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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27 23:35
[기타] 광개토호태왕과 비려(碑麗)..호태왕, 30만 비려군 대승한 곳은 ‘산서성 운성염지’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017  

http://blog.daum.net/dandakhan/16603763

성헌식의 ‘대고구리’…광개토호태왕과 비려(碑麗)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기사입력 2015-09-26 20:11:16


-전략-


집안에 서있는 호태왕 비문 1면 7행에는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碑麗不息征旅躬率往討 過富山負山至鹽水 攻破其三部族六七百營 牛馬羣羊不可稱數 於是旋駕因過襄平道 東來候城力城北豊五遊觀土境田獵而還”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그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번역문) 영락 5년 을미년(395)에 비려(碑麗)가 끊임없이 침공하므로 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했다. 부산(冨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까지 이르러 그 3개 부족과 6~7백 군영을 깨뜨리니 (노획한) 소·말·양떼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어가가 개선하면서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쪽으로 오면서 후성(候城), 역성, 북풍, 오유에서 땅의 경계를 보고 사냥을 하고 돌아왔다.
위 비문의 내용은 <고구리사초략>에 “영락 5년(395) 을미 2월, 비리(卑離)가 점차 왕의 정치(王化)를 따르지 않기에 파산(叵山)·부산·부산을 지나 염수까지 이르러 친히 정벌했다. 그들의 부락 700여 곳을 깨뜨렸고 노획한 소·말·양·돼지가 엄청나게 많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호태왕의 이 위대한 업적은 이상하게도 <삼국사기>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비려의 30만 대군을 격파한 호태왕
호태왕이 정벌한 상대가 공적비문에는 비려(碑麗) 또는 패려(稗麗)인 반면에, <고구리사초략>에는 비리(卑離)라고 기록되어 있다. 글자는 서로 다르나 발음이 서로 비슷해 같은 나라를 시대별로 다른 글자로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려라는 나라는 호태왕 비문에만 있는 반면에, 비리는 여러 사서기록에 있는 소국이라는 점이 다르다. 사학계에서는 이 비려를 거란의 일족이라고 말하고 있다.
비리국(卑離國)은 남북 5만 리 동서 2만 리 강역의 환국(桓國)을 구성하는 12개국 중 하나이고, 또한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 한(韓)의 3종인 마한, 진한, 변한 중 마한을 구성하는 50여개 나라에 속해 있는 소국으로, 비리국 외에 감해(監奚)비리국, 내(內)비리국, 벽(辟)비리국, 모로(牟盧)비리국, 여래(如來)비리국, 초산도(楚山塗)비리국 등이 있어 다 합치면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통상적인 해석은 호태왕이 비려를 정벌한 이유를 不貢 즉 조공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번역했는데, 그보다는 不息征旅로 읽히므로 비려가 끊임없이 침공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조공을 안 바쳤다는 이유로 대제국의 태왕이 직접 정벌을 나섰다는 것은 어패가 있으며, 비려가 끊임없이 고구리를 침공했기 때문에 호태왕이 친히 정벌을 결심했다고 봐야 그 이치에 합당할 것이다.
또한 일제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은 3개 부족(部族)을 3개 부락(部落)으로 축소시켜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그야말로 억지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6~700영(營)의 규모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도 없이 그냥 병영(兵營)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겨우 3개 부락과 병영을 정벌하기 위해 호태왕이 직접 친정을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 아니겠는가? 지난 컬럼에서 언급했다시피, 8천 백제병사의 목을 벤 패수에서의 승전도 공적비문에 들어갈 정도가 아니었음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하겠다.
호태왕이 비려를 공격해 격파한 전과가 6~700영(營)이라고 하는데, 영(營)은 현대의 군대편제상 대대급 부대로 병력은 약 500명이다. 따라서 호태왕은 비려를 공격해 6~700영 즉 30만 명 이상의 적군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기에, 이는 가히 공적비문에 새겨질만한 엄청난 전과였던 것이다.
고대 군대의 운영제도는 십오제(什伍制)를 기본으로 하였고, 전투부대의 기본단위는 500명의 영(營)이었다. 영의 상급부대로는 5개 영의 2,500명을 1개 군(軍)이라 했고, 10개 군의 25,000명을 상(廂)이라 했다. 영의 하급단위로는 100명을 도(都)라고 했으며, 그 아래는 십장(什長)이라 하여 10명을 통솔했다고 한다. 참고로 일본군의 편제에도 분대장급인 십장과 오장이 있었다.
 
