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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1-02 17:59
[기타] 조선의 무역량과 일본의 은수출량의 비교
 글쓴이 : 자하드경제
조회 : 6,555  

가입후 첫글이네요 ^^
해방후 한국의 통사를 처음 체계적으로 작성했던 인물들이 매우 불행하게도 일본인들이고 
그들에게는 식민지모국이라는 뚜렷한 입장에 따라 제국주의를 옹호해야할 프로파간다가 모든 근대적 영역에서 절실 했기에 비례하여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애초에 역사를 조작 했다 혹은 방향성을 잡았다라는 결론이  결코 틀린 판단은 아닐것 입니다. 이후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그들에게서 교육받은 신생 대한민국의 초기 역사학자들이 자신들의 일본인 스승들의 연구를 감히 부정하거나 실증적 연구없이 같은 한국인들에게 교육 시키고 일부의 사실을 전체로서 과장하여 결론적 인식을 통하여 "조선"이라는 국가를 관념적으로 이미 규정하여 두고 바라 보았다라는 것도 분명하고요 하지만 정작 2000년대이후 이들에게서 자유로운 젊은학자군이 생겨나고 이들이 화두에 맞게 실증적 연구를 통하여 조선을 바라보자 그동안의 사실 생각하면 대표성 퓨리스틱이라는 우리 역사를 지배해 왔던 오류?혹은 막연한 인식들이 부서지면서  새로운 역사적 자료들이 괄목할 만큼 밝혀졌지만 이러한 자료가 워낙 전문적이고 학자군에서만 논문의 형태로 교환되기에 그러한 역사적 성과가 대중에게 전달되고 인식되기 까지만 아직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듯 싶어 부족한 저라도 조금이라도 양상을 전달하기 위해 한번 작성해 봅니다. ^^

우리가 중세 일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유시민의원이 지적한 우리 아버지-할아버지 세대가 가지고 있는 난민촌정서 즉 북한을  허무맹랑하게 두렵게 바라보는 마음이 그들에게는 존재하지만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다면  반면 대한민국사람이라면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또다른 정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를 식민지정서라고 하는데 즉 우리를 지배했던 이에 대한 근거없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기원은 아무래도 임진란을 기점으로한 중세부터에 대한 기억이 출발일듯 한데,오늘은 첫번째로 우리의 상식인 조선의 전체 경제규모는 어떠했는가를 생산량과 무역량을 통해 일본과 비교하여 잘못된 인식에 수정을 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이글은 이미 몇달전 kj클럽에서 작성하여 조회수가 이례적으로 2000회가 넘고 200게에 달하는 일본인들의 발광을 통해 다루었던 문제인데 당시 일본인들이 폭주했던 모습이 다시 생각이 납니다.

(1)일본의 은수출량에 대한 출처는 서울대학교 역사학과의 양동휴교수님의 논문(2013)
(2)조선의 대청무역량은 이철성교수님의 조선후기 대청무역사 저서입니다.(2000)

16세기 중반 조선의 2명의 노비가 개발한 연은분리법 즉 은광물에서 잡물들을 제거하고 순수하게 은만을 출수할수 있는 방법을 개발후에 이러한 기술이 일본에 전수되어 그동안 은광개발이 활발했음에도 생산량대비 순은의 소출량이 적었던 일본에 현저한  생산량에 대한 획기적인 개선이 이루어 집니다.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조선에서도 알고있어  왕조실록 에도 이러한 한탄성 기록이 남아있고 그리하여 역사에서 흔히 일본의
1_00000.jpg

은수출이 한때는 전세계의 1/3을 차지했다라고 하는  
의미있는 기록이나 주장도 나오지만 이러한 부분이 아닌 전체적 맥락을 보면  또다른 양상이 펼쳐집니다.

1 (1).jpg



위표는 16~18세기 전세계 금은의 수이입량을 대륙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그림들로써
17세기부터 일본의 은광산이 정점에 도달했던 시기의 연편균 수출량을 보여준다 연간 평균 59300kg
즉 약 59.3ton으로써 이를 당시 모든 경제적 중심의 지표가 되는 미곡 즉 쌀로 환산한다면 
약 에도 전중기 은 55돈=4천문/쌀 1.5kg(1되)=100문 => 즉 쌀 1석(150kg)은 
약 silver 132.5돈=쌀 150kg  즉 1석은=은132.5돈  으로 가정했을시
132.5x3.75=496g 약 0.5kg                       종합하면 1석=은 0.5kg 

60ton = 60000000g 약 6000만g/500g=12만석을 막부에서 수출로 벌어들임 (최전성기)
그리고 지배층이 이 돈으로 교역한 곳은 조선과 중국으로서 교역품은 대개 조선의 목화와 인삼
중국의 차와 비단등으로 교환하였음 물론 당연할수 있지만 교환 주거래품이 사치품으로써
막부가 그 수입을 어느 용도로 사용했는지를 알수있고

그리고 16세기부터 사실살 광산이 고갈되어 수출량이 급감하는 18세기 초까지 일본이 수출한 총량은
1560~1640=9450ton/1641~1708=3750ton 으로 전체 약  1만3200ton 규모로 이는 같은시기 전세계
은생산량에 약 1/10의 규모


