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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25 11:59
미국 다이아몬드 교수 일본인은 한국인의 후예다!!!
 글쓴이 : 치우비
조회 : 1,721  

일본인의 뿌리

by Jared Diamond 06.05.1998 Discovery

도대체 일본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디에서 왔고 언제 왔는가? 그 답을 얻기란 불가능은 아니지만 어렵다. 진짜 문제는 일본인들 자신들이 알고 싶어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기원을 파헤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의 세계 강국들 중에서, 일본인들은 그들의 문화와 환경이 가장 독특하다. 일본어의 기원은 언어학에서 가장 논쟁이 되고 있는 의문 들 중의 하나이다. 이들 의문들은 일본인들의 자화상과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어떻게 보여 지고 있는가에 중심적이다.


그 증거들이 서로 상충되기 때문에 답을 찾는 것은 어렵다. 한편으로, 다른 동아시아인들 특히 한국인들과 외관과 유전자에서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생물학적으로 구분하기 힘들다. 일본인들은 홋카이도의 아이누라고 불리는 구별되는 사람들만 제외하고는 문화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균질하다. 이런 면에서 일본인들은 아시아 본토에서 최근에야 일본에 도착하여 원주민인 아이누를 몰아냈지만 너무나 최근에 일어난 일이라 그들의 본토 사촌들과 차이점을 진화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참이라면, 일본어는 본토 언어들 중의 어떤 것과 밀접한 근연 관계를 보여야 될 것이다. (영어가 다른 게르만 어와 명백하게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듯이.) 일본의 고대 언어와 최근의 기원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가?


고고학자들은 4가지 서로 상충되는 이론들을 제안해 왔다.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일본인들은 기원전 2만 년 전보다 오래 전에 일본을 차지했던 고대 빙하시대 사람들로부터 점진적으로 진화해 왔다는 견해이다. 또 다른 일본에서 널리 퍼진 견해는 일본인들은 4세기에 한국을 경유하여 일본을 정복한 기마 아시아 유목민에서 유래했다는 이론이다. 그렇지만 그들 유목민들은 결코 한국인들은 아니었다. 많은 서구 고고학자들과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이론은 일본인들은 기원전 400년경에 도착한 벼농사를 하는 한국으로부터의 이주민들의 후손들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4번째 이론은 다른 3가지 이론들에서 거명된 민족들이 섞여서 근대 일본인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1946년까지 , 일본학교에서는 8세기에 쓰여 진 가장 초기의 기록에 기초한 역사적 신화가 가르쳐졌다. 창조자 신인 이가나기의 왼쪽 눈에서 태어난 태양 여신인 아마테라수가 규슈 섬에 그녀의 손자인 니니기를 보내서 지구의 신과 결혼시켰다고 한다. 니니기의 증손자인 짐무는 신성한 새의 도움을 받고 적들을 꼼짝 못하게 함으로써 기원전 660년에 일본 최초의 천황이 되었다. 기원전 660년과 역사적으로 기록된 초기의 왕국들과의 갭을 메꾸기 위해 기 그 연대기들은 13명의 가공 천황들을 만들어 내었다.

사람들과 물건들이 기원 후 300-700 사이에 일본과 한국 사이에 오갔다는 많은 고고학적 증거들이 있다. 일본인들은 이것을 일본이 한국을 정복하여 한국인 노예들과 도공들을 일본으로 데려 온 것으로 해석한다.; 한국인들은 한국이 일본을 정복했고 일본 황실의 건국자는 한국인이었다고 믿는다.


일본의 독특한 문화는 독특한 지리와 환경에서 시작되었다. 일본은 영국보다 훨씬 더 격리되어 있다. 영국은 프랑스 해안과 22마일 떨어져 있지만 일본은 남한에서 110마일, 러시아 본토와 190마일, 중국 본토에서 480마일 떨어져 있다. 기후도 많이 다르다. 년 강우량은 120인치(6500mm)이다. 일본의 강우는 여름의 성장 기간에 집중되어 있어서 온대 지역에서 가장 높은 식물 생산성을 보인다. 일본은 80%가 산악지대이고 14%만이 농경지이지만 , 농경지는 너무나 비옥하여 영국 농지보다 같은 면적당 8배의 인구를 부양할 수 있다. 일본의 많은 강우량 때문에 벌목 후에 숲이 빠르게 재생된다. 일본의 70%가 아직도 숲으로 덮여 있다.


