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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11-28 17:15
[중국] 송나라를 너무 우습게 보네요. 송태조 조광윤
 글쓴이 : 으라랏차
조회 : 9,107  


이글은 예전에 제가 다른 사이트에 올렸던 글입니다.

뭐 개인적 취향으로 무력으로 영토를 넓히고 일부 귀족과 군벌들이 설치던

시기를 더 높게 보는 사람도 있을수 있지만 국가의 융성이란걸 단지 군사적 힘으로

만 판단할수는 없다고 봅니다. 



Song Taizu.jpg


중국사에 明君이라고 하면 누가 있을까?


삼황오제시대 말고 역사적으로 검증된 시기만으로 한정해 보면 

한고조 유방, 한무제 유현, 당태종 이세민, 명성조(영락제) 주체, 청성조(강희제)애신각라현엽 

등등을 꼽는 사람이 많을꺼다. 


송나라를 세운 송태조 조광윤을 꼽는 사람은 별로 없을거 같다. 

통일 왕조 가운데 국력(군사력)이 가장 약했던 宋史 자체가 별로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제위기간이 너무 짧아서일수도 있고, 제위를 아들이 아닌 동생에게 물려줌으로써 송나라 역대 황제들의 직계조상이

아니었기 때문일수도 있고 등등 이유는 많을꺼다. 


아무튼 송태조 조광윤은 기본적으로 혼란의 오대십국 말기에 보기 드믄 성인군자 스타일이었다.


그를 성인군자스타일 이라고 하는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1) 후주의 마지막 황제인 7살 먹은 공제 시종훈으로부터 "진교의 변"이란  쿠테타로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게 되나 

   끝까지 시종훈을 죽이지 않고 보호해주었다. 단지 시종훈 한 사람 만을 보호 한것이 아니라 시종훈의 후손 대대로 특별한

   작위를 내려주고 송나라가 망하는 날까지 보호해 주었다. 

   수호지에 나오는 소선풍 시진이 태조로부터 하사 받은 집안의 보검이라고 내밀면 관리들이 꼼짝 못하는 장면이 있는데 

   소설에서는 시진이 바로 이 시종훈의 후예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이 왕씨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생각해보면 조광윤의 이런 배려는 더욱 돋보인다고 할수 있다. 


2)  공신들을 단 한명도 죽이지 않았다. 

     토사구팽이란 속담이 있다. 토끼를 잡고나서 더 이상 쓸모없어진 사냥개를 삶아 먹는단 얘기다. 

     명태조 주원장이나 한고조 유방, 태종이방원 등이 공신들을 피비린내 나는 숙청으로 제거해버린거에 해당되는 얘기다. 

     왕권강화를 위해 이제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된 공신들을 제거하는거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일수도 있다.

     설령 공신들을 제거하지 않더래도 역으로 공신들에게 놀아나 군주 노릇 제대로 못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조광윤은 피의 숙청으로 공신들을 제거하지도 않았고, 공신들에게 놀아나 왕권을 내팽겨 치지도 않았다.  

      조광윤은 역사상 거의 유일한 예인데 자신을 황제로 옹립한 제장들을 불러모아 눈물까지 보이며 진솔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설득해 장수들이 스스로 군권을 내놓고 물러나게 만들었다. 


3)   효성이 지극했으며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웠다.  

      홀어머니를 극진히 공경해 죽기전까지 단 한번도 어머니의 말을 거스르지 않았다. 

      동생 조광의를 극진히 아껴서 동생이 아파 쓰러져 있자 눈물을 흘르며 옆에 누워 함께 침과 뜸을 맞았다. 

     

4)  어린 아들 대신 동생 조광의에게 제위를 물려준다. 

     이게 별거 아닌거 같지만 자기 욕심을 버리고 나라의 안정을 더 우선시 한거 결코 쉬운 선택 아니다. 


5)  부하장병들 최말단 사병까지 극진히 아끼고 사랑했다. 보초서는 사병들에게 자기 옷을 덥어주거나 한 일 등은 역사상 별로 비슷한 예가 없을 정도다. 물론 조조가 병사들을 아꼈다는 기록이 많지만 어디까지나 법가적인 입장에서 전략적인 입장에 기반한 거고 춘추시대 오기가 병사의 고름을 입으로 빨았다는 얘기도 치밀한 계산상의 일로 보이는데 비하여 조광윤에 대한 각종 기록이나 야사의 모습은 그런 차원을 넘어섰다고 볼수있다. 

     

이렇듯 기본적인 성품이 성인군자 스타일이라고 밖에는 말할수 없다. 


아무튼 얘기를 돌려서 5대의 마지막 왕조 후주 얘기 부터 해보자. 

풍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후주를 곽위가 세웠다는 얘기를 했었다.