조선은 말 그대로 상공업을 억제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권장한것도 아닌것은 분명
그리고 그 이유에는 뚜렷한 목적의식도 존재했고  옳음도 존재하여 양면성이 있음
조정에서 본격적으로 대청무역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병자호란이후에 청나라와 군신관례를 맺고 매번 사신단의 파견과 접대 특히 파견을 위해 필요한 경비 즉 당시의 국제 화폐인 은에 대한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서였고 이를 위해서는 무역이 불가피하였음 이미 고려때부터 고려인삼을 통해 아시아에서 조선의 인삼은 최고의 한약재로 취급되어 중국과 일본등에서 끊임없는 수요가 존재하여 문제는 조선의 결단이지 판매처가 문제가 되지는 않음 처음에는 인삼무역대신 모자의 판매를 통해 해결하려고 연간 80만개의 모자를 수입하여 대체했지만 간단히 말해 돈이 되지않으니 결국은 인삼으로 가고 마침 17세기 전라도에서 인공재배법이 여성에 의해 개발되고 기술이 진보하여 장시간보관이 가능하고 효능을 높이는 홍삼개발법으로 전환되어 엄청난 양의 무역이 이루어짐 이를 흔히 팔포무역이라고 칭하는데  그 무역의 규모라는 것이 전성기때는 공사무역을 통해 약 연간 8만근까지 이루어지고 평균 공사무역을 합해 연간 4만근 내외에서 이루어짐

1(1).jpg

당시 홍삼의 1근당 가격은 1캐티당 약  접경에서 은화 100냥에 거래되었고
이것이 다시 북경등 중심도시에서 거래되면 약 2~4배 까지 상승했습니다.
당시 은화1냥이 동전 3.5~4냥이었고 쌀 1석의 가격이 7냥내외였음을 고려하면 
홍삼1근= 약 55석의 가치를 가짐 x 8만근=1600만석(최전성기) 평균800만석(220만석)의 무역규모  


#이사벨라 버드여사의 19세기 말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이라는 저서에서는 홍삼을 조선의 가장 값비싼 무역품으로서 소개하면서 그 가격을 1바구니당(?) 1만4200~2만1000$로 기록하는데 이는 
당시 일본인의 연간 생활비가 25~30엔이고 1$당 약 1엔이라는 공식환율로 볼때 어느정도의 고가품인지 알수있게 하며 덧붙여 이에대한 조선의 허가량도 기재했는데 약 1만6000근(캐티)라고 적고있다.
(신복룡역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2000년 pp290~291)

애초에 생산량도 후에 게시하겠지만 교역량에서 감히 비교가 되지 않는 규모입니다.
특히나 광산이 사실상 고갈되는 17세기 후반이후 일본의 주요 수출품은 일부 광산물질과 건어물 이라고 
일본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기술하는 부분이고요. ^^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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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phan 15-01-02 18:24
   
잘 보았습니다 .
     
자하드경제 15-01-02 18:26
   
궁금하신 부분이나 의문이 드시면 언제든 질문주세요 ^^
없습니다 15-01-02 19:11
   
일본의 은 수출량 연간 60톤,
조선의 홍삼 수출량 연간 40000근 x 은100냥= 4,000,000냥=은 150톤,
이렇게 되니 단순계산으로 조선이 일본보다 2.5배정도 많게 되네요.

근데 조선은 물론이고 에도정부도 철저한 쇄국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이 무역량의 차이가 내적역량을 반영한다고는(다시말해 조선의 상업물량이 일본의 2.5배가 된다는) 보기 힘들죠.

은산출량 감소후에 일본은 구리를 대량생산해서 외국과의 교역에 사용합니다. 그후 구리도 고갈되자 외부무역량이 급감하게 되죠.
     
자하드경제 15-01-02 19:20
   
일단 무슨 말도 안되는 말씀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참 참신한 발상인데 화폐의 명목성은 전혀 배제한체 단순히 은 100냥을 단순질량으로 계산을 하다니요 지금 무엇을 하시는 것 입니까.애초에 그렇다면 미곡으로 환산한 시세가 성립이 되지 못하는 문제요 지금 진지하게 댓글을 다신 것 입니까? 그리고 애초에 당시 모든 물산의 중심은
미곡이며 이것에 의해 절대량이 비교되어야지 참..재미있네
          
없습니다 15-01-02 19:21
   
예? 은 1냥이 0.0375kg이니까 4백만냥이면 150톤이 맞는데요?
               
자하드경제 15-01-02 19:23
   
화폐의 명목성이 다르지 않습니까 조선과 중국의 교역은 화폐로 이루어진 것이고
일본의 은 수출은 원재료로 이루어진 것이고요

즉 일본은 수출된 은의 단순 중량이고
조선과 일본은 자국의 통화단위로 이루어진 것이고요
                    
없습니다 15-01-02 19:24
   
조선과 중국의 교역이 은화로 이뤄졌단 주장입니까?
그렇다면 그건 님이 잘못알고 있는겁니다. 조선과중국 교역시 말하는 은의 냥은 은의 무게를 뜻합니다.
                         