일본 숲의 구성은 위도와 고도에 따라 다르다: 남부는 상록수림, 중부는 활엽수림, 북부는 침엽수림. 선사시대 인류에게는 , 활엽수림이 가장 생산적이어서 호두, 밤, 도토리, 너도밤나무 같은 식용의 풍부한 견과를 제공하였다. 일본의 물들도 아주 생산적이었다. 호수, 강 그리고 둘러 싼 바다는 연어, 송어, 참치, 정어리, 고등어, 정어, 그리고 대구로 넘쳐났다. 또한 일본 바다는 조개, 굴, 그리고 다른 어패류가 풍부하다.

외관상, 일본인들은 다른 동아시아인들과 매우 비슷하다. 아이누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털이 많기 때문에 ,그들은 종종 코카시안 계로 분류된다. 그러나 아이누 인들의 전반적인 유전적 조성은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을 비롯해서 다른 동아시아인들과 근연 관계에 있다. 아이누 인들의 구별되는 외모와 수렵- 채집 생활방식과 일본인들의 구별되지 않는 외모와 집약적인 농사 생활방식은 아이누 인들은 일본의 원주민 수렵-채집 거주자들로부터 내려왔고, 일본인들은 아시아 본토로부터의 최근의 침략자들이라고 빈번하게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이 관점은 일본어의 독특함과 공존하기 힘들다. 모든 사람들이 일본어는 세계의 다른 어떤 언어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일본어가 터키, 몽고, 퉁구스어들로 이루어진 아시아의 알타이어족의 한 격리된 가지라고 간주한다. 한국어도 이 어족의 격리된 가지이고 이 어족 내에서 일본어와 한국어는 서로 가장 근연 관계에 있다고 종종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어와 한국어 사이의 유사성은 문법과 어휘의 세세한 양상의 공유라기보다는 일반적 문법 양상들과 약 15%의 기초 어휘에 국한되어 있다. 그 차이는 러시아어와 프랑스어보다 더 다르다.


언어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두 언어가 더 비슷할수록, 그들은 더 최근에 분기했음에 틀림없다. 공통 단어들과 양상들을 셈으로써, 언어학자들은 두 언어가 얼마나 오래 전에 갈라졌는지를 추정할 수 있는데, 그러한 추정에 의하면, 일본어와 한국어는 최소한 4000년 전에 갈라졌다. 아이누 언어의 기원은 철저히 조사되었다.; 그것은 일본어와 아무런 특별한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유전자와 언어 외에도, 일본인들의 기원에 관한 제3의 증거는 고대의 화상들로부터 나온다. 보존된 일본 거주자들의 가장 초기의 상은 하니와 ( haniwa)라고 불리는 조상들인데, 1500년 전 경에 무덤 밖에 세워진 것이다. 그들은 털 복숭이 아이누 인들과 닮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홋카이도 남쪽의 아이누 인들을 몰아냈다면, 그것은 기원 후 500년 보다 이전에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일본에 대한 가장 이르게 쓰여 진 정보는 중국의 연대기들로부터 온다. 동족의 야만인들이라고 지칭된 여러 민족들에 대한 중국의 초기의 설명에서, 일본은 와(Wa)라는 이름으로 묘사되는데, 그 거주자들은 100개 이상의 서로 싸우는 국가들로 나누어 진 것으로 묘사된다.

기원 후 700년 이전의 한국이나 일본의 비문은 몇 개 남아 있지 않지만, 712년과 730년에 일본에서 그리고 나중에 한국에서 방대한 연대기가 쓰여 졌다. 그것들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중국에서 한국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대량의 문화 전달이 있었음을 드러내 준다. 그 연대기들에는 일본에 있는 한국인들과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 이야기가 많다.


그러므로 일본인들의 조상들은 그들이 문자를 가지기 전에 일본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생물학적 구성은 그들이 최근에 도착했음을 제시하지만, 그들의 언어는 아주 오래 전에 도착했음을 제시한다. 이 패러독스를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고고학에 의존해야 한다.


일본과 동아시아 연안을 둘러싸는 바다는 , 대양의 많은 물이 빙하 속에 갇혀 있고, 해수면이 현재보다 약 500피트(150m) 더 낮았던 빙하시대 동안에는 마른 땅이었을 정도로 얇았다. 땅 다리들이 일본의 주 섬들을 서로, 러시아 본토에 그리고 남한과 연결하였다. 일본으로 걸어 간 포유류들은 근대 일본의 곰과 원숭이들의 조상들뿐만이 아니라 , 배가 발명되기 오래 전의 고대 인류도 있었다. 석기 도구들은 50만 년 전에 이미 인간들이 도착했음을 보여준다.


