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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11-27 15:05
[기타] 식민사관과 역사왜곡이 남긴 한국인의 분열과 지역감정(2편 그들만의 역사)
 글쓴이 : 객님
조회 : 5,963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그들만의 역사.


얼마전 TV에도 나왔었고, 사이트 내에서 어떤분이 자료를 올려주셨지만 우리가 일본을 하나의 나라라고 인정하고

있는 이상, 모든 역사는 자국 중심의 민족적인 역사 기술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일본의 역사를 모두 날조의

역사라고 비난만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난 그들의 일본사기같은 오래된 역사서에 의한 기술이 나쁘고 날조다.

라고 말하지 않겠다. 그 역사서가 진본인지 가짜인지 우리가 알수없고 그 역사서에 나와있는 시대적 상황이나

내용 또한 모든것이 거짓이라 해도 그것은 그들의 역사이니 우리의 역사가 아닌만큼 그들의 역사를 폄하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가 일본의 역사를 알아야만 그들로 인해 한국의 역사왜곡과 식민지 36년이 남긴 수많은 민족의 오류를

잡을수 있기에 그들의 역사를 메이지 시대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일본인은 천황가를 시초부터 한 가계와 한 핏줄로 쭉 이어져왔다고 하여 만세일계 라고 하였다. 천황은 살아있는

신이고 천황 자체가 국가 였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를 볼때 하나의 의문점을 가지는 것이

그렇다면 무소불위 절대권력자 천황이 우리의 조선시대엔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점이다.

우리는 천황을 이야기 하는것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도를 많이 기억

하고 있다. 일본에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은 이들이 천황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일본이 말하는 천황의 역사란 아마테라스 여신이며, 우리의 단군만큼의 역사를 자랑한다. 우리가

그 오래된 역사가 진실이냐? 거짓이냐? 라고 평가할수는 없다 어찌보면 모든 민족이 민족의 역사를 쓰면서

민족의 자부심과 긍지를 위해 신화적 요소를 많이 첨가한다는 것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기에 일본의 그러한

천황의 시초도 살포시 무시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천황이라는 존재가 역사에 등장하게 된것은 언제부터 일까?

연도가 불분명한 신화적 존재감의 천황은 오래전부터 존재한 걸로 되있고 살아있는 신의 존재로 표현되어있지만

실질적으로 천황이라는 존재는 794-1868년 동안 교토어소(역대 천황이 산곳)에 갇혀있는 존재였다.

12세기 가마쿠라 막부(12세기~19세기까지 일본을 지배한 무사정권)가 세워지고 쇼군이 권력을 잡으면서 천황은

이름뿐인 존재로 전락한다. 이 시기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자는 막부의 쇼군이였고, 이들은 사무라이 계층

이였다. 따라서 우리가 일본 이라는 이미지를 생각할때 칼을 찬 사무라이 이미지를 생각하곤한다.


메이지유신 이전 막부의 정권은 스스로 무너지고 자체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것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보신전쟁" 이라는 막부간의 내전을 통한 메이지 정권의 성립은 일본이라는 나라안에서 개항을 위한

혁명이 아니였다.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4척의 군함을 이끌고 통상을 요구하며 무력 시위를 한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개항인가? 아니면 전쟁인가.

사무라이 계층에 있어서 패배는 할복이며 치욕이고, 패배로 인해 할복xx 하는것은 가장 큰 미덕이다.

대부분 사무라이인 막부에 있어서는 결사 항전 하는것이 당연한 지사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철갑으로 두른 함대와 요란한 소리, 그리고 거대한 몸을 자랑하는 미국의 페리호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들은 싸워볼 자신감을 상실했고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고 자결을 택하는 행동을 한것이

아니라 전쟁은 패배와 할복이라는 순서로 갈것이 당연하니,

페리제독이 원하는대로 개항을 하는것으로 선택하게 된다. 개항 자체가 투쟁과는 거리가 멀지만 은연중에

패배 라는 인식이 강하기에 사무라이 계층은 자신이 나서서 개항에 합의하는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동안 따르던

막부 정권보다 더 높은 자를 찾기 시작했다.

기존의 막부정권은 개항을 할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막부의 뜻대로 전쟁을 할 경우 자신들이 가장 큰 희생양이

될것임을 감지한 일부의 사무라이 세력들이 교토 어소에 갇혀서 살고있는 16살의 메이지 천황을 앞세워

막부정권을 타도하고, 미국에 머리를 숙이고 개항을 받아들이는 역할에 천황을 앞세우게 된다.