자하드경제 15-01-02 19:25
   
님 -_-

은1냥=동전 3.5~3.7냥 인데 대체 무슨 황당무개한 주장을 지속하여 하시는 겁니까.
                         
없습니다 15-01-02 19:27
   
다시 한번 알아보세요. 애당초 조선시대에 은화 유통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당연히 은과 동전과의 교환비율은 수시로 바뀌게되죠.
                         
없습니다 15-01-02 19:28
   
괜히 오해할까봐 이야기하는데 은이 전부 다 들어온게 아니라 그만큼의 수입품으로 상계되기도 했습니다.
                         
자하드경제 15-01-02 19:29
   
중국난방이군요 그래서 그 은화 즉 중국과의 사신비용을 대기위해 조선이 허용한게 홍삼무역과 모자무역 아닙니까. 국내에서의 통용과 관계없이
자하드경제 15-01-02 19:27
   
애초에 그렇다면 중국과 교역하면 쌀 350만석을 가질수 있는데 일본이 이를 물리치고 12만석에 만족했다라는 주장을 하시고 싶은 겁니까...에유~
     
없습니다 15-01-02 19:29
   
지금 계산 해봤는데 님이 한 계산에 따르면 조선에서는 쌀 한석에 은2냥이되고 일본에서는 쌀한석에 은 12냥이 되네요. 좀 이상한데요?
          
자하드경제 15-01-02 19:31
   
화폐의 명목성에 대해 개념부터 잡으시기 바랍니다. 어디서 말도 안되는 걸 기반으로 이야기 마시고요 각 국가별 각각의 통화가 괜히 존재하는게 아닙니다.
정말 살다가 이런식의 주장은 처음이라 황당스럽기 까지 하군요
자하드경제 15-01-02 19:33
   
은화1냥 이라고 했습니다, 화 즉 화폐 단순히 화를 배재하여도 어떻게 은=과 구리불순물의 교환비가 3.5배에 그치겠습니까...
     
없습니다 15-01-02 19:34
   
찾아보니 조선시대에 수입한 왜은도 냥으로 계산하네요. 무게단위가 맞습니다.
          
자하드경제 15-01-02 19:35
   
은화라고 했습니다, 은화요 은1냥이 아니라 은화1냥

냥->전->문(푼) 화폐의 단위입니다.

또한 조선시대 대마도를 통한 중계무역은 1관 입니다 단위가

관(3.75kg)->근(600g)->냥(37.5g)->돈(3.75g) 이것이 무게의 단위구요
자하드경제 15-01-02 19:43
   
기본적으로 조선의 화폐 단위는 상평통보 1개가 1푼 10푼은 1전  10전은 1냥 그리고 3.7냥은-은전1냥입니다. 즉 100푼=1냥 은전1냥은=370푼 상평통보 370개입니다.
자하드경제 15-01-02 19:46
   
추가로 오해가 존재하여 이야기 하면 일본의 경우 60톤은 어떠한 명목성 이 존재치 않는 순수 중량으로 만약 여기에 더해 화폐로서의 제반비용 즉 유통-가공 을 통한 비용을 제외하여 시세로 비교하면 애초에 이야기한 12만톤보다 통용가치가 더욱 줄었을 것 입니다.
없습니다 15-01-02 19:47
   
확인해봤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칭량은화(稱量銀貨) 라고 해서 은의 무게를 단위로 사용했습니다.
은 4백만냥이면 은 150톤이 맞습니다.
     
자하드경제 15-01-02 19:50
   
님 칭량은화법이 사용된건 주로 고려초기 이고 이도 말기 넘어가면 중국의 돈을 수입해서 유통시킨 형세입니다. 나아가 말 그대로 17세기 후반부터는 법전인 상평통보가 발행될만큼 화폐의 명목성이 담보된 화폐사회였고요. 당장 네이버에 쳐봐도 존재하지 않는 내용으로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원하신다면 저자의 저서 그대로를 스캔하여 보내드릴까요?
더둔다나 주요한 물산의 교환은 중국은 돈과 한국의 홍삼인데 대체 조선이 기준이 되는 이유는 또 무엇이고요?
          
없습니다 15-01-02 19:53
   
상평통보는 동전이죠. 은100냥할때의 은 100냥은 3.75kg의 은을 뜻하는게 맞습니다.
               
자하드경제 15-01-02 19:56
   
http://blog.daum.net/udongjib/188
http://blog.daum.net/udongjib/196

조선시대 통용된 은화입니다. 이제 그만 제발 정신차리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시간도 많은데 계속 우기시기 바랍니다 발상이 독특하셔서 재미있습니다.^^
                    
없습니다 15-01-02 19:58
   
구체적인 수치는 다르지만 중국 역시 은은 무게를 단위로 썼습니다. 조선이라고 달랐을리는 없죠.
===
국내외적으로 확산되자 중국의 관리들은 이미 무력해진 아편 칙령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아편 수입을 합법화하고 세금을 부과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자 합법화는 중독을 만연시킬 뿐만 아니라 국민의 도덕성과 건강을 손상시키므로 강력한 제재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게 일어났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이보다 더욱 심각하게 여겼던 점은 아편 수입으로 인해 막대한 양의 은이 국고에서 유출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은본위제를 실시하고 있는 중국의 은 보유액은 1793년 7000만 냥(약 260만 킬로그램. 1냥은 대략 37.5그램이다)에서 1820년에는 약 1000만 냥으로 줄어들 정도로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었다.
 =====
                         