곽의는 후사가 없어 시영을 양자로 삼았는데 곽위가 죽고나서 34살의 영민하고 야심만만한 시영은 후주의 세종으로 제위에 오르게 된다. 


시영의 목표는 바로 천하통일이었다.


구체적으로는 각지에 할거한 지방 정권들을 통일하고 연운16주등을 차지하고선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는 거란을 몰아내는 일이었다.  


풍도는 시영의 야심찬 목표를 허무맹란한 것으로 봤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이 젊은 황제 시영은 단숨에 남당을 굴복시키고 북한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으며 거란을 몰아내기 까지 한다. 


이런 정벌 때마다 최일선에서 뛴 장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광윤이다.  


시영은 매우 영민하고 훌륭한 군주였고 조광윤은 일선 사령관으로써 부족함이 없었기에 천하통일은 이제 시간 문제인듯 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영은 급사하고 만다. 이에 시영의 아들 시종훈이 7살의 나이에 제위에 오른다. 

조광윤은 이러한 시기에 요나라와 싸우기 위해 출전했다가 진교에서 제장들의 추대를 받고 쿠테타를 일으켜 황제가 된다. 


비록 그 통치 기간이 짧았지만 당나라 말기 절도사들에서부터 5대10국의 혼란기 까지 줄곳 유지되온 

군인들의 지방에 대한 무단통치를 종식시켜 백성들의 고통을 경감시켰으며 문치주의를 확립해 실질적으로 중국 역사상 최초라 할수 있는 과거제를 만들어 이 후 중국과 한국의 전통이 된 철인=학자=관료 시스템을 

만들었다.  


피를 흘리지 않고도 지방군벌들과 공신들의 군권을 차근 차근 빼앗아 나라의 안정을 이루었고

북한과 오월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 실제적인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다. 비록 연운 16주를 뒤찾진 못하지만 요나라가 감히 송나라를 치지도 못하게 만들었으니 그 역시 나름 성과가 있었다고 할수 있다. . 


중앙에서부터 각 지방에까지 법령이 제대로 이루어 질수 있게 하기 위한 시스템을 만든것은 중국사에서 아마 이때가 처음 일꺼다.


또한 처음엔 사천과 호북,호남의 물자를 대요 전쟁에 차출하기 위해 만든 문물에 이동 시스템은 이 후 상업이 급격하게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진위 여부 논란이 있지만 "뜻이 맞지 않더래도 선비들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 라는 유훈은 이후 

동양사회의 전통적 미덕이 되어 수많은 논쟁이 가능한 토대를 만들었고 이 후 왕안석의 신법파, 

구양수의 구법파 논란 가운데 성리학이 발전하는 밑거름으로까지 작용하게 된다.



조광윤은 비록 그 스스로가 군인 출신이었지만 문치주의를 내세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동양적 세계의 

기틀을 만들었으며 혼란의 시기에 비록 제한적인 의미일지라도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으며, 

봉건시대의 한계가 있긴 하지만 당시로써는 획기적인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 를 내놓았다는 점에서 

그 어떤 명군 못지 않은 업적을 이루었다 할수 있다.  


태조 이성계가 군사적으로는 조광윤 못지 않은 뛰어난 점이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자기 아들 이방원한테 속수무책으로 당할 만치 무능력했는데 조광윤은 군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분명 매우 뛰어난 성군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태조 조광윤이 만든 이러한 틀은 몽골 점령시기 일시적으로 퇴보하나 후에 명,청 바다 건너 조선에까지 

그대로 이어져 동아시아 문명의 특징을 완성했다고 할수 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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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라랏차 13-11-28 17:24
   
위에 얘기한 뜻이 맞지 않더래도 선비를 함부로 죽이지 마라는 정확하게 말하면 직언하는 신하는
그 내용 여부를 떠나 죽이지 말라입니다. 

즉 황제와 다른 의견의 직언으로 비난하더래도 그것이 대역죄가 아니면 곤장 몇대쳐 쫒아낼수는 있지만
죽일수는 없다는 겁니다. 

별거 아닌거 같지만 그 이전 봉건시대에는 단지 누가 간언 -- 화난 군주 - 여봐라 저놈을 당장 끌어내 목을 베어라  같은게 너무나 당연시 되던 때인데 이걸 금지했다는 겁니다. 