13,000년 전 경에 , 빙하들이 전 세계에 걸쳐 급속하게 녹기 시작할 때, 일본의 조건들은 인간에게는 엄청 좋은 환경으로 변했다. 기온, 강우 그리고 습도는 다 증가하여 식물 생산성을 지금 수준으로 높였다. 견과류로 가득한 활엽수림은 , 빙하시대에는 일본 남부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침엽수들을 몰아내면서 북부로 확장함으로써 인간에게는 부모와 같았던 수림을 훨씬 더 생산적인 수림으로 대체하였다. 해수면 상승으로 육지 다리가 끊기면서 일본은 아시아 대륙의 일부에서 큰 군도로 바뀌고 , 평원이었던 곳이 풍부한 얕은 바다로 되면서 수많은 섬들, 만들, 조수 저습지 그리고 삼각주들,( 이들 모두는 바다 식량으로 가득했다)들로 된 생산적인 새로운 수천 마일에 걸친 해안선들이 만들어졌다.



빙하시대의 종말은 일본사의 2개의 가장 결정적인 변화들 중 첫 번째 것: 도기의 발명이 동반되었다. 고고학자들의 보통의 경험에서는, 발명들은 본토에서 섬으로 흐르고 , 작은 주변 사회들은 혁명적 진전을 공헌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기들이 12,700년 정에 일본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발견하자 고고학자들은 놀랐다. 인류의 경험에서 처음으로, 원하는 형태는 어떤 형태로든지 만들 수 있는 방수 용기를 사람들은 갖게 되었다. 식량을 끓이거나 증류시킬 수 있는 그들의 새로운 능력으로, 그들은 전에는 사용하기 어려웠던 풍부한 자원들: 잎이 많은 채소들( 열린 불에서 요리되면 타버리거나 말라 없어진다.) 갑각류(이제는 쉽게 열 수 있다) 도토리 같은 유독성 식량(끓이면 독이 없어진다.)에 대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약하게 끓여진 식량들은 작은 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고, 그래서 더 일찍 젖을 뗄 수가 있고 임신 간격이 더 짧아졌다. 이 없는 노인들은 , 문자가 없던 시대에는 정보의 보고였는데, 지금은 먹일 수가 있고 더 오래 살게 되었다. 도기의 이 중대한 결과들은 인구 폭발을 촉발시켰는데, 일본 인구를 수천 명에서 25만 명으로 올렸다고 추정되고 있다.


섬사람들이 더 우월한 대륙에서 배우게 되어 있다는 편견은 일본의 신기록을 이룩한 도기 발명이 그러한 쇼크를 일으킨 유일한이유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 일본의 도공들은 분명히 수렵-채집 인들이었는데, 그것은 전통적인 관점에 위반되는 것이었다. 보통은 단지 정착 사회들만이 도기를 갖고 있다: 유목민들이 원하는 것은 무기들과 어린애들만이 아니라 무겁고 깨지기 쉬운 도기들이다.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의 정착 사회들은 농업의 채택과 함께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의 환경은 너무나 생산적이어서 삶들은 여전히 수렵-채집을 하면서도 정착하여 도기를 만들 수 있었다. 도기로써 그 일본 수렵- 채집 인들은 집약 농업이 일본에 도착하기 10000년 전에 이미 일본의 풍부한 식량자원들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많은 일본의 고대 도기들은 부드러운 진흙에 끈을 말거나 누름으로써 장식되었다. 끈 마킹에 대한 일본어가 조몬이므로 조몬이라는 용어가 도기 자체에 적용되고; 그것을 만든 일본인들 , 도기의 발명에서 만 년 후에 끝나는 일본의 선사 시대 전 기간에 대해 적용되었다.

12700년 전의 가장 초기의 조몬 도기는 일본의 남단 섬인 규슈에서 온다. 거기에서 도기는 북쪽으로 전파되어 현대 도쿄 지역에는 9,500년 전에 , 홋카이도에는 7,000년 전에 도달하였다. 도기의 북쪽으로의 전파는 활엽수림의 북쪽으로의 전파 후에 생겼는데, 이는 기후에 연관된 식량 폭발이 정착생활을 가능하게 한 것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조몬 사람들은 어떻게 생계를 꾸렸는가? 일본 전역에 걸쳐 수만 개의 발굴된 고고학적 유적지들에 남긴 그들의 쓰레기에서 나온 풍부한 증거들이 있다. 그들은 잘 균형 잡힌 식단을 즐겼다.


