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입후 첫글이네요 ^^
해방후 한국의 통사를 처음 체계적으로 작성했던 인물들이 매우 불행하게도 일본인들이고
그들에게는 식민지모국이라는 뚜렷한 입장에 따라 제국주의를 옹호해야할 프로파간다가 모든 근대적 영역에서 절실 했기에 비례하여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애초에 역사를 조작 했다 혹은 방향성을 잡았다라는 결론이 결코 틀린 판단은 아닐것 입니다. 이후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그들에게서 교육받은 신생 대한민국의 초기 역사학자들이 자신들의 일본인 스승들의 연구를 감히 부정하거나 실증적 연구없이 같은 한국인들에게 교육 시키고 일부의 사실을 전체로서 과장하여 결론적 인식을 통하여 "조선"이라는 국가를 관념적으로 이미 규정하여 두고 바라 보았다라는 것도 분명하고요 하지만 정작 2000년대이후 이들에게서 자유로운 젊은학자군이 생겨나고 이들이 화두에 맞게 실증적 연구를 통하여 조선을 바라보자 그동안의 사실 생각하면 대표성 퓨리스틱이라는 우리 역사를 지배해 왔던 오류?혹은 막연한 인식들이 부서지면서 새로운 역사적 자료들이 괄목할 만큼 밝혀졌지만 이러한 자료가 워낙 전문적이고 학자군에서만 논문의 형태로 교환되기에 그러한 역사적 성과가 대중에게 전달되고 인식되기 까지만 아직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듯 싶어 부족한 저라도 조금이라도 양상을 전달하기 위해 한번 작성해 봅니다. ^^
우리가 중세 일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유시민의원이 지적한 우리 아버지-할아버지 세대가 가지고 있는 난민촌정서 즉 북한을 허무맹랑하게 두렵게 바라보는 마음이 그들에게는 존재하지만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다면 반면 대한민국사람이라면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또다른 정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를 식민지정서라고 하는데 즉 우리를 지배했던 이에 대한 근거없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기원은 아무래도 임진란을 기점으로한 중세부터에 대한 기억이 출발일듯 한데,오늘은 첫번째로 우리의 상식인 조선의 전체 경제규모는 어떠했는가를 생산량과 무역량을 통해 일본과 비교하여 잘못된 인식에 수정을 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이글은 이미 몇달전 kj클럽에서 작성하여 조회수가 이례적으로 2000회가 넘고 200게에 달하는 일본인들의 발광을 통해 다루었던 문제인데 당시 일본인들이 폭주했던 모습이 다시 생각이 납니다.
(1)일본의 은수출량에 대한 출처는 서울대학교 역사학과의 양동휴교수님의 논문(2013)
(2)조선의 대청무역량은 이철성교수님의 조선후기 대청무역사 저서입니다.(2000)
16세기 중반 조선의 2명의 노비가 개발한 연은분리법 즉 은광물에서 잡물들을 제거하고 순수하게 은만을 출수할수 있는 방법을 개발후에
이러한 기술이 일본에 전수되어 그동안 은광개발이 활발했음에도 생산량대비 순은의 소출량이 적었던 일본에 현저한 생산량에 대한 획기적인 개선이 이루어 집니다.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조선에서도 알고있어 왕조실록 에도 이러한 한탄성 기록이 남아있고 그리하여 역사에서 흔히 일본의
은수출이 한때는 전세계의 1/3을 차지했다라고 하는 의미있는 기록이나 주장도 나오지만 이러한 부분이 아닌 전체적 맥락을 보면 또다른 양상이 펼쳐집니다.