이것이 그들이 스스로 위로하며 자신들의 사무라이 정신을 지키는 길이였다. 이들이 자신들의 철학을 "실학" 이라

부르는 "존왕파" 이다.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권력을 이양받은 16살의 메이지천황은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을 유럽과 미국에 파견하며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서구화를 촉발하여 서구열강의 일원이 되고자 하였다.


이때 이와쿠라 사절단에는 우리가 많이 알고있는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살해된 이토히로부미도 포함되어있었다.

이토히로부미는 엄밀히 따지면 천황을 앞세우고 천황 뒤에서 칼을 들고있는 비겁한 사무라이나 다름 없다.

3차례에 걸쳐 외국을 나가본 이토히로부미는 독일의 정치제도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강력한 황제를 앞세우고 비스마르크 같은 재상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독일의 모습이 이토히로부미가

구상하던 일본이였다. 따라서 메이지정권의 등장과 함께 대일본헌법초안을 작성하여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입헌군주제 국가가 성립되는데 이 대일본 헌법초안을 작성한것이 이토히로부미였다.

이 일본의 헌법은 일본의 근대화를 촉진하는데 커다란 촉진제가 되었지만 동시에 일본이라는 나라를

천황의 나라로 만들었다. 헌법의 전문을 보면


1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

3조. 천황은 살아있는 신으로 어느누구도 신성불가침을 가지고 있다.

4조.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 육/해/공 군의 통수권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천황을 신과 같은 위치에 올려놓은 존왕파 사람들은 모든것을 천황을 위한, 천황에 의한것으로 기록하면서

자신들의 세력 확장에 이용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상적 인물이 일본 게이오 대학의 창시자며 만엔권에 등장

하는 후쿠자와 유키치 이다.

후쿠자와는 "탈아입구론"을 주장하였는데 이 주장은 아시아를 무시하고 맹목적인 서구

따라잡기에 바탕이 된다. 탈아입구의 이론은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열강과 친해져야한다는 주장이며, 이러한

주장속에는 안좋은 아시아의 두 친구(아직 개화를 안하고있던 중국과 조선)와 친해지는것보다 서구의 열강과

친해져야한다는 주장이 포함되어있다.

이러한 정한론과 탈아입구의 주장은 이웃나라는 무시하는 천황의 이데올로기와 결부되어 침략의 정당화로

이어진다.

이제는 조선과 같은 이웃나라에 가서 자원을 빼앗아 오지 않으면 안된다. 반항하면 죽여도 된다. 라는 생각까지

하게되는 것이다. 이러한 메이지의 이데올로기는 천황을 통해 일본인의 내면에 깊게 파고 들게 된다.

1890년 천황은 교육칙어를 반포하게 되는데 이 교육칙어를 살펴보면 내용이 천황에 대한 충성의 서약이였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천황이 즉 국가이니 충성을 다해야한다" 라는 내용이 포함되어있는데,

내용은 다르지만 우리네 어렸을적 국민교육헌장을 낭송하는 것도 아마 이러한 일제의 잔재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개항과 조선의 개항


위에서 언급한것처럼 일본은 미국 페리호의 무력시위에 굴복하고 자신의 굴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보신전쟁을

통한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일본이 20년뒤 조선에 행한것을 보면 너무나 똑같은 방법과 순서로

조선에 진출하게된다.

1875년 조선해안 탐측이라는 명목으로 개항을 요구하러 온 운요호를 조선은 무력으로 항쟁하였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119712) 이러한 조선의 쇄국정책이 정당하다는것은 아니다. 과거부터

일본과 중국에 수 많은 침략 경험이 있고, 일본이 미국과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원거리 였다면 일본과

조선, 조선과 중국은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따라서 조선은 일본처럼 개항을 하고 이와쿠라 사절단 같은것을

파견하여 개화를 촉진할만한 상황이 아니였다. 가까운 거리에 두 열강이 존재하고 있는 것 만큼 식민지 라는것은

피할수 없는 결과 였기에 스스로 힘을 키우기 전까지 자신의 몸을 담보로 하여 일본과 중국이 서로 견제하는

상황을 만들어 시간을 벌고자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 일어난 것이 동학농민 운동이였고, 동학 동민 운동의

진압을 위해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를 불러들이게 된다. 그러나 동학 세력이 스스로 약해지자 조선은 양국에

철군을 요청하였고, 이에 수긍하지 않고 기대라고 노린 두 나라는 조선내에서의 입지 다툼의 충돌로 청일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대만을 일본에게 넘겨주게되고 조선내에서 입지를 굳히게

된다. 청일 전쟁은 군사적으로 일본이 강했다 라기 보다는 개화의 성격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우리가 흔히 청나라의 개화기 시절의 영화나 기록을 보면 변발을 한 청나라 군대가 총을 들고 함선에서 싸우는

모습을 볼수있다. 세계의 중심이라던 자부심을 가지고있던 중국 입장으로는 아편전쟁 이후 멀리 있는 섬나라

영국에 패배한 이유를 군사력에서 찾았고, 이들의 개화는 군사력에만 극한 되어있었다.