자하드경제 15-01-02 20:02
   
전근대국제사회 더군다나 국제교역에서 은화폐의 명목성은 담보되지 못하는 문제입니다.
당연히 외국과의 교역에서는 은화를 다시 물용화폐의 기능으로 재창조하기 위해
단순가공 형태로 전화하며 그 측정도 마찬가지 일뿐입니다, 좀 기본을 다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은화를 링크해 드렸는데 여전히 전혀 다른 나라의 사례를 들여와 이번에는 우기기를 시전하시는군요 ^^
                         
없습니다 15-01-02 20:04
   
꼭 그렇게 믿고싶으시다면, 조선시대에 중국과의 교역에 사용한 은화가 어떤 화폐인지 그리고 거기에 쓰인 냥이라는 단위가 실제 무게는 얼마나 되는지 알아오세요..
                         
자하드경제 15-01-02 20:07
   
알아오라는 문장이 재미있군요
스스로 알 생각은 하지 않으시는지요?
                    
없습니다 15-01-02 20:01
   
그리고 님이 링크한건 별전이잖습니까. 별전은 기복이나 소원성취같은걸 빌기위해 특별히 만든 화폐지 시장용으로 만든 통용전이 아닙니다.
                         
자하드경제 15-01-02 20:07
   
별전은 상대적인 통용이 적을뿐 충분히 화폐로서 가치를 인정받으며 주로 비축전으로 통용되었던 수단입니다.
없습니다 15-01-02 20:10
   
찾아보니 자료가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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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경국대전』은 저화와 포화(布貨)를 국가의 공식 화폐로 삼고 품질과 규격을 정해놓았다. 포화의 1필은 폭 8촌(37.4㎝), 길이 35척(16.35m)의 5승 품질이었다(1승은 80가닥). 16세기에 이르면 이러한 규정을 전혀 지키지 않아 직물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추포가 화폐로 사용되었다. 매우 성기고 거친 포라는 뜻인데, 아무 쓸모가 없는 물건이 화폐로 통용됐던 것에서 화폐에 대한 태도가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1592~1598)으로 명나라 군대가 원군으로 왔을 때 군자금으로 은이 대량 유입되었다. 중국은 은을 조세로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에서는 은화를 주조하지는 않았으며 민간에서 은의 순도와 무게를 평가하여 사용했다. 중국에서는 15세기에 동전 주조가 중단되고 국제수지 흑자와 금과 은의 가격 차이로 인해 은이 유럽과 일본에서 대량으로 유입되어 화폐로 광범하게 사용하게 된 것이다. 지역 내에서는 동전, 지역 간 그리고 국제무역에는 은이 주로 사용되었다. 일본에서는 중국의 동전을 수입하여 화폐로 사용했는데 14세기 중엽에 이르면 중국 동전이 전국에 유통되었다. 중국에서 15세기에 동전 주조가 정지된 후에 쌀이 화폐로 사용되는 체제로 회귀하고 금과 은이 화폐로 사용됐다. 17세기 전반기부터 자체적으로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시대엔 사무라이는 금, 상인은 은, 일반인은 동전을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이를 삼화(三貨)제도라고 한다. 이와 함께 지방 영주가 발행한 지폐인 번찰(藩札)이 지방에서 통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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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습니다 15-01-0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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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대표적인 은본위제 국가로는 청나라와 1935년까지 중화민국이 있었다. 청나라는 소액 거래에는 제전(制錢)이라고 불리는 관에서 만든 동전이 유통되었지만, 고액 거래에 있어서는 은원보(마제은, 馬蹄銀이라고도 함)이라고 불리는 고품질의 은괴가 무게로 채택되었다. 은원보는 정부가 주조하는 것이 아니라 전장이라는 전통적인 금융 기관에서 마음대로 주조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화폐라기보다는 은덩어리에 가까운 것이었다. 청나라 말기에는 양은(멕시코 달러, 멕시코 실버)와 일본 1엔 은화와 거의 같은 은 함량은 원래(단위 원)도 발행되어 중화민국에서는 본위 화폐로 사용했다. 이후 세계 공황에 따른 금융 시장의 혼란에 의한 은 유출로 1935년에 은본위제를 포기(폐기개원)(관리 통화제도에 따라 법정 화폐 도입)했기 때문에 결국 은본위제를 채택하는 나라는 거의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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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드경제 15-01-02 20:1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5&aid=0000403545

그렇게 성의가 없으시다면 저도 같은식으로 대화를하죠
기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청나라의 침몰배에서 은괴/은화가 구분되어 있습니다.
          
없습니다 15-01-02 20:15
   
지름 48mm에 무게 24g로 멕시코라는 문자가 찍혀있는거요?
               