하나의 주요한 식량 카테고리는 견과류인데, 특히 밤과 호두에다가 마로니에와 그들의 쓴 독성들이 걸러지거나 끓여 없애진 도토리들이었다. 견과류는 가을에 엄청난 양이 수확되어 깊이가 2m 인 지하 구덩이에 겨울 대비용으로 저장되었다. 다른 식물 식량으로는 장과, 과일, 씨, 잎, 새싹, 구근, 그리고 뿌리들이 있다. 고고학자들은 총 64 종류의 식용 식물들을 발견하였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도 일본 거주자들은 해산물의 1등 소비자들이었다. 그들은 대양에서 다랑어를 작살로 잡고 바다표범을 바닷가에서 죽이고 강에서는 철마다 돌아오는 연어를 잡았다. 그들은 돌고래를 얕은 바다로 몰아서 몽둥이로 치거나 창으로 찔러 잡았다. 그들은 다양한 물고기들을 그물로 잡거나 그것들을 어살에 가두고 사슴뿔에서 깎은 낚시 바늘로 잡았다. 그들은 갑각류, 게, 그리고 해초들을 간만 지역에서 모았다. 사냥된 육지 동물들 중에는, 멧돼지와 사슴이 가장 흔한 먹이 감이었다. 그것들은 구덩이 함정에서 잡히거나 , 활과 화살로 맞힌 후에 개들이 추적했다.

조몬의 생계에 관해 가장 많이 토론된 질문은 농업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많은 조몬 유적지들에는 일본 야생 토착종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재배되고 있는 작물도 포함하는 많은 식용 식물들의 유물들이 발견된다. 조몬 시대 유물들은 작물들과 그들의 야생 조상들을 구분하는 양상을 분명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식물들이 들에서 채집된 것인지 의도적으로 재배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유적지들에는 또한 삼과 같이 아시아 본토로부터 도입되었음이 틀림없는 일본 토종이 아닌 식용이거나 유용한 식물들의 파편들이 있다. 조몬 시대가 끝날 무렵인 기원전 1000년경에 쌀, 보리 그리고 기장과 같은 동아시아 주 곡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 감질나게 하는 증거들은 조몬 사람들은 화전 농업을 시작하고 있었지만 분명히 그들의 식단에는 사소한 역할만 하고 있었다는 것을 제시한다.


조몬 수렵-채집 인들을 연구하는 고고학자들은 들고 다니기 어려운 도기(90cm 나 되는 파편들을 포함하여)들만이 아니라 무거운 석기, 보수의 흔적을 보이는 집들의 잔해, 50명 이상의 큰 마을 그리고 묘지들을 발견하였다-이것들은 다 조몬 사람들이 유목민이 아니라 정착민들이었다는 것에 대한 또 다른 증거들이다. 그들의 집에 머무는 생활방식은 한 중심지에서 짧은 거리 안에 있는 이용 가능한 자원이 풍부한 서식지들: 내륙 숲, 강, 바닷가. 연안, 대양들. 조몬 사람들은 수렵-채집 인들에서는 가장 높은 인구밀도로 살았는데, 특히 견과류가 풍부하고 연어가 돌아오고 생산적인 바다가 있는 중부와 북부에서 그랬다. 조몬 일본의 피크 당시의 추정 인구는 25만 명이다.


조몬 사람들은 집약 농업이 없었다. 개(아마도 또한 돼지)를 제외하고는, 그들에게는 가축이 없었다. 금속도구도, 문자도 ,직물도 없었고, 족장과 평민 사이의 사회적 계급분화도 거의 없었다. 도기 양식의 지역적 변이는 정치적 중앙집권화와 통일로의 진전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 당시의 동아시아와 구분됨에도 불구하고, 조몬 일본은 완전히 고립되어 있지 않았다. 도기, 흑요석 그리고 낚시 바늘은 조몬 사람들이 한국, 러시아 그리고 오키나와와의 교역했음을 증언한다.- 아시아 본토 작물들의 도착도 그를 증언한다. 그렇지만 후기 시대들과 비교하여 그 제한 된 외부 세계와의 교역은 조몬 사회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조몬 일본은 만 년에 걸쳐 거의 변화하지 않은 보수적인 소세계였다.

기원전 400년경에 중국은 부유한 엘리트들과 가난한 평민들로 구성된 왕국들로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성벽 안 읍에 살았고, 중국은 정치적 통일 직전이었고, 곧 세계 최대의 제국이 되려 하고 있었다. 기원전 6,500년경에 시작하여 중국은 북부의 기장과 남부의 쌀에 기초한 집약 농업을 발전시켜 왔다.; 돼지, 닭 그리고 물소를 키우고 있었다. 중국은 최소 900년 이상 문자를 갖고 있었고, 금속은 최소 1500년 이상 갖고 있었다. 그리고 세계 최초의 주철을 바로 전에 발명하였다. 그러한 발전들은 또한 한국으로 전파되고 있었는데, 한국은 수천 년 동안 농업(벼농사는 최소한 기원전 2,100년 이래)을 해 왔고, 금속은 기원전 1,000년 이래 갖고 있었다.