당시로써는 아주 획기전인 진보스러운 정책이었던 거죠.
문삼이 13-11-28 17:40
   
제 사견으론 송나라야말로 문화적,기술적으로 가장 발전된 국가였다고 봅니다. 임진난때 사용된 화약무기들이 송나라때 이미 그 원형들이 대부분있었다는 자체부터 놀라웠습니다. 조선의 잘 정비된 관료제도 따지고 보면 송나라꺼죠.몽고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착취되어 사라졌지만 그걸 부정할수는 없죠.
다만 국가의 경제력이 발전함에 따라 오직 이윤추구의 사회로 발전되어 갔죠. 군인보다는 상인이 되길 바란 송나라 국민들입니다.
군사적으로 대외팽창을 안했을 뿐이지 몽고에 대해서도 끝까지 항거했습니다. 약했지만 위기의 순간에 끝까지 국가를 유지시키려는 민중의 시도였죠.
그에 비해 명나라는 내부적으로 완전히 망가지면서 스스로 몰락한거 보면 송나라의 국가체제가 상당히 견실했음을 보여줍니다.
     
으라랏차 13-11-28 17:51
   
댓글 감사합니다.

명나라의 황제 독제체제나 당나라의 군벌체제, 한나라의 군현제+봉건체제에
비해 3정승에 의한 권력분립이나 지방과 중앙을 아우르는 정교한 관료체제 등은 놀랍도록
혁신적이고 당시 전세계 통틀어도 꽤나 선진적인 제도라고 봅니다.

 유형의 군사력은 약했을지 몰라도 무형의 자산 사회시스템
이나, 성리학의 발전, 문화예술, 과학기술 등은 이때가 중국사에서 극성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산골대왕 13-11-28 18:21
   
이런 다양한 글들 좋습니다. 덕분에 잊었던것들 또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구요. ㅎㅎㅎ
     
원전이 13-11-28 22:31
   
저도 이 런 다양한 의견들이 있는게 건전한 게시판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저도 세계사나 이런 교육받을때 송조는 좀.. 유약한 왕조였다 이정도로 알았는데 많은걸 알게해주는 글이내요
gaevew 13-11-28 18:31
   
     
으라랏차 13-11-28 18:34
   
고려 무장 윤관이 개척한 북방 영토가 적어도 오늘날 함경도 지방이 아니라
만주 길림성 일대에 이르른다고 생각하지만 티벳과 강남까지 고려 땅이었다는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은 쫌.
gagengi 13-11-28 18:42
   
송나라는 신라김함보의 금나라에 정복당해 식민지로 전락합니다.  정복당한 송나라 식민지원주민들은 변발을 하고 여진복장을 강제로 입게 되었죠. 한족들은 한자도 못쓰고 여진글과 여진말을 쓰도록 강요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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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 청나라는 한국사입니다.  김구임시정부때 금청사를 한국사로  가르쳤습니다.
우리역사인 금청사를  원래대로 한국사로 복원해야합니다.

"신라 김함보후손이 중국을 정복해":
http://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64828
조선-청나라는 중국을 정복한 한민족의 남북조시대: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26450
오랜식민지배 끝에 중국인  외모가 한국인과 비슷하게 바뀌어:
http://www.gasengi.co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427&page=4
     
으라랏차 13-11-28 18:47
   
잘못된 주장입니다.
오랜습성 13-11-28 19:21
   
가만보면 동아시아에서 송나라에 대해 좋아하는 무장이나 학자들이 많았을테니

특히 건축 같은 경우에는 대륙 역사상 건축미의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인데

고려도 적극 들였고

문명에 대한 매력도임
ultrakoo 13-11-28 19:35
   
분열된 시대를 통합한 군주임에도 인품이 다르네요
mymiky 13-11-28 20:05
   
주원장과는 참 천지차이 ㅋㅋㅋㅋㅋ
좋은 글 감사합니다 ^^
KNVB 13-11-28 20:12
   
2)번에 관련된 당시 상황 재현입니다. 조광윤이 황제가 되고 어느날 연회를 베풉니다. 절도사 시절부터 조광윤을 보필한 심복들, 지금은 송나라의 백전노장들이 연회에 모두 참가합니다. 연회가 무르익자, 송태조 조광윤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한숨을 푹 내쉽니다.
장군들 : "폐하,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지요?"
태조 : "아니오, 별 거 아니오"
장군들 : "폐하, 말씀해보시옵소서. 저희들이 해결해드릴 것이옵니다."
태조 : "혹시 경들은 나의 이 자리가 탐이 나지 않으시오?"
장군들 : (놀라며) "폐하, 무슨 그런 황망한 말씀이시옵니까?" "저희들은 오직 폐하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로 지금까지 왔나이다. 통촉하옵소서"
태조 : "그래... 그대들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소. 오랜 나와의 우정과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대를 이어 충성할 생각일지도 모르지. 허나, 내가 후주의 선위를 받았듯이, 그대들의 부하들이 그대들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종용하고,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그대들은 끝까지 거절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오?"