위표는 16~18세기 전세계 금은의 수이입량을 대륙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그림들로써
17세기부터 일본의 은광산이 정점에 도달했던 시기의 연편균 수출량을 보여준다 연간 평균 59300kg
즉 약 59.3ton으로써 이를 당시 모든 경제적 중심의 지표가 되는 미곡 즉 쌀로 환산한다면
약 에도 전중기 은 55돈=4천문/쌀 1.5kg(1되)=100문 => 즉 쌀 1석(150kg)은
약 silver 132.5돈=쌀 150kg 즉 1석은=은132.5돈 으로 가정했을시
132.5x3.75=496g 약 0.5kg 종합하면 1석=은 0.5kg
60ton = 60000000g 약 6000만g/500g=12만석을 막부에서 수출로 벌어들임 (최전성기)
그리고 지배층이 이 돈으로 교역한 곳은 조선과 중국으로서 교역품은 대개 조선의 목화와 인삼
중국의 차와 비단등으로 교환하였음 물론 당연할수 있지만 교환 주거래품이 사치품으로써
막부가 그 수입을 어느 용도로 사용했는지를 알수있고
그리고 16세기부터 사실살 광산이 고갈되어 수출량이 급감하는 18세기 초까지 일본이 수출한 총량은
1560~1640=9450ton/1641~1708=3750ton 으로 전체 약 1만3200ton 규모로 이는 같은시기 전세계
은생산량에 약 1/10의 규모
조선은 말 그대로 상공업을 억제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권장한것도 아닌것은 분명
그리고 그 이유에는 뚜렷한 목적의식도 존재했고 옳음도 존재하여 양면성이 있음
조정에서 본격적으로 대청무역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병자호란이후에 청나라와 군신관례를 맺고 매번 사신단의 파견과 접대 특히 파견을 위해 필요한 경비 즉 당시의 국제 화폐인 은에 대한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서였고 이를 위해서는 무역이 불가피하였음 이미 고려때부터 고려인삼을 통해 아시아에서 조선의 인삼은 최고의 한약재로 취급되어 중국과 일본등에서 끊임없는 수요가 존재하여 문제는 조선의 결단이지 판매처가 문제가 되지는 않음 처음에는 인삼무역대신 모자의 판매를 통해 해결하려고 연간 80만개의 모자를 수입하여 대체했지만 간단히 말해 돈이 되지않으니 결국은 인삼으로 가고 마침 17세기 전라도에서 인공재배법이 여성에 의해 개발되고 기술이 진보하여 장시간보관이 가능하고 효능을 높이는 홍삼개발법으로 전환되어 엄청난 양의 무역이 이루어짐 이를 흔히 팔포무역이라고 칭하는데 그 무역의 규모라는 것이 전성기때는 공사무역을 통해 약 연간 8만근까지 이루어지고 평균 공사무역을 합해 연간 4만근 내외에서 이루어짐
당시 홍삼의 1근당 가격은 1캐티당 약 접경에서 은화 100냥에 거래되었고
이것이 다시 북경등 중심도시에서 거래되면 약 2~4배 까지 상승했습니다.
당시 은화1냥이 동전 3.5~4냥이었고 쌀 1석의 가격이 7냥내외였음을 고려하면
홍삼1근= 약 55석의 가치를 가짐 x 8만근=1600만석(최전성기) 평균800만석(220만석)의 무역규모
#이사벨라 버드여사의 19세기 말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이라는 저서에서는 홍삼을 조선의 가장 값비싼 무역품으로서 소개하면서 그 가격을 1바구니당(?) 1만4200~2만1000$로 기록하는데 이는
당시 일본인의 연간 생활비가 25~30엔이고 1$당 약 1엔이라는 공식환율로 볼때 어느정도의 고가품인지 알수있게 하며 덧붙여 이에대한 조선의 허가량도 기재했는데 약 1만6000근(캐티)라고 적고있다.
(신복룡역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2000년 pp290~291)
애초에 생산량도 후에 게시하겠지만 교역량에서 감히 비교가 되지 않는 규모입니다.
특히나 광산이 사실상 고갈되는 17세기 후반이후 일본의 주요 수출품은 일부 광산물질과 건어물 이라고
일본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기술하는 부분이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