특히, 군사기술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영국에서 해군관련 기술을 그리고 독일에서 육군 관련 기술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일본은 군복 및 시스템까지도 그들의 그것을 그대로 모방했을 정도였다. 물론, 그러했기 때문에 영국이나

독일이 만들어낸 해전 및 지상전 관련 전술들 및 전략들 등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의 경우 "단지 서양의 우수한 무기만 받아들이는 것"이 목표였고(어떻게 보면 아편전쟁 당시의

일방적인 패배의 충격이 컸다.)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청나라 군대가 신식총으로

무장한 채로 여전히 변발 및 청나라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했으니 서양의 군사 전술이나 전략 등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자신들이 사용하게 된 신식무기들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청나라 황제의 섭정으로서 사실상 여황제나

마찬가지였던 서태후가 자신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군사비로 쓸 예산을 자신의 내탕금으로

돌렸던 점도 문제였다. 그 점 때문에 현재 중국의 박물관에는 서태후가 만들게 했다는 호화스러운 요트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 요트 앞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팻말이 있다.

"청나라의 신식군함이 되었어야 할 배가 지금 서태후의 요트가 되어 전시되어 있네.".

청일 전쟁이후 명성황후는 일본의 견제 상대로 러시아를 끌어들이게 되고 태평양 연안으로 진출하는 부동항을

찾고있던 러시아는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게 된다.


식민지의 결과가 된 러일전쟁.





일본인들이 자주 쓰는 말중 "조선의 근대화는 일본이 시켜준것이다." 혹은 "러시아에 의해 식민지 되었다면

지금은 러시아 말을 쓸것이며 시베리아로 끌려가 더욱 가혹한 식민지를 당했을 것이다" 라는 말을 자주한다.

따라서 러시아는 위험한 국가이기에 러시아로 부터 조선을 지켜준 전쟁이 러일전쟁이고, 이러한 러일전쟁의

결과로 서구열강들의 합의로 조선 근대화를 위한 식민지가 어쩔수 없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몇년전 한승조 기고문 "식민지는 일제의 축복이다" 라는 기고문에 반박하는 네티즌들에게 한승조씨를 옹호

하는 입장의 지만원씨와 논평객 진중권씨의 노컷TV토론 영상을 보면, 역사에 있어서 가정이라는 것이 있을수는

없지만 미국이 원자폭탄을 일본에 떨어트렸고,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 였기에 우리가 해방된것이다.

이게 다행스러운거고 축복이다. 만약 러일전쟁 승리후 러시아가 이겼다면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트렸어도

우리는 지금쯤 러시아의 식민지로 남아 있을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들어보면 그럴싸 하다. 하지만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일본이 제국주의는 없었을것이고, 태평양 전쟁

같은 것은 생기지도 않았을것이다. 조금더 신랄하게 이야기 하자면, 러일전쟁 이후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

없었다면 식민지는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렇듯 역사에서 가정이란 불필요하다고 할수있다.


이제부터 러일전쟁의 실상을 파악해보자.


1891년 5월 11일, 러시아의 황태자 니콜라이(러시아 최후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일본의 오쓰를 방문했을 때

일본 순사 한명이 러시아 황태자를 일본도로 내리치는 "오쓰사건"이 발생하였다. 황태자 니콜라이는 단순한

찰과상에 그쳤지만 이는 세계에 큰 충격을 주어 일본은 러시아의 보복을 두려워했고 총리 이토히로부미는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일본국왕이 병문안 까지 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행히 러-일간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후

일본은 러시아에 경계심을 품게 된다.

이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청나라의 요동반도와 대만을 얻자,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에 위협를 느낀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요동반도를 반환하도록 강요한다(3국간섭).

일본은 러프독에 비해 약한 나라였기 때문에 청나라에게 요동반도를 다시 반환하지만 이에 일본은 러시아에

반감을 품게 되고 1904년-1905년 한반도와 만주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간에 러일전쟁이 벌어진다.