장군들 : (침묵)

태조 : "그것 보시오, 그런 상황이 된다면, 끝까지 거절할거라 장담할 수는 없는거요. 그렇다면 이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장군들 : "폐하, 저희는 폐하께서 어떠한 결정이 있어도 따를 것이옵니다. 저희들이 어찌하면 좋사옵니까. 하명하여주소서."

태조 : " 인생이란 짧은 것이오. 지금까지 그대들은 나를 따르느라 많이 고생했으니, 이제는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하여 여생을 편안하게 보냈으면 좋겠오."

장군들 : "알겠습니다. 소신들 그리하겠나이다."

다음날 송태조의 건국공신, 숙장들은 모두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했다. 이로써 송나라의 후계가 찬탈될 위험은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런 건국공신과 노련한 경험을 가진 장군들의 은퇴로, 송나라의 군사력은 약해졌고, 그것은 송이 외세의 침입에 약한 모습으로 변모하게 만들었다.
KNVB 13-11-28 20:36
   
제가 일본 관련해서 밑의 글에서 조선은 문치주의, 일본은 무치주의라는 말씀을 드렸고, 어느 분들은 그때문에 현실적, 물질적 사고를 가진 일본이 보수적인 이념으로 무장한 조선보다 역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기 쉬워서 근대화를 빨리 진행된 면이 있다고도 했습니다. 송나라 또한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하고, 무력이 약해서 고생을 한점은 조선과 공통점이 있군요. 하지만, 송나라 역시 그 시대에서 단지 외세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고 해서 긍정적인 면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일본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이 일본 전국통일이라는 목표로 끊임없이 전쟁을 일삼던 그 시대, 후세의 일본인들은 그 격동의 시대를 신장의 야망 등 수많은 게임으로도 만들고, 사극으로도 제작하는 등 흥미로워하지만, 그 시대 당시를 살아가던 일본인들에게는 매일매일이 생지옥과도 같았습니다. 전쟁 중에 죽어간 남편의 시체에서 잘려나간 남편의 머리통을 개울가에서 아낙네가 씻고 있는 장면을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었다고 당시 포르투갈 선교사의 기록에 남아있죠.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영지의 주인이 바뀌어있고, 하극상으로 주인의 가족을 죽이고, 자신이 주인이 되고.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의 평화로운 치세를 매우 부러워했다는 기록도 여러곳 남아있습니다. 즉,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조선이 평화로운 나라였고, 일본은 멀쩡한 생목숨이 허구헌날 죽어나가는 지옥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평민들의 입장에서는 조선과 일본 중 어느 나라가 더 살기좋은 곳이었을까요? 송나라도 그런 관점에서 봐야하지 않을까요? 후세 사람들은 거란에게 양보하고, 서하, 대리국이 독립해도 아무 말 못하고, 고려에게도 당당하지 못했던 송나라의 위세만 보고 약하다 하지만, 당시 송의 풍요로운 경제력으로 송의 백성들은 다른 시대에 비해, 비교적 평화와 번영을 누렸습니다. 글쓴분께서도 그런 의도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연아는전설 13-11-28 21:32
   
님글의 의도도 알고 윗 글쓴이의 의도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실제로 후대에서 볼때는 국력이 강하고 영토가 팽창하여 강력한 나라일때를 그리워하지만 당시 살았던 백성의 입장에선 정말 하루하루가 지옥이었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엄청난 시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기에서 분명하게 배웁니다 백성이 힘들때보다 백성이 편하고 무를 천시하고 문만을 숭상했을때 얼마나 엄청난 댓가를 치러야 하는지 우리는 불과 얼마전까지 체험했었습니다 어느 시대건 간신은 존재했으며 현시대도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될 한가지는 국방력입니다
          
KNVB 13-11-28 22:07
   
물론 평화시기에 위기를 대비해야 한다는 말씀은 옳습니다. 저번에 정조가 급사하지 않고 10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의 미래는 달라졌을 거라는 댓글도 올린적이 있습니다만, 조선의 문제는 문치주의로 시작했다는 것이 아니라, 문치주의를 무려 500년이나 고집했다는 것이지요. 조선시대를 잘 모르시는 분은 500년 내내 성리학만 외쳤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만, 사실 조선도 탈 성리학으로 갈 기회는 여러번 있었죠. 예를 들어, 청과 명 사이에서 실용적인 중립외교를 펼쳤던 광해군이 계속 집권했었더라면,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가 보위를 이었다면, 정조가 급사하지 않고, 그의 뜻대로 수원성으로 천도하고, 이가환, 정약용을 재상으로 등용했다면, 그리고 마지막 기회였습니다만, 만약 갑신정변이 성공했다면, 조선의 미래는 일제에 의한 패망이 아니었을수도 있었습니다. 조선이 문치주의를 택함으로써 조선 초기 문물 정비와 체제의 안정이 이뤄지는 범위에서만 유교를 잘 활용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갔어야 했는데, 그게 무산되었을 뿐이죠.
          
