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함흥시 출신으로 캐나다에서 활동한 수학자. 리 군을 연구하여
군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로 청년 시절 남대문시장에서 미군이 버린 수학 학회지를 주워 직접 학회지의 문제를 풀어내어 막스 초른 (Max Zorn)을 통해 미국 수학학회지에 논문을 낸 이야기가 있다.
1922년
함흥에서 출생했다. 1939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들어가 물리학과로 진학했다. 대학 시절 이임학은 ‘수학 천재’로 조선인 학생들 사이에서 전설 같은 존재였고, 물리학보다 예과 시절 마음에 맞던 일본인 교수들을 통해 알게 된 수학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식민지 교육의 일환으로 실용학문을 익히도록 유도한 탓에 경성제대에는 수학과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물리학과를 택했다.
졸업 후 조선비행기회사의 제품검사관으로 취업해 2차대전 징집을 피했다. 해방 후
경성대학 시절 김지정, 유충호와 함께 수학회의 투표로 교수에 임용되었으나,
국대안에 반대하여 사임한다.
김일성대학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하였으나 방북 기간 중 공산주의 북한 사회에 반감을 느껴 이후 서울대로 복귀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을 맞아
한강철교가 폭파되는 바람에 피란갈 시기를 놓쳐 서울에 남게 됐는데 북한의 요시찰 대상이라 이임학의 어머니는 “임학이는
의용군에 입대했다”고 둘러댔고 그는 숨어 지냈다.
1.4 후퇴 때 인천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를 거쳐 부산으로 피신했다. 전쟁 중에도 미국공보원(USIS)에 가서 수학잡지를 보면서 해외에 나가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1953년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에 편지로 입학 허가를 받아낸 그는 마침내 증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캐나다에서 박사 과정을 마친 후
여권을 연장하기 위해 주캐나다 한국영사관을 찾아갔는데 거기서 여권을 몰수당한다. “당신이 한국에 돌아갈 거라고 생각되어 여권을 없애버렸다”는 사유였는데, 즉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1]. 이에 캐나다 정부는 인도적 조치로 영주권과 시민권을 주었고 이임학은 계속 캐나다에 남게 된다. 이렇게 국가의 소환 명령에 불응한 이임학은 학술 교류를 위한 북한 방문 경험도 있었으며, 미처 탈북하지 못한 가족들의 소식을 들으려다 남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북한과의 서신 교환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까지 했다. 이후 이임학은 입국금지를 당하게 된다.
이후 이임학은 죽을 때까지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에 머무르며 연구를 이어나가게 된다. 상당히 커리어가 비슷한
이휘소 박사도 유신정권에 우려를 드러내며 국내복귀를 취소한 바 있는데
[2], 이렇듯 이들이 국내에 복귀하지 못한 것에는 정부의 영향이 있다.
[3] 물론 학문적 바탕이 좋은 해외로 건너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은 당시까지만 해도 딱히 연구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임학이 당시 해당 대학의 가장 유명한 연구자 중 하나였을 정도.
이후 1996년 대한수학회 창립 50주년 기념회가 되어서야 입국금지가 취소되었고, 그가 타계한 지 1년이 지난 2006년에 그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의 업적 중 가장 유명하고, 높이 평가되는 것은 리 군론
[4]에 대한 연구이다. 리 군(
Lie group)의 F4, G2는 그의 이름을 따서
리 군(
Ree group)으로 부른다.
언어유희 또한
예일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은 후 유한단순군을 연구하였다. 그의 연구는 유한단순군 학문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막스 초른을 통해 출판한 첫번째 논문 포함, 32편의 논문을 썼다. 그 중 2편은 수학계 최고 권위를 위시하는 수학연보(The annals of mathematics)에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