이 모든 발전들이 일본에서 대한해협 바로 건너의 곳에서 수천 년 동안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 기원전 400년의 일본이 여전히 문자가 없는 석기 수렵-채집 인들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다. 인류사를 통해, 고밀도의 농업 인구에 의해 부양되는 군대와 금속 무기를 가진 중앙집권 국가들은 산재한 인구의 수렵-채집 인들을 언제나 몰아냈다. 조몬 일본은 어떻게 그렇게 오래 동안 생존할 수가 있었는가?


이 패러독스에 대한 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원전 400년까지는 대한해협이 부자 농부들을 가난한 수렵-채집 인들과 격리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농부들을 부자 수렵-채집 인들과

격리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중국과 조몬 일본은 직접적으로 만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무역은 한국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벼는 따뜻한 중국 남부에서 길들여지고 , 훨씬 더 추운 한국으로는 서서히 전파되었을 것인데 추위에 강한 품종 개량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초기 벼농사는 논이 아니라 마른 밭에서 행해졌는데, 그리 생산적이지 못했다. 그러므로 초기의 한국 벼농사는 조몬 수렵-채집과 경쟁할 수 없었다. 조몬 사람들이 한국 농업을 채택해서 얻는 이점은 없었을 것이다. 한국 농부들은 일본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유리한 점이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극적으로 갑자기 반전되었다.


기원전 400년경에, 남한으로부터 새로운 생활방식이 도착했다. 이 2번째의 이행은 일본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을 다시 한 번 제기한다. 한국으로부터의 이주민들이 조몬 사람들을 대체하게 되었나? 아니면 일본에 거주해 오던 원래의 조몬 사람들이 귀중한 새로운 기술들을 배우면서 계속 일본을 차지했나?


새로운 생활양식은 일본 남부 규슈의 북쪽 해안에 최초로 나타났다. 여기는 남한에서 대한해협을 건너면 바로 도달할 수 있다.거기에서 일본 최초의 철제 도구와 일본에서의 최초의 논쟁의 여지가 없는 완전한 규모의 농업이 발견된다. 농업이 운하와 둑, 제방 ,벼와 쌀 관개 논 형태가 고고학적 발굴들에 의해 나타난다. 고고학자들은 그 새로운 생활방식을 야오이( Yayoi)라고 명명하였는데, 1844년에 그 특징적인 도기들이 최초로 확인된 도쿄의 지역 명을 따른 것이다. 야오이 도기들은 그 모양이 그 당시의 남한 도기들과 매우 비슷하다. 새로운 야오이 문화의 다른 많은 요소들도 분명히 한국적이며 , 청동기, 직물, 유리구슬, 도구와 집들의 양식들을 포함하여 일본에 낯선 것들이었다.


쌀이 가장 중요한 작물이었지만, 야오이 농부들은 돼지들만이 아니라 27종의 새 작물들을 일본에 도입하였다. 그들은 여름에 논이 관개되는 2모작을 실시했음에 틀림없다. 그 후에는 물을 빼어 겨울에 기장, 보리 그리고 밀을 경작하였다. 필연적으로, 이 집약 농업의 고도로 생산적인 시스템으로 규슈에서 인구 폭발이 즉각적으로 촉발되었는데, 규슈에서 고고학자들은 조몬 유적지보다 훨씬 더 많은 야오이 유적지들을 찾아내었다.


순식간에, 야오이 농사는 인근 쉬코크와 혼슈의 주 섬들로 건너 뛰어 200년 이내에 도쿄에 도달하고 혼슈의 북단(규슈의 최초의 정착지에서 1000마일의 거리 )에는 또 다른 1세기 내에 도달했다. 짧은 기간 동안에 북부 혼슈 지방을 차지했던 야오이 농부들은 그 지역을 포기했는데, 아마도 쌀농사가 조몬 수렵-채집 생활과 경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후 2000년 동안 북부 혼슈는 변경 지역으로 남아서 그 이북의 홋카이도와 아이누 수렵-채집 인들은 19세기 전까지는 일본의 영토로 간주되지 않았다.