호태왕이 대승을 거둔 염수는 어디인가?
호태왕이 대승을 거둔 염수는 과연 어디일까? 단재 신채호선생은 “부산(負山)을 감숙성 서북쪽의 아랍선산(阿拉善山)이라 했고, 염수는 ‘몽고지지’에 의하면 소금기가 있는 호수나 강이 허다한데 아랍선산 아래에 길란태(吉蘭泰)라는 염수가 있어 물가에 늘 2자 이상 6자 이하의 소금덩이가 응결된다고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대개 광개토태왕의 발자취가 감숙성 서북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고구려 역사상 유일한 원정이 될 것이다”라고 <조선상고사>에서 밝혔다.

그런데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에 의하면 5년 을미년(395)에 호태왕이 친히 염수까지 이른 때가 2월이며, 백제의 진무가 쳐들어오자 태왕이 직접 기병 7천을 몰아 패수(浿水)의 북쪽에서 8천여 수급을 벤 때가 8월이다. 불과 6개월 사이에 태왕의 친정이 두 번 있었다면, 두 지역은 서로 가깝게 위치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기록에 단재선생의 염수비정을 대입하면 호태왕이 2월에 염수에서 비려를 친정한 후, 8월에 패수에서 백제와 친히 전쟁을 치렀다는 말인 것이다. 개인이 감숙성 서부에서 하남성 패수까지 걸어간다면 6개월이면 되겠으나, 대규모 전쟁 그것도 태왕이 친정하는 전투부대가 2월에 감숙성 서부에서 싸운 후 8월에 하남성 패수에서 전쟁을 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채호선생의 감숙성 염수비정은 잘못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호태왕이 비려를 정벌하기 위해 간 염수는 어디일까? 중국에는 여러 곳에 소금이 생산되는 호수가 있다. 이 중 유명한 곳으로는 신강성 합밀시 이오현에 있는 염지향(新疆哈密市伊吾县盐池乡)과 단재 신채호 선생이 언급한 감숙성 서부 영하회족자치구 오충시에 있는 염지현(宁夏回族自治区吴忠市盐池县)과 산서성 남부 운성시에 염지가 있다. 이 중 6개월 사이에 호태왕이 친정할 수 있을 정도로 패수와 가까운 곳은 산서성 운성시 염지뿐이다. 필자가 비정을 했는데, 과연 옳을까?
비문에 새겨진 다른 지명으로 이 염수가 어디 부근인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먼저 비문에는 호태왕이 비려를 정벌하고 개선한 길이 양평(襄平)도이고, 동쪽으로 오면서 후성(候城)을 지났다고 새겨져 있다. 이 양평과 후성은 <한서지리지>에서 유주의 요동군에 속하는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염수는 요동군에서 그다지 멀지 않아야 할 것이다.
(辽东郡 요동군) 秦置。属幽州(유주)。户五万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万二千五百三十九。县十八:襄平(양평)。有牧师官。莽曰昌平。新昌,无虑,西部都尉治。望平,大辽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行千二百五十里。莽曰长说。房,候城(후성),中部都尉治。辽队,莽曰顺睦。辽阳(요양),大梁水西南至辽阳入辽。莽曰辽阴。险渎,居就,室伪山,室伪水所出,北至襄平入梁也。高显,安市(안시),武次,东部都尉治。莽曰桓次。平郭,有铁官、盐官。西安平(서안평),莽曰北安平。文,莽曰文亭。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沓氏。
 
