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금나라와 맺은 맹약요??
그 당시 이자겸이 단독적인 행동으로 고려에서 스스로 인정하지 못했는데..
뒤바뀌기 어렵다고요???
그리고 묘청의 난이 수도이전을 주장한 사람이고..
그 수도이전을 명분으로 금나라 정벌론을 주장한 사람인데..
군신관계 극복이라고요?????
고려가 군신관계를 인정했다면 스스로 원나라 때처럼 폐하를 전하로 바꾸고 조종을 사용하지 않고 등 이런 조치를 왜 취하지 않았는데 군신관계가 맹약이고 바꿀수 없다고요???
고려는 신하국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왜곡하지 마십시요.
묘청의 난은 수도이전에 실패한것입니다.
수도 이전후 금나라를 정복해야한다 이 논리인겁니다.
군신관계 극복이 아니고요..
묘청의 난이 실패한 이유도 세력이 커진 금나라와 전쟁을 하면 안된다는 이야기지..
그게 군신관계였다가 아닙니다.
금나라 또한 고려와의 전쟁을 자제했었습니다.
무슨 군신관계 극복이라고 매도하고 있나요??
고려는 신하의 나라를 자처하고 왕을 부를때 전하로 격하시키고 세자로 격하시키고 황제국이 아니기에 조 종을 사용하지 않고 충을 붙인 시기가 바로 원나라 시기입니다.
또 금나라를 멸망시킨 원나라 또한 당시 고려와 전쟁후 고려가 화친을 제의하자..
쿠빌라이칸은 당태종도 굴복시키지 못했던 고려가 자기한테 굴복했다고 좋아했습니다.
만약 금나라의 신하국이었다면 쿠빌라이칸이 이런 발언을 할 이유도 없는겁니다.
님 말처럼 금나라에 굴복한 고려라면 왜 굳이 쿠빌라이칸은 당태종까지 운운했을까요????
또 윤관의 아들 윤언이는 수도이전은 반대했지만 금나라 정복론에는 동의한 인물입니다.
금나라 정벌이라는 표현이 금나라에 대한 고려의 군신관계 극복이라는 표현과
그리 동떨어지지 않는다 여겨지는데.......
그리고 고려보다도 중국왕조들에게 머리를 더욱 굽힌 조선조차도 내부적으로는
조-종의 칭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물론 고려가 요나라-금나라와 맺은 군신관계는 다분히 형식적이고, 대외적인
측면이 컸고 고려내부적으로는 독자적인 연호와 황제 칭호를 사용하는
[외왕내제]를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쿠빌라이칸이 고려태자(훗날의 원종)이 자기를 찾아왔다고 좋아했던
당시 배경에는.... 쿠빌라이칸이 몽케칸(헌종) 사후에 막내동생인 이리그부카와
대칸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어려운 처지에서... 고려태자가 이리그부카 대신
자신을 찾아옴으로써 대외적으로 자신에게 더욱 유리한 명분과 정당성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고려태자(원종)의 선택도 신의 한 수라 여길 정도로 이후
고려-몽골과의 화의조건을 완화시켰음은(적어도 고려의 국체를 보존한) 물론
훗날 원종이 무신정권으로부터 권력을 되찾는데 몽골의 힘을 이용할 수 있었던
큰 배경으로 작용합니다.
금나라 정벌이 군신관계 극복이다???
한 문장을 놓고 해석하는게 거의 일본인 수준인데요..
자꾸 말을 지어내서 왜곡시키려고 하지 말라니까요..
그리고 요나라와 고려가 언제 군신관계를 맺었다고 이러는지????
요나라가 망하게 된 계기 또한 고려와 전쟁에서 대패한뒤 세력이 약화되어서 망한겁니다.
금나라가 고려를 두려워 한 배경 또한..
여진정벌도 이유겠지만.. 당시 가장 군사력이 막강했던 요나라까지 고려에 대파되었다는겁니다.
요나라는 대군을 이끌고 고려와 전투를 벌여서 패전하고 쇠퇴했고..