일본이 러시아에 국교단절 하고 선전포고 함으로써 일어났다.

일반적으로 "백인국가"인 서양국가들의 경우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에 엄청난 근대화가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지만, 동유럽지역과 러시아는 그렇지가 못하였다. 특히, 러시아는 너무나도 광대한 국토와 그 국토의

대부분이 얼음과 진창으로 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이 당시 국가산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반이자 또한

이렇게 광활한 국가에서는 싫든 좋든 산업기반이 될 수 밖에 없는 철도가 제대로 놓여져 있지 못하였다.

즉, 동유럽쪽에 있는(당시 러시아의 수도이자 공업중심지였던) 상트 페트로부르그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당시

전쟁터였던 뤼순 등지로 보급품과 병력을 보내기 위해선 단지 하나뿐인 단선철도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게다가, 뤼순항에 배치되어 있었던 러시아군의 함대와 해안포대는 초기에 일본첩자들에 의하여 항구 내에서의

배치상황 등이 간파되고 이 정보를 입수한 도고헤이하치로 제독의 기습을 받자 바로 무너져버렸던 것이다.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발틱해를 출발하여 동쪽 대서양을 남하한 다음,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싱가포르를

거쳐 대한해협(쓰시마해협)까지 오는 동안, 정비와 휴식이 필요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도착하자마자

도고헤이 제독의 "쌩쌩한" 연합함대와 전투를 벌여야 했었다는 점도 러시아군의 패전 원인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러시아의 팽창을 원치 않았던 미국 및 영국 등이 일본을 뒤에서 밀어주었다는 점 등도 원인에

들어간다.

러일 전쟁(露日戰爭 )은 1904년 2월 8일에 발발하여 1905년 가을까지 계속된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의

전쟁으로,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러일전쟁의 주요 무대는 만주 남부, 특히

요동반도와 한반도 근해이며,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의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제국주의적 욕망이 충돌하여

발생하였다. 러시아는 해군과 해상 무역을 위해 태평양 연안의 부동항을 얻으려 했다.

블라디보스톡은 사용 가능한 유일한 항구로, 여름에 주로 이용되었다. 여순(旅順; Arthur) 항은 연중 사용할

수 있었다. 청일전쟁 이후인 1903년 8월부터 진행된 짜르 정부와 일본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조선에 대한

독점권을 얻기 위해 전쟁을 선택한것이고, 몇 차례의 전투 끝에 주변국들의 예상을 뒤엎고 일본이 승리하였다.

일본은 극적으로 동아시아의 판도를 뒤바꾸어 세계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고, 러시아는 짜르 정부에 대한 불만이

거세지자 1905년 러시아 혁명을 맞게 된다.


1868년의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정부는 서양의 사상, 기술적인 진보, 풍습 등을 받아들이려 했다.

19세기말, 일본은 짧은 시간 내에 고립으로부터 벗어나 근대화된 산업국가로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일본은 서양의 열강과 같은 세력으로 인정받기를 바랐다.

주요 열강 제국인 러시아는 동쪽에 대한 야망이 있었다. 러시아는 1890년대에는 지방의 나라들을 흡수하면서

중앙 아시아를 가로질러 아프가니스탄에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서쪽으로는 폴란드에서

동쪽으로는 캄차카 반도에까지 뻗어 있었다.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톡에 이르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놓으면서

이 지역에서의 영향과 존재를 굳건하게 하려 하였다.

청일전쟁(1894년 ~ 1895년)에서 일본이 승리하였고,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 4월 17일)이 체결되어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고 대만과 요동반도를 일본에 양도해야 했는데, 요동반도에는 뤼순(Arthur)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쨌든 러시아, 독일 제국, 프랑스의 서방 3개국은 삼국간섭(1895년 4월 23일)을 적용하여

요동반도와 여순항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도록 압력을 행사하였다.

1897년 12월, 러시아 함대가 처음 여순항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3개월 후,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협정이

맺어졌고, 이에 따라 러시아는 여순항과 대련만을 조차하여 주변의 물을 이용할 수 있었다. 러시아로서는

부동항을 얻는 것이 전략적으로 중요하였고, 1년 후에는 이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하얼빈에서 심양을 경유하여

여순항에 이르는 철도(동청철도)를 놓기 시작하였다. 대련과 여순역이 화재로 소실되자, 러시아는 의화단으로부터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만주를 점령하였다.