자하드경제 15-01-02 20:23
   
청나라의 은화가 아니었군요 ^^
뚜리뚜바 15-01-02 20:12
   
두분 서로 의견 나누는 모습은 보기 좋습니다만;; 의견만 나누세요;; 서로 비아냥거리면서 상대방 기분 얹짢게 하는 어투는 제3자가 보기에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르치려고 하지 마세요;; 두 분다 알면 얼마나 아신다고 조선시대 살아보신거 아니면 가르치려하지 마십시오. 그냥 확인한거 본거 알리고 의견나누려고 하십시오.
     
없습니다 15-01-02 20:17
   
네 그만하죠. 어차피 결론은 난것같으니..
          
자하드경제 15-01-02 20:24
   
결론이 참 쉽게 나시는군요. 아직 이야기 할게 많은데
자하드경제 15-01-02 23:21
   
한참을 기다려도 답변이 없으시네요.음 ~

국제통화인 은을 말씀하신 단순칭량으로 하여도(내부 수급에 따른 가치의 변화를 배재하고)
조선의 평균 은의 수이출량은각국의 전성기시절을 통해 비교하면 1근당 약 525냥으로 가정시 1냥=37.5g x 525= 19687.5 약 19.7kg이고
여기에 8만을 다시 곱하면=1576000kg 약 1578ton으로 일본의 은수출이 절정기시절 60ton의 약 25배가 되는수치입니다. 만약 글을 보신다면 칭량대비 교역액은 그만이야기하고 화폐 즉 명목적 가치를 함유하고 있는 형태에서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소 싶습니다. ^^
Atomos 15-01-03 01:12
   
위에 계산 대로면

100문 = 1되(1.5kg)

은 55돈 = 4000문(40되) = 60kg
은 137.5돈 = 쌀 1석(150kg)
137.5 x 3.75 = 515.625g = 대략 0.5kg = 쌀 1석(150kg)

은 1kg = 쌀 2석
60,000kg = 12만 석


밑에 은 1근 = 525냥(동전)
쌀 1석 = 7냥(동전)으로 따진 계산으로는

은 1근 = 16냥(무게) = 525냥(동전)
은 1냥(무게) = 525/16 = 32.8125냥(동전) -> 대략 32냥(동전)
은 1냥(무게) = 32냥(동전) = 쌀 4.5석

은 60,000kg/0.0375kg(1냥) = 160만 냥(무게)
160만 냥(무게) x 32냥(동전) = 5120만 냥(동전)

5120/7 = 대략 731만 석

대략 60배 가까이 오차가 나는데 이건 시세 차이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뭔가 자료상에 오류가 있는 듯
일단 뭔가 주장을 설파하려면 정리를 해놓고 하셔야지
계산도 전부 틀리고 본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하네요

한눈에 볼 수 있고 한눈에 이해가 되는 자료여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길게만 죽죽 늘어놓는다고 의미가 있는 게 아니죠

조선 포삼도 4만에서 8만까지 왔다 갔다 하고..
괜히 읽어가지고 계산까지 해봤는데 시간 낭비였네요
     
자하드경제 15-01-03 02:12
   
은1근이 아니라 홍삼1근입니다.  ^^
정신차리시기 바랍니다.
홍삼1근=북경에서의 가격이 은화525냥
실제로 이러한 가격은 19세기 후반까지 이어져 팔포=한바구니(홍삼8뿌리)
의 가격이 비숍의 저서에  1만4200~2만1000$이고 당시 일본인의 1년생활비가
25~30엔 1$=1엔 입니다.

미가는 당시 각국가의 법정미가를 기준으로 했기에 각 국가의 품별 생산량과 변동에 따라 다를수 있으며 또한 현대의 무역체계를 당시의 무역거래와 동일시 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대단한 무리가 따르는 행위입니다.

어찌해서 초점이 당시 비축전으 기능을 하고있던 은화로 모아졌는지 쉬히 납득이 가지 않지만  경제활동의 중심이었던 물품은 어디까지나 미곡즉 쌀이 었습니다, 그 교역량을 비교하려 인용한 은에 대한 논쟁은 주요한 지점이 아닙니다.
          
Atomos 15-01-03 06:51
   
그런 얘기였다면
'1근당 약 525냥으로 가정시 1냥=37.5g x 525= 19687.5 약 19.7kg이고'
여기서 1근이라고 하는걸 '홍삼 1근'이라고 제대로 표현 하셨어야죠
'1냥=37.5g x 525'이 아니라 '525냥=37.5g x 525'이라고 해야 맞는 거고요

그리고 은 얘기를 해서 은 1근인줄 알고 그리 얘기한 건데
뒤에 식도 너무 터무니 없어서 뭔가 착오가 있었던 줄 알았더니
'냥'이 동전도 아니고 은화도 아니고 갑자기 무게라뇨?