금나라와 송나라는 협공으로 그 요나라의 패잔병들을 소탕한것이죠..
또 여진이 당시 모든 전투에서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했지만 과거 고려에게 만큼은 탈탈 털리면서 쩔쩔맸다는 기억들도 있었겠고요...
이분 소설이 너무 심하군요ㅋㅋ
군신관계인데 전쟁한다??
거의 왜곡의 경지에 올랐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게다가 쿠빌라이칸이 당태종을 언급한것에 대해서는 일체의 반박도 못하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상식적으로 고려가 금나라 요나라에 군신관계 였다면..
왜 쿠빌라이칸이 당태종까지 끌고 올라가서 언급하냐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님 말대로면그냥 여기저기 모든 나라의 호구인 나라라는건데 대륙을 통일한 몽골이 님이 말하는 그런 호구나라가 굽히고 들어왔다고 좋아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상상력이 너무 심각하군요 ㅋ
쿠빌라이가 고려태자가 자신을 찾아온 것에 대하여 무척 기뻐한 내막을
언급했는데도 반복해서 또 언급하게 만드시네.....!!!
당시 쿠빌라이는 정식 대칸의 자리에 오르기 전이고,
더구나 동생과 대칸 자리를 놓고 쟁투중이던 상황이었고,
더더군다나 당시 대칸자리의 정통성은 몽골제국-몽골고원의 도읍인
카라코룸을 비롯한 몽골-중앙아시아 일대의 몽골인들이 지지했던
쿠빌라이의 막내동생인 이리그부카에게 더욱 정통성에 우위가 있었던 상황이고
쿠빌라이는 정식 쿠릴타이가 아닌 중국방면의 자신을 따르는 몽골인-중국한인
귀족들을 모아놓고 개최한 변칙적인 쿠릴타이를 통해 스스로 대칸에 오른
정통성이 상당히 결여된 사이비 대칸에 불과한 어려운 상황에서...
고려태자가 카라코룸의 이리그부카를 선택하지 않고 자신을 찾아왔으니
천군만마를 얻은 심정에서 한 말이었습니다.
이분 자꾸 말돌려서 딴소리 하시는데..
쿠빌라이가 왜 당태종을 언급했냐니까 자꾸 몽골의 상황을 이야기 합니까????
몽골의 상황과 당태종과 무슨 상관이냐니까요???
천군만마를 얻어서 고구려때부터 한번도 제대로 굴복시켜보지 못했던 고려라고 합니까????
그럼 님 수준으로는 이것은 몽골의 립서비스입니까???
참 모든것을 쉽게 해석하시는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또 그런 몽골의 상황을 이야기 할거면..
고려 또한 당시 두부류로 나뉘게 되고..
고려 조정이 엎어지게 생겨 부랴부랴 몽골에게 화친을 제의해서 몽골과 고려군이 함께 대몽항쟁을 주도했던 삼별초와 맞서싸우게 됩니다.
그 전투가 무려 40년간 이어졌고요..
그 삼별초가 진도에서 항쟁하다가 제주로 옮겨 또 항쟁하고..
제주에서 사라진뒤 오키나와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었죠..
유구왕국의 왕무덤이 고려식 무덤방식이며 고려와장조라고 적힌 고려기와며..
고려식 씨름인 씨마며..
고려식 한복인 도복이며..
고려가 약해진 시기가 바로 이때라고 봐야합니다.
한데 요나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송나라의 재정이 바닥나게 되자 방랍, 송강 등이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100만 대군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송나라는 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금이 병사를 파견해 이들의 진압을 돕습니다.
결국 5년 후인 1125년에 금나라는 요나라를 멸망시키게 됩니다.
아골타의 동생이며 금나라 2대 왕이 된 완안종필 오걸매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금나라가 형이고, 고려가 아우라는 관계를 맺자고 압력을 가합니다.
고려의 문무백관들은 모두 반대하는데, 당시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고 고려황실을 쥐락펴락하고 있던 이자겸의 무리들만 찬성합니다.
이때 과거 여진을 정벌했던 적이 있던 척준경이 앞장을 서게 되는데, 그는 국제정세로 보아 금을 형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불가론을 내세우죠.