이 시기에, 일본군은 러시아와 중국에 보호 협정을 맺은 조선을 빼앗으려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와의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이 러시아군을 몰아내기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였고,

러시아의 만주에 대한 권한을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권한을 인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러시아는 만주에 대한 독점권과 한반도의 북위 39도 이북에 대한 중립지역 설정, 한반도의 군사적

이용 불가를 주장하였다. 그 동안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하던 영국과 영일 동맹(1902년)을 맺었는데,

이는 "러시아가 일본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러시아와 동맹을 맺는 나라가 있으면, 영국이 일본의 편으로 참전할

수 있다" 라는 내용이었다. 이로부터, 러시아는 독일이나 프랑스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영국의 위협을

감수해야 했다.

그 후 러시아와 일본의 교섭이 진행되었으나, 일본이 1904년 2월 4일부로 협상 중지를 선언했다.

일본은 2월 초에 마산포와 원산 등에 일본군을 상륙시키는 등, 전쟁에 대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일본은 1904년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하여 선전포고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선전포고에 앞서 2월 8일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의 극동함대, 2월 9일에는 제물포항의 두 척의 전함을 공격하였다. 짜르인 니콜라스 2세는 일본의

공격 소식에 아연실색하였다. 그는 일본이 선전포고 없이 전쟁을 걸어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장관들도 일본이 전쟁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투가 있은 지 8일 후

전쟁을 선포하였다.

대한제국은 이미 1904년 1월 23일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포하였으나, 서울을 점령한 일본의 강요로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만주의 남서부의 요동반도에 위치한 여순항은 러시아에 의해 주요 해군기지로 요새화되었다. 아시아 본토에서

전쟁을 벌이기 위해 바다를 손에 넣는 것이 필요했으므로, 일본의 첫 군사 목표는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함대를

없애는 것이었다

1904년 2월 4일, 수십 척의 러시아 태평양 함대가 여순항을 떠났다는 정보가 일본에 입수되었다.

2월6일 아침, 도고 헤이하치로제독은 사세보에서 제물포의 육군 상륙과 여순항의 공격을 목표로 함대를 발진시켰다.

2월 8일 저녁, 도고 제독이 지휘하는 일본 함대가 여순항의 러시아 군함에 대한 기습적인 어뢰 공격으로 전쟁을

개시하였다. 공격에 두 척의 전함이 크게 파손되었다. 이러한 공격은 다음날 아침 여순항 전투로 발전했다.

수 차례의 결판나지 않은 해상 전투가 이어졌으나, 도고 제독은 항구의 해안 포대로부터 보호받는 러시아 함대를

충분히 공격할 수 없었으며, 러시아 해군은 1904년 4월 13일 스테판 오시포비치 마카로프 제독이 사망하여

어쩔 수 없이 항구를 떠나야 했다.

어쨌든, 이들 전투는 약 3천명의 일본군의 제물포 상륙을 감추어 주었으며, 일본 군대는 인천으로부터 이동하여

서울을, 그리고 조선의 나머지 부분을 점령하였다. 당시 제물포 앞바다에는 각국의 전함들이 있었고 일본 해군에

항의하였으나 오히려 위협을 받고 피신하였으며, 2월 9일 오후까지 14:2로 벌어진 일본 해군과 러시아 해군의

전투에서 러시아 해군의 정예함인 바략함과 카레이츠함은 자침 또는 자폭하였다.

1904년 2월 12일, 러시아 공사가 철수함에 따라, 대한제국과 러시아는 국교가 단절되었다

월 말, 이테이 쿠로키가 지휘하는 일본 육군은 러시아군이 점령하고 있는 만주를 향해 압록강을 건널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단기간에 만주 지배의 발판을 얻으려는 일본의 전략과는 달리, 러시아는 당시 이루쿠츠크 부근

까지의 미완성인 긴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수송되는 지원병력을 기다릴 시간을 확보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1904년 5월 1일, 압록강 전투는 러일 전쟁의 첫 육상전이 되었고, 일본 군대는 저항 없이 강을 건너 러시아의

거점을 공략하였다.

일본 군대는 만주 해안 여러 곳에서 상륙하여 일련의 교전을 통하여 러시아군을 여순항으로 몰아내었다.

1904년 5월 25일의 남산 전투를 포함한 이러한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방어에만 전념하여 반격하지 않았다.

일본은 러시아의 여순항 사용을 막으려 했다. 2월 13일 ~ 14일, 일본군은 시멘트를 채운 증기선 일곱 척을

해협 깊숙히 침몰시켜 여순항을 봉쇄하려 하였으나, 배가 너무 깊게 가라앉아 성공하지 못했다.