또한 호태왕이 비려를 치기 위해 지나간 곳이 파산(叵山)·부산(冨山)·부산(負山)인데, 이중 부산(冨山)이 어디였는지를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중천대제 12년(259) 을묘 12월, 갑자기 위나라 군대가 쳐들어왔기에 위위장군 목원을 시켜 날랜 기병 5천을 추려서 양맥곡에서 대파했다. 위장 위지개의 목과 8천여 수급을 베었고 노획한 병장기와 마필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를 양곡대전이라 한다. 황상은 목원을 현토태수로 삼고 부산(冨山)공으로 봉했으며, 후에 마산(馬山)공으로 바꾸어 봉했다”
즉 부산은 바로 현토군에 있는 지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산서성 남부 임분시 동남쪽에 부산(浮山)현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그곳이 옛 유주에 속한 현토군 지역이므로 그곳이 富山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하겠다.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현토군 지역에는 남소성이 있어야 하는데, 남소성은 신성인 곡옥(曲沃)현의 동북쪽이다. 서로 위치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비리국(離)

《삼국지 》 위서 동이전 한조()에는 우리 나라 고대 삼한의 여러 소국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이들 나라 이름은 우리말의 나라 이름을 당시의 중국 상고음()에 따라 한자로 표기되어 있는데, 우리 한자음에 가까우므로 삼한소국의 위치 비정에 참고가 된다.


한조에 열거된 소국의 이름에는 ‘비리()’가 붙은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감해비리국()’·‘내비리국()’·‘벽비리국()’·‘모로비리국()’·‘여래비리국()’ 등이 그것이다. ‘비리’는 옛 지명 어미에 흔히 붙어 있는 백제의 ‘부리()’, 신라의 ‘벌()’·‘불()’·‘불[]’ 등과 같은 뜻이다. 즉, 평야를 뜻하는 ‘벌’에서 유래된 말로서, 읍락 또는 나라라는 뜻으로 쓰여졌다.


그러므로 비리국은 위에서 예로 든 여러 비리국들처럼 ‘비리’ 앞에 특정한 나라 이름을 나타내는 고유명사가 붙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무슨 비리’라는 특정한 나라를 가리키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혹은 일정한 지역의 ‘비리’ 중 근본이 되는 ‘비리’이기에 특정한 이름을 붙지 않았을 수도 있다. 신라의 6부 이름에 양부()·사량부()·점량부() 등이 있는데, 이 중 근본이 되는 것만 양부라고 한 예와 마찬가지이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한조의 기록순서로 보아 지금의 충청남도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오늘날의 지명에 비정하기는 어렵다. 이 소국은 마한연맹체의 일원으로서 맹주국과 여러 가지 형태의 결속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토착적인 세력기반을 그대로 간직한 채, 3세기 이후까지 개별적인 성장을 지속하다가 백제에 복속되었다. → 마한

[네이버 지식백과] 비리국 [卑離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여(餘)

‘북부여’라고도 한다. 국호인 부여는 평야를 의미하는 벌(···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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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병자 18-04-27 23:49
   
‘북부여’라고도 한다. 국호인 부여는 평야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에서 연유했다는 설과,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의 ‘puhu’라는 말에서 비롯했다는 설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 [夫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중원이나 고구려의 기록상 비려, 비리는 부여에서 파생된 나라명으로 유추해 볼수 있고,
지금의 해석처럼 비려가 거란인이면 부여인도 거란인.
백제, 신라인도 거란인이 되는 것이죠.
고구려역시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으니 고구려인도 거란인인 것이죠.
부여연맹 조차 품지 못하고 타민족이라는데 어찌 고조선이 우리 조상의 나라가 될수있을지...
     
지수신 18-04-29 12:12
   
강단 주류의 똘마니들은 걸핏하면 국수주의, 국뽕을 입에 달고 다니지만
사실 강단 주류야말로 가장 배타적인 국수주의자들이고 가장 지독한 국뽕 중독자들이죠.
남북통일 18-04-28 22:59
   
부산 같은 지명은 고유명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염두하시길 바랍니다.
아마 광개토대왕릉비 기록으로 볼때 비려(패려)는 현 내몽골 어딘가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6시내고환 18-05-01 23:56
   
전해지는 역사서가 하나도 없는게 너무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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