으라랏차 13-11-28 22:12
   
약간 잘못알고 계시는데 무를 숭상해서 외적의 침입을 안당하거나 막아내는게 아닙니다.
철저하게 문신을 탄압하고 도방,중방등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고려의 무신정권이
몽골에 침입을 막아냈나요?

백성들은 외적 앞에 그대로 내어놓고 강화도에 도망쳐 농성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방비를 게을리 하지 않는거 역시 중요하지만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문화의 힘, 모든것을 녹여버리는 거대한 용광로 같은 문화의 힘 역시 중요하다고 봅니다.
               
굿잡스 13-11-28 22:21
   
철저하게 문신을 탄압하고 도방,중방등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고려의 무신정권이
몽골에 침입을 막아냈나요?>??

저기요 이건 비유가 잘못되었죠.(애초에 무신집권기가 무신들을 무시하던

문신들의 풍조에서 발생한 건데 무슨.)

이 무신 집권 당시 고려는 정치적으로 이원화되어 고려황제는 허수아비에

군벌들이 수시로 쳐바뀌면서 국정은 혼란에 전국에서는 민란이고  이후 최씨가

곤고히 집권했다지만 과거 고요 전쟁당시처럼 황제 일원화의 전력 투구형태가

아니였음. 그기에 무신들은 군대를 자신의 보신과 사병화함으로서

당시 고구려를 이은 막강한 정부 지원하의 중장기병이나 군사 체재는 상당히 와해

되어 버린 측면이 강합니다. 이후 몽골의 침입도 겨우 각성에서 각개 격파 형식이였죠

애초에 우리는 고구려고 고려고 각 성이 공성전을 통해 상대를 지연시키고

중앙 대군이 쓸어버리는 형태를 취하는데 이게 무신 집권기의 혼탁함으로 와해되어

버렸음.(도리어 무신집권기 이들은 도리어 자신의 보신에 급급해서

섬에 쳐박혀 있었고 정치가 이원화되니 제대로 군대가 대응을 하지 않자

몽골은 이들을 내륙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전국을 돌아단니면서 방화 약탈)
                    
으라랏차 13-11-28 22:40
   
그러니깐 결국 문신집권기 무신을 홀대하던 시기에 오히려 더 국방이 강했다는 얘긴가요?
굿잡스님은 대충 무슨 얘기를 하실려는지는 이해되는데 좀 정리가 안되는군요.
                         
굿잡스 13-11-29 00:42
   
문신집권기?? 이건 또 뭐임? ㅋ
               
KNVB 13-11-28 22:30
   
당시 몽고 제국의 군사력에 고려 단독으로 격퇴하기는 무리였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죠. 밑에 굿잡스님의 말씀대로, 당시 무신 정권이 하나로 공고하게 단결되어 있다기에는 무리한 측면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몽고가 너무 강했습니다. 고려가 무를 숭상했건, 천시했건 관계없이 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요. 만약 오고타이 칸의 죽음으로 독일에서 철수하지만 않았다면, 바투가 이끄는 몽고군은 서유럽 전체를 유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문화의 힘이 중요하지 않다고 한적은 없습니다. 다만, 총칼로 위협하는 현실적인 군사력 앞에서 그것만으로는 국가를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이죠. 몽고 제국의 군사력의 무시무시함에 대해서는 이 동아시아 게시판에도 여러번 게시물이 세워졌던 걸로 알기 때문에 제가 굳이 구구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고려가 그나마 몽고 제국에 40년이나 저항을 계속하고, 비록 부마국이긴 하나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강렬한 저항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상무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이후 삼별초의 난도 실패하기는 했지만, 40년의 저항 뒤에도 그런 끈질긴 저항이 가능했다는 것이 대단한 일인것이죠.
굿잡스 13-11-28 21:52
   
글이 좀 그렇네요 ㅋ

마치 정사 삼국지를 보는게 아니라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소설을 보는 듯 하고

정사 조조를 보는 게 아니라 소설속의 조조나 유비를 보는듯 드라마적이고 너무 감성적으로 역사를

보려는 부분이 강하군요.


물론 조광윤이 서토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피를 흘리지 않는 인물이긴 하지만

진교의 변이라는 찬탈 쿠테타 역시 조광윤이 미리 계획한 일련의 잘빠진 연기 실력이라는 게

정설입니다.  과연 대국의 정치 노름에서 순수함이라는게 실제 존재할 수 있겠음?(예시에 조조는 무슨

의도적 어쩌고 하고 조광윤은 마냥 천햐의 명군 어쩌고 식도 그렇고 ㅋ)



<3)  효성이 지극했으며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웠다. 

