 일어나자 이를 초장에 뿌리 뽑기 위해서 한 시위들이라고 하더군요.)
이때까지가 1998년부터 2004년까지의 일들입니다.
http://rokaf595.egloos.com/v/4604489
위 블로그에 사진들이 잘 보관되어 있네요.
(이제는 이 사진들을 찾기가 매우 힘들어졌습니다. 사실 글을 쓰고 검색할 때만 해도 찾을 수 있으리라고는 눈꼽만큼도 기대를 하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보관해주신 블로거님 감사합니다.)
정리하자면 이 때까지 분노를 느낀 남성들의 주 타겟은 이화여대였습니다.
이렇게 이화여대 총학생회가 깽판을 치는 와중에 김대중 정권 하에서 여성부가 출범합니다.
처음에는 큰 저항이 없었습니다. 대중들은 군가산점제 폐지라는 지엽적인 사건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었고,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거의 없었거든요. (제대로 말하면 페미니즘이 뭔지를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전 다행히 먼저 눈을 뜬 대학 선배를 통해 이른 시기에 정체를 알 수 있었습니다만... 한동안은 반감을 숨기고 살아야 했습니다...)
얼마 후에 이 여성부의 첫 업적이 나옵니다.
호주제 폐지.
아직까지도 여성부가 잘한 몇 안되는 정책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호주제 폐지를 둘러싸고 남녀가 싸운 게 아니라 남자들끼리 붙었습니다. 페미니즘은 전혀 언급되지도 않았고요.
전통을 말살하는 정책이다 vs 남녀평등을 위해서는 당연히 폐지되어야 한다.
전 이 때 한국에 아직도 유생들이 남아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하얀 한복을 입고, 긴 수염을 기르신 할아버지들이 많이 나오시더군요.ㅎㅎ
이후로도 자잘한 사건들이 터졌습니다. 위에 언급한 미수다, 하나고 여교사 사건도 있었고, 경희대에서 생리로 인한 결석을 출석으로 인중해주겠다는 말을 하자 여기에 대해서도 갑론을박이 있었죠. 성매매 안하면 회식비 지급하겠다던 여가부의 막장정책도 2006~2007년 정도에 나왔습니다.
이 시기에 남성연대도 출범합니다. 반페미니즘을 전면에 내걸었는데, 일반 국민들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남성연대는 남녀평등을 거부하는 성차별주의자들이란 인식이 강했거든요.
이때까지만 해도 젠더갈등의 타겟은 이화여대와 이화여대 출신 여성단체들에 한정되었고,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사상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요...
(사실 페미니즘이 양성평등이 아니라는 걸 대중이 깨달은 건 길게 봐야 5년 정도 밖에 안됬습니다.)
결국 성재기님은 자금난을 타개하기 위해 한강 다이빙 퍼포먼스를 하시다가 익사하시고 남성연대는 동력을 상실했죠.
그러다가 다시 한번 터진 것이 여대 ROTC 배정 문제였습니다.
이 때는 이명박 정권 때였는데, 엄청 불이 붙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도 주요 표적은 이화여대에 집중되었습니다. 군대 비하하던 이화여대에 ROTC를 육성하는 것이 말이 되냐?며 말이죠.
게다가 2000년대 중반부터 여성단체들의 정체가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여기 구성원들이 죄다 이화여대 출신 페미니스트들인지라 사람들이 이대만 열심히 깠습니다. 덤으로 숙대도...
(우리 페미니즘은 그렇지 않아! 근데 이대ㄴ들이 이상한 주장 하는 거야. 페미니즘이 나쁜 게 아니라 이대ㄴ들이 나쁜 거야. 뭐 이런 마인드...)
이런 이슈들은 타겟이 한정되어 있어서 지금보다는 규모가 작았고, 참여했던 인원들이 작았을 뿐이지, 결코 다른 이슈에 묻히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한번 터지면 수 개월씩 온라인 상에서 쌈박질이 있었어요.
이게 또 한번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 메갈리아 사태였습니다.
이 때의 유의미한 변화는 이대 출신 페미들과 비이대 출신 페미들이 세력다툼을 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기존의 여성계를 장악하고 있던 이대 출신 페미들과 메갈리아 등을 통해 새로이 페미계에 발을 들이게 된 비이대계열 페미들간에 충돌이 일어난 거지요. 그리고 이 때부터 남성들의 타겟은 이화여대와 이화여대 출신의 페미니스트들(여성부, 여성단체)가 아니라 메갈리아로 불리는 집합체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이후부터는 시간이 지나면서 남성들이 적대시하는 세력이 메갈리아에서 페미니스트들로, 페미니스트에서 젊은 여성들로 규모가 커진 겁니다. 그리고 전 이 때가 이전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홍대 몰카사건과 혜화역 시위라고 봅니다. 여기부터는 아래 글에서 길게 설명했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