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바깥쪽에도 조선의 영토가 있었다. 이를 증빙해주는 조선시대의 기록들이 남아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꼽아보겠다.
1. 세종 1436년, 세종실록에는 파저강의 동쪽은 우리의 영토라는 기록이 있다.
여러 사료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파저강은 압록강 북쪽에 있는 강이다. 일반적으로 현재의 혼강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압록강 바깥쪽에도 조선의 영토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 연산군일기(1497년)에서는 압록강 바깥에 이산(理山)이라는 조선의 행정구역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포 근처의 고산리, 황성평에서 머물다가 26일에 압록강을 건넜다. 60여리를 나아가니 이산군(理山郡)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산(理山)은 조선시대 행정구역이라고 주석이 달려 있으므로, 압록강에서 북쪽으로 24km~30km정도 올라가면 이산군(理山郡)이 존재하는 것이다.
3. 중종 1523년, 만포 첨사 이성언이 국경지대의 여진족 실태와 사군(四郡)운영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진족이 파저강 동쪽으로 많이 와 거주했다. 그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거주지역을 확대시키고 있는 와중이었다. 점차 사군(四郡)이 위치한 곳까지 다가와 거주해 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야로강 남쪽 땅으로도 점차 들어와 살기 시작한다.
앞으로 삼수(三水)에서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여진족이 들어와 살지도 모른다.
국경 경계를 게을리하면 압록강 동쪽으로도 출입하게 될지 모른다.
이 기록으로 사군(四郡)이 압록강 바깥에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파저강 동쪽에 여진족이 살고 있다. 점점 사군(四郡)이 위치한 곳까지 다가와 살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삼수, 의주, 압록강 동쪽에 여진족이 없기 때문이다.
사군(四郡)은 여연, 자성, 무창, 우예인데, 세종시기에 여진족을 정토하고 설치하였다.
삼수(三水)에서 의주(義州)까지 이어지는 행정구역 바깥에 사군(四郡)이 있었던 것이다.
4. 승정원일기(1734년)에는 건주위(建州衛)에서 폐사군(廢四郡)이 300리가 채 안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민환(1573~1649)의 건주견문록에는 흥경(興京)에서 창성까지 400여리, 흥경(興京)에서 만포까지 440여리라고 했다.
흥경(興京)은 후금의 수도이다. 만주 여진족들의 본거지이다. 건주위의 중심지는 흥경(興京)이다. 이 기록에서 말하는 건주위는 흥경(興京)으로 자연스럽게 판단해볼 수 있다.
창성과 만포는 현재 압록강 근처에 있는 군명(郡名)들이다.
현재의 압록강에서 100~140리 북쪽에 폐사군(廢四郡)이 있었던 것을 알게 된다.
당시 10리는 4.8km정도 된다. 현재는 10리를 4km로 본다. 40km~70km 북쪽에 있었던 것이다.
5. 승정원일기 영조 10년(1735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만포 상류에는 삼강구비강(三江仇非江)이 있는데, 이 강 가운데에 섬이 하나 있다. 이 섬은 우리 땅과 더 가까워서 우리 영토라고 한다.
만포는 압록강변에 있는데, 만포 상류에 삼강구비강이라는 압록강 지류가 흐른다. 청나라와 우리나라 가운데 우리 쪽하고 더 가깝다고 했으니, 압록강 바깥쪽에 있는 영토이다.
다음에는 조선초기에서 조선중기에 압록강의 위치가 변화하는데, 그에 대해서 다뤄보도록 하겠다.
1. 세종실록 73권, 세종 18년 윤6월 19일(1436년)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806119_002
姿猪一江, 源出長白, 爲我國紀, 自江以東則爲我之境, 自江以西則爲彼之居, 自義州至閭延, 其間相距百餘里。
2. 연산군일기 28권, 연산 3년 10월 7일 (1497년)
http://sillok.history.go.kr/id/kja_10310007_002
二十五日, 臣乘舟, 夕宿高山里。 甫下土等越江宿皇城坪。 二十六日, 臣越江, 與甫下土等由滿車路, 行十餘里, 于羅山城 野人十一來迎。 又行五十里許, 至理山飛羅野宿。 【理山我國郡名。 胡語謂澗水爲飛羅】 二十七日, 贈于羅山城 野人十一各綿布一匹, 紙二卷, 遂偕行。 僅十餘里, 有地名曰三岐, 其東北有捷徑, 乃指建州衛路也。 其西有溪水, 卽理山飛羅上流也。 沿此溪有小徑, 乃指理山路也。
3. 중종실록 49권, 중종 18년 12월 11일(1523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JT_K0_A18_12A_11A_00020_2005_025_XML
婆猪以東虜居之盛, 近尤甚焉。 閭閻撲地, 耕種地窄, 漸至列居四郡。 也虜以南亦漸來居, 上自三水下至義州, 將爲夷虜之居, 不但此也。 我國力不能禁, 隔江相處, 備知虛實。 乘時動發則臣恐鴨綠以東, 又復有出入之勢。
4. 승정원일기 801책, 영조 11년 5월 26일(1735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U0_A11_05A_26A_00210_2020_232_XML
則江界廢四郡, 與淸人所謂建州衛, 相距不滿三百里之近
이민환(1573~1649) 紫巖集卷之六, 雜著, 建州聞見錄(간행 1741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309A_0070_010_0010_2003_A082_XML
自昌城至奴城四百餘里。其間拜東葛嶺。牛毛嶺。極高崚阻長。自滿浦至奴城四百四十餘里。
5. 승정원일기 774책, 영조 10년 2월 29일(1734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U0_A10_02A_29A_00240_2020_206_XML
喆輔曰, 滿浦上流三江仇非江中, 有一島, 與我地稍近, 故其島屬於我國, 而島中樹木茂盛, 故彼人結幕依接, 與玉洞民人等, 尋常來往, 多有潛商通貨之弊, 事極可駭矣。此島旣是我地, 分付滿浦僉使, 斫盡其樹木, 俾不得止接, 似好矣。上曰, 自備局分付, 可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