1500톤이니 뭐니 하는게 지금 중국이랑 은으로 거래를 했다고 하는 건데
처음에는 은화 은화 하더니만
갑자기 525냥에서는 동전도 아니고 은화도 아니고 냥(무게)이 됐네요?
도대체 중구난방에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갈피를 못 잡겠네요

위에서는 은화 100냥이라고 했다가 밑에서는 '은' 525냥..
그리고 북경에서 판매되는 가격으로 계산한 것이 어떻게 전부 조선의 은 수이출량으로 되죠?
무리한 추정 어쩌고 하는데 님의 주장이야말로 무리 그 자체인데요
은화랑 은이랑 다르다고 했으면서 왜 말이 바뀌는지 모르겠네요

처음 일본 12만 석 계산할 때
쌀 1석 = 은 137.5돈 = 은 13.75냥이라면
(쌀 1석 = 동전 7냥)
은 13.75냥 = 동전 7냥이 됩니다
은화 2냥 = 동전 8냥이니까 대략 7배 차이가 나네요
은이랑 은화랑 분명히 다르다는 거죠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략 은 7냥 = 은화 1냥 정도 되겠네요

근데 문제는 이 계산으로는 1500톤이 아니라 실제는 10000톤이 넘어야 돼요
얘기 나온 그대로 100냥 하는 것이 북경 가서는 500냥 하는 게 당시 시세인데
이렇게 고무줄로 되는 걸 갖고 거기다 곱나기 나누기 뻥튀기를 하면 무슨 얘긴들 못 나올까요
               
자하드경제 15-01-03 10:58
   
당신이 중구난방에 조변석개 입니다
칭화량은 그것을 주장하는 없습니다님의 주장에 맞추어 이야기 한 것이고
그러한 기준으로 하여도 2.5배가 아닌 25배라는 예시를 든것 뿐입니다.
어째서 그것도 파악을 못하고 자주 무지한 질문만을 해대는지 밑에분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사람이 쓴 글을 이해한다 이전에 제대로 읽지 않는다가 맞을것 같습니다.
                    
Atomos 15-01-03 14:34
   
은화 1냥 = 은 7냥 이라는 식에서
제가 10000톤이 넘어야 한다는 것은 은화로 거래를 했을 때의 은의 무게를 말하는 거고요

아무튼 쌀 1석에 은 13.75냥(은화 말고 단순 은의 무게)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시세로는 은 7냥(262.5g) = 은화 1냥
은화 1냥 값이 은 250그램이라는 말도 안 되는 식이 나오니까요
은화에 비해 은의 시세를 너무 낮게 잡아서 계산한 것 같다는 거죠
여기서부터가 잘못된 건데 다른 걸 갖다가 2.5배가 맞네 25배가 맞네 얘기해서 뭐하나요?
                         
자하드경제 15-01-03 16:09
   
그러니까 그식은 제가 주장한것이 아니라는 말 입니다.
찬찬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애초에 주장한적이 없는데 멋대로 산출해놓고 틀렸니 마니 하는것도 우스운 일이고요
혹시 각국의 실질물가와 화폐가치에 대한 차이를 동일선상에서 그대로 비교해놓고 혼자서 계산하면서 오류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실수도 있고요? ^^
                         
Atomos 15-01-03 17:06
   
은 55돈=4천문/쌀 1.5kg(1되)=100문 => 즉 쌀 1석(150kg)

은 55돈 = 206.25g = 쌀 60kg
은 200g으로 쌀 0.5석밖에 못 산다는 게 말이 됨?

은화 1개에 20g 이라고 치면 은화 10냥 무게가 200g이 되는데 (순도는 비슷하다 치고)
홍삼 1근 = 쌀 55석 = 동전 400냥 = 은화 100냥, 은화 100냥 = 은 2kg이 된다면
일본 은 2kg으로는 쌀 5석을 살 수 있는데 조선 시세로는 쌀 55석이 돼버리는데

물가와 화폐가치를 따지더라도 이건 너무 심한 차이라는 거임
은을 거의 은화의 10분의 1 수준으로 평가해놓고 말하니까 저렇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죠
                         
자하드경제 15-01-03 19:21
   
그럼 그것도 그대로 인정하고 답변을 드리도록 하죠
위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과거 국가간의 재정거래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교역거래로서
인삼을 예를 들어 이야기하면 18세기 중반 미국산인삼을 청나라로 매매를 주도하였던 네널란드 동인도회사의 차익율은 1500%입니다. 아셔야 할것은 재정거래의 역사와 통교간의 제약이나 내부 수급량에 따라 과거 장단기간에 그 가치의 차가 크게 벌어지는 일은 결코 드문 현상이 아니었으며

한가지 오류를 지적하자면
그 비교의 기준이 중국내의 물가가 아닌
각국의 당시의 미곡환산액 을 기준으로 유통량을 단순 환산했다는 것 입니다.
즉 은의 반출과 특정거래품의 가격이 다시 인삼과 미곡이라는 중심물품을 위주로 계산되었고 이는 단순한 2중거래가 아닌 3중거래를 통한 단순계산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설명까지 일일이 해야 하나요?

님 제가 글을 작성할때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이의제기가 가능할때 그리고 그 제기가 지속가능할수 있는 이유는  글을 독하는데  있어 문제점을 인식할 정도면 그 문제점 인식속에 기본지식이나 배경이 이미 존재한다는 전제하게 가능한 것이지 이러한 것이 없이 일일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든 부분에서 이의를 재기 한다면 그때마다 제가 밑에분과 같이 장문의 글을 남겨야 할까요?
                         