      홀어머니를 극진히 공경해 죽기전까지 단 한번도 어머니의 말을 거스르지 않았다.

      동생 조광의를 극진히 아껴서 동생이 아파 쓰러져 있자 눈물을 흘르며 옆에 누워 함께 침과 뜸을 맞았다.

    4)  어린 아들 대신 동생 조광의에게 제위를 물려준다.

    이게 별거 아닌거 같지만 자기 욕심을 버리고 나라의 안정을 더 우선시 한거 결코 쉬운 선택 아니다.

>>

그리고 조광윤은 너무 어머니의 말에 충실한 나머지 대국적 흐름을 그릇친 경우로  바로

그의 동생에서 나왔음.(어머니 말따라 계승 서열을 아들이 아닌 나이 순의 동생을 첫순위로 둬던)

스스로 제위를 물러 준게 아니라 실제 조광윤 침실에서 도끼 소리가 쿵하면서

이후 썩연찮은 죽음을 당하고 조광윤의 황위를 뺏고 올라온 게 동생 조광의죠.



그리고

<송이라는 문치주의 표방으로 얻은 이득도 있지만 여러면에서 무능함이 보였던 왕조인것은

맞음. 왜냐?>

기본 오대십국의 혼란속에서 수습했다고 하나 이후에도

강대한 요나라가 버티는 상황에서 마냥 문치주의를 표방한다는 자체가 이미

문제가 있는 거죠.  그기에 너무 행정적 중복 낭비가 심한 과한 관료등용수나

퇴역없고 경술법등으로 인한 스스로의 지리적 이점을 살리지 못한 군사제도부터 대장원들의

소수가 토지를 장악하면서

군대 숫자는 많아도 제대로 쓸모 있게 사용도 못했고 재정만 악화시켜 도리어 백성을 힘들게

곤궁에 쳐했음. 그런 가운데도 제대로 주변 세력들을 제압도 못하고 쳐맞았으니

이게 무능이 아니면 무엇인가요?


조선은 비록 유교적 관료주의를 표방했지만 토지의 문제나 군사 문제등은 초기 명이나 여진

족과에도

상당한 대군에 강군으로 명과 신경전을 별이고 여진족 절반을 흡수하고 북방에 전쟁을 하

면서도 세종시기등이고 백성들 중에 굶었던 사람이 없었다는 기록도 나올 정도로 효율적이였

습니다.


도리어 이를 통해

주변 세력과 관계를 정립하고 난뛰는 세력들은 확실히 제압하면서

이후 조선은 너무 태평성대를 보내다 보니 중기에 가서

해안가 소수 양아치 정도의 왜구정도로 기존에 인식하던

왜군의 대규모 기습이 방심과 안이함에 조선의 국토가 전란으로 황폐화되면서

그 데미지를 입은 경우였지.
     
으라랏차 13-11-28 22:06
   
진교의 변에서 조광윤은 조연이었습니다.
그의 입장에서 진교의 변은 어디까지나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지요.
조광의와 수하장수들이 주연입니다.

조광윤이 미리 계획했다는 증거는 없고 동생과 부하들의 추대에 의해 갑작스럽게
제위에 올랐다가 좀 더 사실에 가깝습니다.
          
굿잡스 13-11-28 22:16
   
그의 입장에서 진교의 변은 어디까지나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지요>?? ㅋㅋ

애초에 북한과 거란이 합세해서 침략해 온다는 자체가 조광윤측이 만든 거짓 소문임

(앞서의 어런 황제로 인해 불안 어쩌고 유언비어도 이 조광윤 측에서 계속해서

흘러보내고 있었고)

이를 빌미로 후주의 최정예 금군을 데리고 나갈수 있었고 이후

뭔 갑자기 그 흔하지 않은 황포가 하루아침에 떡하니?? ㅋㅋ 개그 아님??

(이는 속수기문이나 송사 두태후전이나 싯구등에도 잘 나오죠)

이런 최정예가 다시 개봉으로 입성헤서 떡하니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무슨 힘으로 황위를 뺏으려는 작자 앞에 자리를 마냥 지키고 있을까요????

님 너무 역사를 드라마적 감수성이나 정치를 단순하게 봐서는 안되죠.
               
으라랏차 13-11-28 22:21
   
글쎄요.
황포가 어디서 나왔느냐 등등의 문제에 대해 저는 위에 조광의와 수하장수들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님의 얘기 위키에 나오는 얘기인데 위키 얘기가 다 사실 아닙니다.
 대부분의 연구 결과는 조광윤의 동생 조광의를 비롯한 심복 부하들이 주연이었다 입니다
미리 조광윤이 직접 각색해 준비했다는 주장의 근거가 사실 대단히 미흡하기 때문입니다.
                    