3월, 부제독 마카로프(Makarov)는 제1 러시아 태평양 소함대를 맡아 여순항의 봉쇄를 돌파하려 했다.

1904년 4월 12일, 두 대의 러시아 노급전함, 기함 페트로파블로브스크(Petropavlovsk)와 포베다(Pobeda)호가

여순항 밖으로 빠져나갔으나, 일본군의 기뢰가 폭발하여 페트로파블로브스크는 곧바로 침몰하고,

포베다는 수리를 위해 항구로 견인되어야 했다. 가장 유능한 러시아의 전략가였던 마카로프 제독은

페트로파블로스크에서 사망하였다.

러시아 군대는 일본의 방어적인 기뢰 설치 전술을 받아들였다. 1904년 5월 14일, 두 척의 일본 전함,

야시마와 하추세가 여순항 바깥쪽에 러시아군이 설치한 기뢰에 피해를 입었다. 각각은 적어도 두 발씩의 기뢰와

부딪혔다. 야시마는 450명의 승조원과 함께 수 분 안에 가라앉았고, 하추세는 수 시간 뒤에 견인되었다.

6월 23일, 러시아 제독(Wilgelm Vitgft)의 지휘하에 소함대가 전투가 시작되었으나, 실패하였다.

6월 말, 일본의 포병이 항구를 포격하였다. 그리고 오랫 동안 여순항을 봉쇄하였다.

1904년 8월 10일, 러시아 함대는 다시 포위를 돌파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공해에 닿기 전에 도고 제독의 전함으로 구성된 소함대와 마주친다. 러시아에는 8월 10일의 전투, 흔히

황해해전(Battle of the Yellow Sea)으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양측은 포격을 주고 받는다.

도고 제독은 또 다른 러시아의 전함이 태평양으로 파견될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전투는 결정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일본은 두 척의 전함을 러시아 기뢰로 잃어, 한 척만이 남아 있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전함들은 함포를 계속 주고 받았으며, 러시아의 기함인 체사레비치(Tsesarevich) 전함이 함교에 직격탄을 맞아

함대 사령관인 비트게프트(Vitgeft) 제독이 사망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러시아 함대는 다시 여순항으로 향하게

되어, 양측 모두 침몰한 전함이 없었지만 러시아는 다시 여순항에 머무르게 되었고, 일본 해군은 러시아 함대에

대항할 전함이 여전히 건재했다.

끝내 여순항에 있던 러시아의 전함들은 포위한 육군의 포격으로 침몰되었다. 육지로 포위된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시도 또한 실패하였다. 8월말의 요양(遼陽) 전투 후 러시아군은 선양(瀋陽; 심양)으로 후퇴하였다. 여순항은

결국 주둔군 지휘관이 상부와의 의논 없이 일본에 항구를 양도함으로 1905년 1월 2일 함락되었다.

러시아의 제2태평양함대(발틱함대)는 여순항을 구하기 위해 29,000 km 를 여행하였으나, 뤼순항이 함락

되었다는 소식은 마다가스카르에 있었던 함대의 사기를 꺾었다. 로체스트벤스키(Rozhestvensky) 제독의 유일한

희망은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는 경로는 3가지가 있었는데, 한국과 일본

사이의 쓰시마 해협을 통과하는 길은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었으나, 일본에 매우 가까워 가장 위험한 길이었다.

토고 제독은 러시아군의 진행을 알아차렸고, 여순항이 함락되어 제2·제3태평양함대 는 극동의 유일한 러시아의

항구인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할 것을 알았다. 전투 계획이 세워졌고, 군함들은 러시아 함대를 잡기 위해 수리되었다.

일본의 연합함대는 처음에는 6척의 전함으로 구성되었으나 당시에는 4척이 남아 있었으며, 순양함, 구축함,

어뢰정은 그대로였다. 제2태평양함대는 4척의 보로디노급 신형 전함을 포함하여 8척의 전함, 순양함, 구축함,

기타 함선까지 총 38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5월말, 제2태평양함대는 블라디보스톡을 향한 여행의 막바지에 있었다. 불행하게도, 러시아군의

병원선(hospital ship)이 불빛을 노출하여 일본의 무장한 무역순양함 시나노 마루호 에 발견되었다. 이 사실은

무선으로 토고의 사령부에 알려졌고, 연합함대는 곧 출격을 명령받았다.