Atomos 15-01-03 20:21
   
조선 홍삼을 은화냐 은이냐 하는 문제 때문에 더 복잡해지는 거 같은데
홍상 4만근이라 치고 은100냥(무게)으로 계산하면 은 150톤이 맞는데요
님이 무게로 계산한 건 북경 시세 5배, 8만근 해서 10배 해서 뻥튀기 된 거고요
칭량은화 쓰다가 그 대신에 나온 게 상평통보라고 알고 있는데
당시 조선이랑 중국이랑 도대체 어떤 은화로 거래했다는 건지..

자료 찾아보니까 에도시대 쌀 1석에 은 100돈(100문) 넘는 시세는 거의 없고요
50선에서 놀다가 1800년대 중반 넘어서야 100문 이상이 되는데 (1858년 이후)
메이지 시대가 되면 쌀 1석에 은 1000문까지 폭등을 하고 명목화폐를 쓰기 시작하죠 (1868년부터)
그래서 쌀 1석에 137.5돈이라고 고정해놓고 계산하는 자체부터가 잘못된 부분입니다
쌀에 비해 은(칭량은화)이 폭락하고 있는 상태의 값어치로 미곡량을 계산하면 안 되죠
                         
자하드경제 15-01-03 22:16
   
어차피 합의점이 없을 듯 하니 다른 논쟁은 차치하고
계산하면 안된다는 부분은 어느시점의 가치로 따질 것이냐인데
안된다라고 하는 선언적 규정은 주제가 넘은 발언입니다
없습니다 15-01-03 01:56
   
조선시대 홍삼무역에 대해 조금 조사해보았습니다.

일단 홍삼수출량은 모든 자료가 동일합니다. 1797년 120근으로 시작해서 1849년과 1851년 4만근을 정점으로 하락하여 그후로 대체로 2 만근을 전후로 움직입니다.

그다음 홍삼의 가격. 이에 대해 윗글에 나와있는 변경에서 은100냥 북경까지 가면 은500냥이라는 가격이 나와있는데, 이건 정조 무오년 즉 1798년의 가격입니다.(『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권 3, 무오년 12월 27일) 홍삼 수출양이 한해 120근일때의 가격으로 이걸 일률적 으로 19세기 전반에 걸쳐 적용하는건 무리고, 다른 방법으로 가격을 추정 할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객관성이 있는 방법으로는 당시 조정에서 거두고 있던 포삼세의 변동을 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포삼세의 변동을 보면 1802년 1근당 동전 200냥이고 1811년 120냥, 1832년 12.5냥, 1841년 5냥, 1857년 6냥, 1867년 14냥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일정률을 기준으로 하는 세금의 특성상 1802년의 200냥과 1849년의 5냥을 비교하면 1/40입니다. 같은 비율로 계산해보면 무오년 은500냥이 은12.5냥이 되며 1849년 4만근 x 12.5냥 = 은50만냥= 은 18.75톤이되고 이게 최대치입니다.

19세기 전반에 걸쳐 인삼가격이 폭락한것은 조선의 수출량이 300배로 늘어난데다가 그것보다 10배 많은 미국인삼이 중국에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미국인삼은 조선인삼에 비해 효능이 낮아 가격이 조선인삼의 1/5밖에 안되었지만 인삼의 수요중 상당부분을 잠식해서 인삼가격이 떨어질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계산한 은18.75톤이 지하드경제님이 계산한 은1,578ton보다는 훨씬 사실에 가까울거라고 봅니다. 한해 1,500톤의 은을 수출한다면 당시 세계 최강대국에 들어갈테니까요.

ps1, 대항해시대에 스페인으로 쏟아들어져왔다라고 표현하는 신대륙의 은 유입량이 1500년~1650년 150년동안 16,000톤이었습니다.
ps2, 여기서 계산한건 공무역만이고 밀무역도 있었으니 그 부분은 추가될 수도 있습니다.
ps3, 1867년에 포삼세가 올라간것은 그때쯤 미국 산삼이 고갈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삼가격도 올라갔습니다.
     
자하드경제 15-01-03 02:37
   
무리한 추정의 계속된 남발이군요.
애초에 홍삼의 가격은 19세기 말기에도 비숍의 증언대로 1바구니(팔포를 명기하는듯 하군요)
의 가격이 당시 미화로 1만4200~2만1000천$이고 당시 조선조정이 허가거래량을 1만6000천근로 명기하고 있는데 점점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아는 바가 없이 그때그때 자료를 찾아서 입맛에 맞는 글들만 올리는 식인데..음

1.일정률을 기준으로 한다는게 대체 어느 전근대 국가의 세수취세 방식인지 알수가 없지만
명확히 홍삼세수의 변화는 무역량이 증가함에따라 비례하는 밀무역의 방지를 위한 세금의 현실화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을 무슨 되지도 않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인지요?
말대로 하면  1802년과 1849년 사이에 무려 화폐가치 하락률이 40배에 달했다는 것인데 같은시기 미곡에 대한 동전의 교환비는 달라진것이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발상을 한다는 자체가
역사적 배경지식이나 토대가 전무한체 다시한번 말하지만 그때그때 필요한 지식을 입맛에 만 맞게 편취하기 때문입니다.