굿잡스 13-11-28 22:26
   
ㅋㅋ 님이야 말로 정치를 너무 코메디로 보시는 군요 ㅋㅋ

사서의 다른 기록을 보고 말하세요 님은 어느 근거와 출처로 그리 말하심???

황위라는게

무슨 하루 아침에 당신 하세요하면 누구나 그렇게 쉽게 되고

문 여세요 하면 성문이 저절로 열리고

황위 내 주세요 하면 내어 짐?? ㅋㅋ 참 이런 우연에 우연으로

로또에 로또로 마냥 되면 세상사에 누가 박터지게 싸우겠음??

조광윤이 마냥 명군이라서??? 인간들은 그런 고매한 인격을 마냥 지지하고

아낌없이 줄수 있는 속성이라서요??? ㅋㅋ 참나.
                    
굿잡스 13-11-28 22:30
   
그리고 애초에 님의

글은 송을 뭘로 보는데요 하면서

송의 실질적 채제나 제도적 부분의 객관적 데이타를 가지고 논거를 펴는게

아니라 상대나 다른 조명에따라 얼마든지 뒤집어 질 수 있는 매우 추상적 인물

상을 통해서 희극화하고 이를 통해 마치 송은

그래서 잘나가서?? 이런식으로 전반적 글이 구성되고 있다는 점이죠.



우리가 세종을 명군으로 보는 건 단순히 세종이 좋은 말을 해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런 제도적 합리적 장치를 만들고

실행력 그리고 실제 성과들이 나왔기에

명군이라고 하는 것임. 행정뿐 아니라 군사, 과학 다방면에서요.
                         
으라랏차 13-11-28 22:36
   
미안한데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뭡니까?
송태조가 명군이 아니다란 얘기를 하고 싶은 겁니까?
                         
굿잡스 13-11-28 22:41
   
??? 첫글 안보이심?  님글에는

실제 내용과 다른 부분으로 희화만 한 부분이 강하고

무엇보다 송이 그런 경제력과 인구력을 가지고도 쳐맞기를 그렇게 반복했다면

그만한 문제와 단점이 내포되었기 때문임도 직시해야 한다는 것임.

그건 앞서 말한 군사제도나 관료 등용의 문제 소수가 대장원으로 토지를

장악하면서 군비 부담 악화나 비효율적 군사,행정 제대로 인해 실제

백성은 곤역을 치루고 있었다는 말임.(그리고 이런 비효율과 무능으로

인해 도리어 주변 요나 서하 금에게 이리저리 쳐맞다가 멸망하고 내려가서도

멸망.)
                         
으라랏차 13-11-28 22:46
   
어느 사회나 체제고 완벽할수는 없습니다.
저는 조광윤이 완벽한 인물이고 송나라가 완벽한 이상향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광윤은 보기드믄 명군이며 송나라는 봉건시대의 한계가 있긴
하지만 당대 보기드믄 사회시스템과 문화적 번영, 경제적 번영을 일군 사회라는 겁니다.
     
굿잡스 13-11-28 23:04
   
근데 제 눈에는 어째 실제 송의 체재나 사회 시스템보다는

무슨 소설같은 명군 포장 드라마적 요소가 많은 극본을 보는 듯 하니 ..
으라랏차 13-11-28 22:33
   
조광윤이 술에 취해 정신을 잃자 조광의 주도하에 억지로 황포를 입히고 만세를 부르며 황제로 추대했다가
어디까지나 정설이며 이에 대한 근거가 많습니다. 

그 근거중 한가지가 바로 위에 KNVB 님의 글입니다. 원래 원문을 보면 경들의 부하중 누군가가 경들이 나에게
했던 것처럼 술에 취했을때 황포를 입히고 황제로 받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묻는 장면이 있죠.

그밖에 국내에도 번역된 중국사대사전에 보면 이를 뒷받침 하는 근거로써 제시되는 내용들이 많은데
일일히 찾기는 귀찮고 아무튼 원래 일본사람이 썼던 "이야기 중국사" 나 위키에 카더라는 뭐 그럴수도 있겠지만 근거가 희박하다 입니다.
모래곰 13-11-28 22:40
   
송이 문약하다고 말하지만 대단한 군사력을 가진 요, 금도 점령이 불가능한 상대였습니다.
사실 몽고가 가장 고전한 상대가 금, 송 두 나라입니다.
특히 두 나라는 서로 원수여서 이간책을 사용해서 한명씩 상대했죠.
일단 당시 몽고의 진격은 거의 전 세계적인 재앙수준이라서.
그리고 남송을 함락하는데 무진장 고생을 한 몽고는 정복민을 차등 대우를 하지만
그건 남송의 문화, 경제력에 대한 두려움이 원인입니다.
일단 경제력은 넘사벽이고 문화에서 너무 밀리니까 가장 최하등급에 남송을 둔거죠.
이건 뭐 제어가 안되니까.
명나라 초기까지 유지되는데 강남식자들의 수준이 타 지방보다 월등했죠.
경제력, 문화에서는 전세계에서 최강인건 부정할 수 없고 가장 근대사회에 근접했다는게 송나라죠.
     