여전히 정찰로부터의 정보를 받으면서 일본군은 러시아 함대의 위치를 알 수 있었고, 러시아 함대의 T를

가로지를 수 있었다. 일본군은 5월 27일 ~ 28일에 러시아 군대와 교전하였다. 러시아 함대는 사실상 전멸되었고,

8척의 전함과 많은 수의 작은 함정들, 5,000명 이상의 인원을 잃었고, 일본군은 3척의 어뢰정과 116명의

인원을 잃었다. 러시아군은 단 3척의 함정만 블라디보스톡으로 빠져나갔다. 쓰시마 해전 후, 일본군은

사할린 전체를 점령하였고, 러시아는 평화 회담을 청해야만 했다.

러일 전쟁당시 만주지방의 러시아 육군은 연패당하면서도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으나, 러시아내에서는

이미 혁명조직이 공장노동자는 물론 일반시민이나 군대안에도 파고들어와 있었다. 강성했던 러시아 정부도

더 이상 전쟁을 진행시키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것은 그대로 포츠머스 평화조약 으로

가는 길이 되었던 것이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 전쟁에 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이 멋대로 무시했으며 영국에 든든한 후원을 받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미국 중재하여 두 나라는 회담

끝에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과 북위50도 이남의 사할린 섬을 획득하게 된다.

러일전쟁에 앞서 러시아와 일본의 대내외적 상황을 보면 이 전쟁은 러시아의 패색이 짙은 전쟁이 였다.

러시아는 18세기 초반부터 부동항(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을 차지하기 위해 남하정책을 실시하면서

영국, 프랑스와 끊임없는 갈등과 충돌을 반복했는데 이러한 갈등이 크림전쟁이 되었고 크림전쟁

(영국*프랑스*오스만투르크제국 VS 러시아)에서 러시아는 패배하게 된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남진하여 영토를

확장하려는 러시아를 견제하게 되고, 이런 가운데 러시아는 지리적 조건이 좋은 조선에 야욕을 들이게 된다.

이에 일본과 맞서게 되는데, 일본은 당시 세계 최강인 대영제국과 동맹을 체결(1902년 영일동맹)하여 든든한

빽을 두었으므로 러일전쟁 당시 일본은 영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근대화와 더불어 민심이 안정된 일본과 달리 러시아는 표면만 근대화이고 내면은 이미 타락한 국가였다.

백성들인 얼어죽거나 굶어죽고 병사와 노동자들의 불만은 끊이지 않았으나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한 황실일가는

호화로운 생활에 근대화에의 의지가 전혀 없었으며 1904년엔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당이 분열하고,

1905년 1월에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러시아 국민들은 차르(황제)와 그 일가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된다.

노동자들과 백성들이 니콜라이 2세의 초상화를 들고 "위대한 차르"에게 "먹을 것"을 달라며 평화로운

가두행진을 하지만 니콜라이 2세는 이를 잔혹하게 진압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냈고 이에 국민들은 반감했으며

또한 러일전쟁의 패배는 대내적으로 굶어죽는 러시아와 잘사는 황실, 대외적으로는 덩치만 큰 힘없는 나라

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며 이후 러시아는 1917년 혁명이 발발하여, 황제일가가 모두 처형되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서게 된다.

탈아입구 를 주장하며, 아시아를 무시하고 서구열강과 친해지며 열강 따라 잡기에 온 힘을 다한 일본에 있어서

러일전쟁의 승리는 서구 열강이 일본을 자신들과 동등한 열강의 주역으로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이들의 탈아입구는 이때부터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기치로 바뀌게 된다.

즉 눈이 파란 서양인들은 최초로 이겼기에 서양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자처함과 동시에

이면엔 아시아의 맹주로 모든 아시아를 식민지화 시키려는 야욕을 가지게 된다.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포스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이 공개적으로 제국주의 열강 일원이 되는것이라면,

뒤에선 가쓰라 태프트 조약을 통해 한국을 일본에게 양도하고 필리핀을 미국에게 양도하는 미일간 암묵적인

거래가 이루어진다.

이렇듯 자본주의와 새로운 시장의 개척이라는 식민지 쟁탈전인 제국주의의 결합은 미국과 일본을 하나의 동맹국

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시대에 고도로 발전하는 자본주의 앞에 발생하는 폐단을 비판하던 자가 등장

하였으니, 그가 칼 맑스다. 맑스는 자본론을 발표함으로 자본주의의 단점을 지적하고 극도의 빈부격차에 따른

다수의 노농자 계급의 지지를 받는다. 이러한 칼 맑스의 주장은 부패가 만연한 러시아 내에서 볼셰비키 혁명의

출발점이 되고 레닌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가 성립되기에 이른다.