2.19세기 전반이면  홍삼무역에 따른 대청무역량이 절정에 시기인데 그 시대에 미국산 인삼이 쏟아져 들어왔다는 것 입니까? 혹시 19세기 후반기에 따른 변화와 그럼에도 가격이 최상급으로 유지되던 조선인삼에 지식이 없는체 막연하게 머리속에서 맴돌던 겉지식을 대충 말에 끼어맞춘신것은 아닌지요?

3.포삼무역의 공식적 정부의 허가가 120근일때 라는 것은 그 전의 밀우역과 사신무역량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발언 같습니다.  좀 더 자세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인삼의 생위주기는 최소6년임으로 애초에 전농장에서 수요가 증가한다고 5000근이 몇년만에 4만근으로 증가할수 없는 구조입니다,즉 세금의 현실화와 거래량의 증가 허용으로 인한 밀무역에서 공무역으로 편입으로 봐야할 문제를 말도 안되는 비유방식을 들이대 가면서
화폐가치가 40배 낮아졌다고 하는 주장은 어떠한 역사적 자료로로 나와 있지도 않으며 증명되지도 못할 것이니 그만 하십시요
(일정률? 이라는게 무슨 의미인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세수의 일정량의 유지? 라고 생각해 봐도 역시나 뭘 말하자는 건지 알수가 없습니다)

4.계속 지적하지만 사람의 글을 성실히 읽거나 이해할 노력이 부족해 보입니다.
무역은 화페가 아닌 교환형태가 주로서 당시거래액을 기준으로한 단순 환산이지
연간 은 1500톤이 국내에 유입되었다고 발언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은1500톤의 환산 미곡량은 대략 2000만석으로 이는 당시 중국 강북과 강남일부의 평야지대에서 생산된 생산물 10억석의 대략 2%내외로 단순한 비축전의 의미로 사용된 은이 아닌 전체 경제규모에서(특히 농업부문의 생산량) 보아야할 문제입니다.

제발 기본이 없어 무리한 주장은 그만 하시기 바랍니다.

님 그리고 마지막으로 참..보고 있으면 재미있어서 그런데
은1냥이 말 한대로 칭화량이면 대체 은500냥이=12.5냥이 된다는게 무슨 말씀인지요?
대체 자신이 현재 어떠한 기준과 무슨 지식을 기초로 하여 이야기를 전개한다라는 맥락을 짚고 계시긴 한지요?
에유~~ 다음에는 어떤 댓글이 달릴지 궁금합니다 ^^
          
없습니다 15-01-03 03:36
   
수출량이 300배로 늘어난 대신 가격이 1/40로 폭락했다는 말이 이해가 어려운가요?

내가 몇시간 조사해본결과 쉽게 알아낸 미국인삼에 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는것 같고.은의 양이 당시에 어떤 가치를 가졌는지에 대한 개념도 없는것 같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근거가 비솝여사가 쓴글인가 본데, 거기에 나오는 바구니라는 단위가 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걸로 홍삼가격을 계산하려는건지.. 더구나 이경우에는 19세기말의 은과 미국달러와의 교환비까지 알아야 할텐데요?

시스템클럽에서는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여기서는 이렇게 앞뒤가 안맞고 추정투성이의 글로는 인정받기 힘듭니다. 정말 진지하게 주장하려면 논리를 다시 세워서 제대로 글을 써서 올리세요.
               
자하드경제 15-01-03 03:43
   
-_- 수출량이 300배 늘어난게 아니라 그동안 밀무역된 량이 세금의 현실화
즉 적시한대로 200냥에서->5냥으로 낮추니 공무역을 통한 무역으로 증가한 것이라는 것 입니다. 애초에 왜 밀무역의 량이  그러할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기본적 지식이 없이 뭉텅대고 필요한 부분만을 읽고 대응하니 자꾸 그러한 무리가 뒤따르는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로인해 조정의 총세액은 계속하여 20만냥에서 증가내지 유지하는 형태로 세수할수 있었고요, 없습니다님.정말 무엇이 없으신듯 한데 ,애초에
홈상량이 늘어 가격이 대폭락 할정도면 연간 판매량과 세수액 그리고 그에따른 총수입에 대한 급격한 변화가 동반되어야 하는데 이에따른 변화를 보여주는 것도 없을 뿐더러 님에게서 그러한 변화에 따른 합리적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역시 무리겠죠? ^^
미국의 인삼은 18세기 후반부터 이미 조선의 인삼무역량을 3배가까이 웃돌 정도로 청나라에 유립되고 있었고 그 수요층과 그에따른 가격이 달랐기에 조선내의 정책적 몰락을 야기한 19세기 후반기와 맞물려 가격과 점유율이 85% 가까이 될 정도 까지 실질적 경쟁관계 그리고 이로인한 가격의 등하락에 영향을 미친 사안이 아닙니다.
                    
자하드경제 15-01-03 04:26
   
아~그리고 시스템클럽이 어디입니까? 님 정말 계속해서 남에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대응을 하실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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