으라랏차 13-11-28 22:44
   
네  과거급제자의 출신지역도 남송때의 영향으로 명청대에는 강소,절강 등
강남출신의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는 통계도 있죠.
     
굿잡스 13-11-28 22:44
   
남송이 마냥 약한건 아니나

대하가 컨 지리적 이점으로 작용했죠.(몽골도 이때문에

특유의 기병운용등에 어려움을 겪었던)
     
굿잡스 13-11-28 22:47
   
남송의 문화, 경제력에 대한 두려움이 원인입니다. >???

근데 이런 말이 마냥 왜 나왔는지 잘 모르겠군요 ㅋ

애초에 원나라는 과거 제도를 시행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예 한족들 씨를 말리려다 세금 거두는 노예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둔거지 ㅋㅋ

그리고 만주족 청은 아예 더 노련하게 다단계 평생 과거제도를 만들어 공부만 박터지게

하고 정작 한족 관료는 매우 소수에 충성심 보고 뽑았고

정작 요직은 다 만주족들이 차지했고 ㅋ
          
모래곰 13-11-28 22:59
   
비록 몽고가 군사력이 막강했지만 피지배층이 뛰어난 식견과 경제력을 가지면 지배가 어렵겠죠.
그런 면에서 몽고제국의 점령지에서 가장 통치가 어렵다고 예상되는게 강남이죠.
다 떠나서 유목민족의 인구는 대충 100만인데 그걸로 중국을 통치하기가 쉬운게 아니겠죠.
게다가 몽고제국의 영토는 청나라보다 월등히 크고요.
청도 만주족에게 과거를 권하지 않았다고 압니다.
워낙 소수여서 순수한 무력을 보유하기를 윈했기에
요충지에 팔기군을 배치하고 통치하기를 원하는 스파르타와 비슷한 스타일이죠.
스파르타도 평균 1만의 군사력을 보유했지만 실제는 이들은 타 도시와의 전투에서
동원하지 못하고 다른 병력을 보냈죠.
한마디로 남송이 최하층이 된 것은 가장 강했던 이들을 억누려고 했던 방법이라는 말이죠.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대충 이런 뜻입니다.
               
굿잡스 13-11-28 23:08
   
남송의 한족들을 특히 최하층 노예등급으로 한 것은 기본 제일 마지막까지

저항을 했던 반몽골 세력이니 당연히 활동의 제한과 차별을 두는건 당연한게

아닐까요?ㅋ

(물론 만주족은 이를 토대로 더 세련된 정복 통치술을 보였고)

그리고 북방에는 당시 금나라 대국 행정을 하던 고구려인(발해인)등이나 여러

북방의 관료인들이 존재했음(이미 고려인인 장호가 북경에 중도라는 대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을 토대로 금나라가 세력을 넓히는 중심지로 활용하며

이미 다져 놓았고 이 기반위에 몽골이 들어왔으니. )
                    
모래곰 13-11-28 23:18
   
물론 최후의 저항에 형벌로써 그랬을 수도 있죠,
비교적 우호적이였던 고려인이나 거란, 여진의 잔당을 활용했을 수도 있고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하필 왜 남송이 그렇게 최후에 멸망했는지 생각도 필요하다고
보는데 제 생각에는 우연히, 지형의 영향 모두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그 사회의 전체적인 국력의 차이겠죠.
제 생각에는 남송을 견제하면서 행정을 꾸려갈 인재가 없는 원나라의 고육지책이였다고
생각합니다.
                         
굿잡스 13-11-28 23:34
   
행정을 꾸려나갈 인재가 없다면 남송을 최하위 노예등급으로 더욱 두면

안되죠. 최소 북방 세력등급으로 해서 어느 정도 요직에 앉혀 활용을 해야지.

제가 보기에는 몽골은 강권 지배방식이였고 이미 요부터 금이고 정복왕조인

기마문화권의 거란 고려인들이 북방의 도시문명과 행정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딱히 잠재적 반란 1순위의 남송 본토인들까지

상위등급으로 우대해서 요직의 기회나 활동을 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

타당하지 않나 싶군요.(뭐 요즘 나오는 기황후도 그렇고 황궁의 공녀 문제

등도 한족보다 고려나 북방 세력쪽에서 조달받는 게 더 안전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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