야오이 일본이 사회 계급분화의 최초의 징조를 나타내기까지는 여러 세기가 걸렸다. 이러한 징조는 특히 묘지에서 잘 나타난다. 기원전 100년 후에는, 명백히 등장하는 엘리트 계급들의 무덤들을 위한 분리된 묘지 터가 따로 마련되었는데, 그것들은 아름다운 퇴색한 물건들과 청동 거울 같은 중국에서 수입된 사치재들에 의해 구분 지어졌다. 야오이 인구 폭발이 계속되고, 습한 쌀농사에 적합한 모든 최고의 습지들과 관개 가능한 평원들이 다 사용되기 시작하자 전쟁이 점점 더 빈번해졌다는 것을 고고학적 증거들은 시사한다.; 그러한 증거들로는 화살촉의 대량 생산, 마을 둘레의 방어용 해자, 투사 물에 의해 찔린 해골들이 있다.

야오이 일본에서의 이 전쟁의 증거들은 중국 연대기에서의 일본에 대한 가장 이른 설명을 확증하는데, 그 설명에 의하면, 와(Wa)의 나라에서는 수백 개의 작은 정치 단위들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기원 후 300-700년 사이 시기에, 고고학적 발굴들과 나중의 애매한 설명들에 의하면, 정치적으로 통일된 일본의 등장을 희미하게나 일별할 수 있다. 기원후 300년 이전에는 ,엘리트들의 묘지는 작았고 지역마다 다른 스타일이었다. 기원후300년경에 시작하여, 고분이라고 불리는 점점 더 엄청나게 큰 묘들이 열쇠 구멍 모양으로 , 규슈에서 혼슈에 이르는 전 야오이 지역에 걸쳐 건설되었다. 고분은 길이가 450m에 달하고 높이는 30msk 되는 것들도 있었다. 그것들을 세우는데 들어간 엄청난 양의 노동과 그들 양식의 획일성은 거대한 정치적으로 통일된 노동을 지휘할 수 있는 강력한 지배자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고분이 제공하는 정치적 중앙집권화의 증거들은 훨씬 나중에 쓰여 진 일본과 한국의 연대기들의 고분 시대 일본 천황들에 관한 설명들을 강화한다. 고분 시대 동안의 일본에 대한 대규모의 한국의 영향-한국의 일본 정복이든 일본의 한국 정복을 통해서이든-은 불교, 문자, 승마, 그리고 새로운 도자기와 제철 기술의 아시아 본토에서 일본으로의 이전에 역할을 하였다.


최후로, 712년에 일본 최초 연대기가 종료되면서, 일본은 역사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712년에, 일본 거주 사람들은 의심할 바 없이 일본인들이었고, 그들의 언어(구 일본어라고 명명되었다)는 틀림없이 현대 일본어의 조상이었다. 아키히토 천황은 712년에 쓰여 진 712년의 천황의 82대 후손이다.


일본 문화는 만 년 동안의 조몬 시대보다 700년간의 야오이 시기에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명백히, 기원전 400년에 중대한 무엇인가 일어났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근대 일본의 조상들은 조몬 사람들, 야오이 사람들 또는 그들의 결합 어느 것일까? 일본 인구는 야오이 시기동안 70배나 증가하였다. 무엇이 그런 변화를 야기한 것일까? 3가지 가설들이 있다.


한 이론은 조몬 수렵-채집 인들 자신들은 점진적으로 근대 일본인들로 진화해 갔다는 것이다. 그들은 벌써 수천 년 동안 마을에서 정착 생활을 하고 있었음으로, 그들은 농업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다. 야오이 이행에서 , 아마도 조몬 사회는 추위에 강한 쌀과 논 물대기에 관한 정보를 한국에서 받는 일만 일어났을 것이다. 이 이론은 많은 근대 일본인들에게 호소력을 갖는데, 일본인의 유전자 풀에 대한 환영받지 못하는 한국인의 유전자의 공헌을 최소화 하는 반면, 일본인들을 지난 12000년간 일본인들을 독특하게 일본인으로 남아 있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2번째 이론은 야오이 이행은 한국에서 한국 농법, 문화 그리고 유전자를 갖고 온 대규모의 이민 물결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규슈는 한국 쌀 농부들에게 천국으로 보였는데, 한국보다 더 따뜻하고 더 습하고 따라서 벼를 키우기에 더 나은 장소였다. 한 추정에 의하면, 야오이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수백만 명의 이민을 받아들였고, 이는 조몬 사람들의 유전자 공헌을 완전히 압도했다.(야오이 이행 직전에 조몬 인구는 75000명으로 추정된다.) 만일 그렇다면 근대 일본인들은 한국 이민들의 후손들로서, 지난 2000년 사이에 자신들의 수정된 문화를 발전시켰다.