이자겸은 정응문을 금나라로 보내 화친을 상의하게 되는데,
이때 금나라는 한 술 더 떠서 고려변방에 귀화하여 살고 있는 여진인들을 모두 송환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자겸의 무리들이 받아들여 성사되는데,
이걸 고려가 정식으로 칭신을 했다느니 할 만한 사항은 아닌 듯 합니다.
정식으로 고려황제가 나서서 한 일이 아니라 반란세력이 주도한 일이니 말이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골타가 왕이고, 윤관이 살아 있었다면 금나라는 그런 식의 무례한 제안은 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 [고려를 조상의 나라로 섬기고 조공을 바칠 것이다. 금나라 백성은 고려에 돌멩이
하나 던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라는 여진족들의 언급은....
아골타가 금을 건국할 시기가 아니라, 바로 이전시기 아골타의 형 오아속이 자도자일
당시 고려에게 빼앗긴 동북9성 일대를 돌려받기 위해서 고려에 약조한 립서비스
의 내용입니다.
2. 송나라 방랍의 난 당시에 금나라군이 개입한 흔적은 없습니다. 다만 송나라군 주력이
방랍의 난 진압에 시간을 허비하느라, 요나라에 대한 금나라와의 연합에 병력동원
시일이 늦어져 이후 연운16주 탈환 및 금나라와의 관계에서의 자리매김에 치명적인
불리함으로 작용합니다.
3. 완안종필과 오걸매는 서로 다른 인물입니다. 오걸매는 금나라2대 황제로 아골타의
동생이며, 완안종필은 아골타의 4째 아들로 오걸매와 완안종필은 삼촌-조카관계입니다.
4. 이자겸이 훗날에는 반란세력으로 규정되었다 하더라도 이전까지는 엄연히 고려의
실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더구나 이자겸의 무력기반인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던 척준경마저도 금나라의 요구를 수용해야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비록 이후에 이자겸이 실각했다 하더라도 전쟁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한 번 맺은
맹약을 뒤집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입니다.
5. 윤관이 활약한 고려-여진간의 전쟁 당시에 3만의 여진군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고려측의 기록에 의하더라도 당시 고려군의 공세로 여진인들 6천을 죽이고 5천을
사로잡았다는 규모이니....이마저도 과장된 전과일 가능성도 다분하며, 민간인들까지
포함한 수치일 확률이 절대적입니다.
11세기 말에서 12세기에 접어드는 시기 추장 [영가]가 이끄는 시기에 완안부
직속병력이 1,000명~2,500명을 넘어서게 되며....
뒤이은 [오아속]이 이끌던 시기 12세기 초 임간-윤관의 고려군의 대결하던 시기에
비로소 완안부 병력이 근 1만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완안부 뿐만 아니라 완안부의 영향력하에 놓은 여러 여진부족들의 장정을
모두 소집한다면 3만 또는 수 만명도 가능하겠지만.....
참고로 이후시기 아골타가 금을 건국할 시기의 완안부병력이 2만을 넘지
못했습니다.
고려-여진 전쟁 당시에 동원된 여진족 장정들이 2만~3만에 이를수는 있지만
이들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만약 여진족군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면 고려가 동북9성지역을 차지하고
난 후에도 끊임없이 고려를 괴롭히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다만 동북9성 지역에 대한 고려-여진간의 전쟁은 당시 고려에게도 지긋지긋하고
피말리는 전쟁으로 다가왔지만... 여진족들에게도 고려가 지긋지긋한 존재로
각인되어 이후 금나라가 요나라는 물론 송나라까지 멸망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더구나 고려가 보주성 문제를 비롯하여 금나라의 권익을 침범하는 경우가 몇
차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묘청의 난과 무신정권 시기 조위총의 난의 경우처럼 고려반란세력이 금나라에
땅을 바치겠다고 접근했었던 경우에서조차도.......
고려를 침공하거나 고려와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한 모습을 보일정도로
결과적으로 고려와 여진족의 전쟁은 고려가 훗날 금나라와의 전쟁을 방지했던
예방적 성격의 전쟁으로 작용했습니다!