많은 이들이 착각하고 있는것이, 과거 구 소련의 사회주의 국가가 무력으로 중국을 공산화 시키고 동유럽 및

여러 국가로 사회주의로 만든것으로 알고있다.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의 출현은 그 시기 자본주의 체제의 엄청난 빈부격차와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에 대한

부르주아(자본가)계급의 탄압과 착취로 인해 필연적으로 생겨난 결과물이라고 할수있다.

이러한 사회주의 라는 기치 아래 자본가에 의한 사회 운영이 아닌 1당 혹은 독재자에 의한 변형적 제국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러시아의 레닌, 이탈리아의 무솔리니(파시즘), 독일의 히틀러(나치즘) 등이 등장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이 단순하게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하여 시작되며 독일의 팽창을 막기 위한 미.영.러 연합군의

전쟁이라면(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115043061&qb=7KCcMeywqCDshLjqs4TrjIDsoITsnZgg67Cw6rK96rO8IOybkOyduA==&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gLIsrwoi5UNssZ%2BPxG8sss--510066&sid=TN6AS@JT3kwAABOmXcA)

그 후 미,영,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국가와 변형된 독재 국가간 대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세계 2차 대전의 출발점이라고 보면된다. 우리가 여기서 의문을 가져야 할것은 미국에 의해 개항되고 청일 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미국과 영국에게 많은 원조를 받은 일본이 왜 이탈리아와 독일 등과 3국 조약을 맺어

미,영,프,러시아,중국과 전쟁을 했느냐 이다.

이 시기의 이해관계를 보면, 세계의 중심은 유럽이였는데 유럽의 서쪽으로 진출하여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독일과 이탈리아, 그러한 독일과 이탈리아를 막으려는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구도에서 보면 이해가 쉽다.

영국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양측에서 압박하고자 러시아와 조약을 맺었고, 일본은 과거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3국 압력으로 인해 요동반도를 청나라에게 다시 반납하고 대만 땅만을 취하게 된것에서부터 러시아에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서구 열강과 동등한 위치라고 자부심을

가진 일본이 유럽에서 아둥바둥거리며 다투고 있는 영.프.러-독.이 의 대결구도는 절호의 기회였다.

미국은 태평양이라는 커다란 바다를 사이에 두고있기에 큰 문제가 되지않았다. 러시아 역시 영국과 프랑스의

협력으로 독일과 이탈리아를 양측에서 압박하고있는 상황이라, 육군의 주력은 동유럽에 몰려있고, 혹한의

시베리아와 만주지역은 러시아의 군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였다. 따라서 러시아의 가장 큰 걸림돌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기고만장한 일본이였다.

일본 역시 국공내전이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의 혼란을 틈타 만주땅을 흡수하고, 가쓰라 태프트 조약을 통해

미국에 패권을 넘긴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를 정벌하여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것이 러시아였다. 이러한 이해관계는 일본과 러시아를 진영은 다르나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는것으로 해결된다.

지금의 우리는 일본에 천황이라는 존재가 있다는것을 알고있으며, 조금 더 일본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는

현재 일본 천황이 아키히토 라는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메이지유신 이란 뜻을 통해 메이지 천황이라는

존재도 알고있으나, 가장 중요한 히로히토(쇼와)천황을 모르는 사람은 많다.

1901년부터 1989년까지 일본의 천황의 위치를 지킨 쇼와천왕은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식민지 지배자였고,

메이지부터 내려온 천황=국가 라는 공식과 신격화를 더욱 격상시켜 자국민에게 일방적인 충성을 강요하며

xx특공대라 불리는 카미카제를 필두로 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전범임과 동시에, 전범중 가장 최장수 그리고

일본인에게 가장 존경과 사랑을 받는 천황이다.


뭔가 아니러니 하지 않는가? 이제부터 일본이라는 나라 전체가 얼마나 모순 투성으로 이루어진 집단인지

파해쳐보고 지금의 우리의 모습도 얼마나 한심해 보이는지 알아보자.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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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날 10-11-30 15:27
   
대학생들 Paper로 도용하면 죽일거 같은데요...ㅋㅋㅋ
     
객님 10-11-30 17:37
   
아직 더 있는데...결말을 볼려면...계획은 이정도 분량으로 6부작 쓰는건데..

너무 길어서 안되겠음 4부작 으로 마무리 지을까 생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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