마지막 이론은 한국으로부터의 이민의 증거를 받아들이지만 , 대규모 이민이었다는 것을 부정한다. 고도로 생산적인 농업 때문에, 소규모의 이민 쌀 농부들은 조몬 수렵-채집 인들보다 훨씬 더 빨리 재생산하여 결국에는 그들을 수적으로 압도하게 되었다. 2번째 이론처럼, 이 이론은 근대 일본인들이 약간 변형된 한국인들이라고 간주하지만 대규모 이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계의 다른 곳들에서의 이행과 비교하여 보면, 2번째나 3번째 이론이 1번째 이론보다 더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지난 12,000년 동안에, 농업은 중국과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포함해서 많아야 지구상의 9군데서 일어났다. 12000년 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수렵-채집 인들이었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농부이거나 농부에 의해 먹고 산다. 농경이 그 발생지에서 퍼져 나간 것은 농부들이 수렵 인들보다 더 애를 많이 낳고, 더 강력한 기술을 발전시켰고, 수렵 인들을 죽이거나 농업에 적당한 곳에서 몰아냈기 때문이다. 기원전 400년의 한국 농부들은

철기와 매우 발전된 형태의 집약농업을 이미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몬 사냥꾼들에 대해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있었을 것이다.


3가지 이론들 중 어느 것이 옳은가? 이 의문에 답하는 유일한 직접적인 방법은 조몬과 야오이 해골들과 유전자들을 근대 일본인들과 아이누 인들과 비교하는 것이다. 많은 해골들에 대한 측정들이 있어 왔다. 더구나, 지난 3년 동안에 분자 유전학자들은 고대 인류의 해골들에서 DNA를 추출하여 일본의 고대와 근대 인류의 유전자들을 비교하기 시작하였다. 조몬과 야오이 해골들은 평균적으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을 연구자들은 발견하였다. 조몬 사람들은 키가 작았고, 전완이 더 길었고, 짧은 다리와 눈 사이가 더 넓었고, 짧고 더 넓은 얼굴에 눈에 띄게 높은 눈썹과 코, 그리고 콧대를 가졌다. 야오이 사람들은 1-2인치 더 컸고 , 눈 사이가 좁았고, 길고 좁은 얼굴에 평평한 눈썹과 코를 가졌다. 고분 시대가 되자,

모든 일본 해골들은 아이누 해골들을 제외하고는 동종 그룹으로서 근대 일본인과 한국인을 닮았다.


이 모든 면에서, 조몬 두개골은 근대 일본인과는 다르고 근대 아이누 인들의 두개골과 닮았다. 반면에 야오이 두개골은 대부분 근대 일본인의 두개골을 닮았다. 비슷하게, 한국인과 비슷한 야오이 유전자와 아이누와 비슷한 조몬 유전자의 근대 일본인들의 유전자 풀에 대한 상대적 공헌을 계산하려고 하는 유전학자들은 야오이 공헌이 일반적으로 지배적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의 이민자들이 근대일본인들의 유전자 풀에 대해 크게 공헌하였다. 지난 3년간의 유전 연구들은 아이누 인들의 기원에 대한 논쟁을 마침내 해결하엿다.; 아이누 인들은 일본 고대의 조몬 거주자들의 후손들로서, 야오이 식민자들과 근대 일본인들의 한국인 유전자들과 섞인 것이다.


쌀농사가 한국 농부들에게 주었던 압도적인 이점을 생각하면, 왜 그 농부들이 수천 년간 일본에 거의 발을 들여 놓지 못하다가 갑자기 조몬 사냥꾼들에게 승리를 할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최종적으로 균형을 무너뜨리고 야오이 이행을 촉발한 것은 아마도 4가지 발전들의 결합일 것이다.: 그 농부들은 덜 생산적인 마른 밭이 아니라 관개된 논에서 벼를 키우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추운 기후에서도 잘 자라는 벼 품종을 개발하였다; 한국에서의 인구가 폭증하여 이민 압력을 높였다; 그들은 철기를 발명하여 나무 삽, 괭이 그리고 논농사에 필요한 다른 도구들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철과 집약농업이 일본에 동시에 도달하였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 리가 없다.


아이누 인들은 일본의 원주민들의 후손이고 일본인들은 좀 더 최근에 도달한 자들의 후손이다. 그러나 언어 문제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당연히 일본어와 한국어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이 들 것이다. 더 일반적으로, 일본 민족이 규슈 섬에서 아이누-같이 생긴 조몬 원주민들과 한국으로부터의 침입자들의 혼혈에서 최근에 생긴 것이라면, 일본어는 한국어와 아이누어와 밀접한 근연관계를 나타내야 한다. 그러나 일본어와 아이누어는 관계가 없고 일본 한국어의 관계는 멀다. 혼혈이 2,400년 전에 일어났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이 패러독스는 다음과 같이 해소 될 수 있다.: 규슈의 조몬 거주자들과 야오이 침입자들의 언어들은 근대 아이누어와 한국어들과 각자 상당히 달랐다.


아이누어는 북쪽 섬 홋카이도에서 아이누 인들에 의해 근세에 말해졌다, 그러므로 홋카이도의 조몬 원주민들은 아마도 또한 아이누어와 비슷한 언어를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규슈의 조몬 원주민들은 분명히 그렇지 않았다. 남단의 규슈에서 북단의 홋카이도에 이르기까지 일본 열도는 길이가 거의 1500마일에 이른다. 조몬 시대에는 아주 다양한 지역적 생계 기술들과 도기 양식들이 있었고 , 정치적으로는 절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만 년 동안의 조몬 시대 동안에 , 조몬 사람들은 큰 언어적 다양성을 진화시켜 왔을 것이다. 사실상, 홋카이도와 북부 혼슈에 대한 일본의 많은 지명들은 강의 아이누어인 나이 또는 베추( betsu)와 곶의 아이누어인 쉬리(shiri)를 포함한다. 그러나 그러한 아이누어 같은 이름들은 그 이남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야오이 사람들이 많은 조몬 지명들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아이누어는 일본 북단의 언어였을 뿐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즉, 홋카이도의 근대 아이누 언어는 규슈의 고대 조몬 언어의 모델이 아니다. 똑같은 논리로, 근대 한국어는 기원전 400년의 한국의 이민자들의 고대 야오이 언어의 모델이 아닐 것이다. 676년에 한국이 정치적으로 통일되기 전 수세기 동안 한국은 3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근대 한국어는 신라 왕국의 언어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그 이전 수세기 동안에 일본과 밀접하게 접촉한 나라가 아니었다. 초기 한국의 연대기들은 3국은 서로 다른 언어를 가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구려의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단어들은 그에 대응하는 근대 한국 단어보다 그에 대응되는 구 일본 단어에 훨씬 더 비슷하다. 한국어는 기원전 400년에는 더 다양했을 것이다. 기원전 400년에 일본에 당도하여 근대 일본어로 진화한 한국어는 근대 한국어로 진화한 신라어와는 매우 상이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이 언어에서보다 외양과 유전자에서 훨씬 더 닮았다고 하여 놀랄 일은 아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과학전문지「디스커버」지 1998년 6월호에서「일본인의 뿌리」라는 논문을 통해, "현재 일본인은 유전학적으로나 골상학적으로나 한국 이민족들의 후예임이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는 일본인의 기원을 한국인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본 건국의 뿌리는 바로 우리 한민족이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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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12-11-25 12:03
   
끔찍하네요...정말...
     
치우비 12-11-25 12:09
   
호로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이랄까 그런거죠
담배연기 12-11-25 12:09
   
난 이런거 볼때마다 일본이 지은 업보를 울나라에 씌우려는 느낌이 든다...
이게 피해망상인가..ㅠ
여하튼 느낌이 드럽...
     
치우비 12-11-25 12:10
   
한일고대사를 명백히 밝혀야 방숭이들 도발을 막을수 있습니다
조평신 12-11-25 12:37
   
재미있어서 정독했음
     
치우비 12-11-25 12:40
   
방숭이들은 입에서 피를 토하는 마서입니다 ㅋㅋㅋ
우끼끼끼 12-11-25 12:54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dong&wr_id=60393
이다큐 보시면 위 글의 야요이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어요
     
치우비 12-11-25 12:57
   
좋은 자료군요 참조하겠습니다^^
zzag 12-11-25 13:12
   
좋은 글이지만 고대 삼국의 언어가 달랐다는 서술은 틀린 이야기 입니다.
중국과의 외교에서 통역이나 필담사례는 있지만 삼국은 (선)조선을 계승한 나라들이고 통역이나 필담의 예도 없습니다.
     
치우비 12-11-25 13:15
   
오래된 논문이다 보니 고대 한국어에 대한 분석은 미진한듯 합니다
저도 다이아몬드 교수의 삼국언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게 안타까습니다
vvvv 12-11-25 16:05
   
이 저자가 쓴 총균쇠 개정판에 이 논문이 실려 있는데 재밌더군요
좀 두껍기는 한데 저자가 연구를 많이 한게 글에서 느껴짐
     
치우비 12-11-25 16:38
   
한국 사학계에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