자꾸 개인이 난을 일으켜서 독자적인 행동을 해서 추출 당한 인물이 추진한게 맹약이라고 호도 하시는군요..
그럼 왜 님이 말하는 맹약을 채결한 당사자가 추출 되었는데도 금나라는 가만히 있었을까요???
또 고려가 신하국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데 왜 가만히 있었을까요????
제발 그런 왜곡 논리는 안하셨음 합니다.
신하국이 금나라 정복론으로 나라가 온통 떠들썩 했답니까????
금나라와 전쟁을 하냐 마냐라는 상황을 군신관계 극복이라고 호도하시면 안되죠..
고려가 이자겸의 난을 진압한것이..
이자겸의 독단적인 행동을 이행하기 위해서 진압했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게다가 윤관의 여진정벌로 인해서 여진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서 고려를 부모지국으로 섬기겠다고 했는데..
동북 9성을 돌려받기 위한 립서비스였다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상식이하의 수준이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진은 립서비스라고 주장하고..
어떠한 군신관계의 형태도 없었던 고려와 금나라는 군신관계라고 주장하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님이 어떤 부류인지 그냥 딱 나오네요
국서에서도 형인 금나라 황제가 아우인 고려 황제에게.... 라고 나오는데..
군신관계인데 황제인가요?? ㅋㅋㅋㅋㅋ
금나라 태조가 고려에 보낸 국서는 내용은 형과 동생이 바뀌었지만, 동북9성을 돌려줄 때와 유사한 말을 하게 됩니다.
"형인 대여진금국 황제는 아우인 고려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의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
라는 내용이죠.
아골타가 거란과 싸우기 위해 처음 2500명을 규합해 시작했다는 것이지, 그들의 총병력이 그 정도인 게 아닙니다.
원래 여진족은 새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는데, 순식간에 병력이 모이고 흩어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려가 고작 2,3천 명을 상대하기 위해 17만 대군을 동원한다는 게 말이 안 되죠.
방납의 난 때 송나라는 고려에 병력지원을 요청합니다.
고려는 병력을 증파할 수 없다며 거절했지요...
한데 이때 금나라의 강화사절단이 동맹 협상을 하고 완안부로 가기 위해 하북을 돌아가는데, 방납의 반란군 2천 명이 금나라 사신단을 습격하게 됩니다.
이에 금나라 18기병들이 달려와 반란군 2천 명을 전멸시켜 개입하게 되었죠...
"추장 [영가]가 이끄는 시기에 완안부 직속병력이 1,000명~2,500명을 넘어서게 되며....
뒤이은 [오아속]이 이끌던 시기 12세기 초 임간-윤관의 고려군의 대결하던 시기에 비로소 완안부 병력이 근 1만에 이르게 됩니다...고려-여진 전쟁 당시에 동원된 여진족 장정들이 2만~3만에 이를수는 있지만..."
오아속이 이끌던 시기엔 1만 많게는 2,3만명이 될 수도 있다고 하셨군요...
그 뒤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우기 직전 거란과 전쟁할 때 2500명으로 시작하는데, 영가 시기의 2500명과 맞아 떨어져 완안부 규모를 그 정도로 생각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촐라롱콘 한테 먹이주지마세요 엄청난 일뽕입니다
말 자체가 통하지도 않고 자기할말만 하고 나갑니다
일뽕논리에 의거해서 자기가 유식한지 압니다
자기가 논리적인지 아는 덜떨어진 사람이니
상대 안하는게 낫습니다 논리적으로 반박하면 자기혼자 다른말하거나
다른 화제로 돌립니다 한마디로 그냥 ㅂㅅ입니다
9성 반환을 위한 립 서비스에 불과했다면
금 건국후 고려와의 관계를 외교관계 재조정선에서 마무리 짓고 끝내기엔 석연치 않네요.
이미 고려의 위력을 체감했기 때문에 그 약속을 지켰다고 봅니다.
고려, 북진을 꿈꾸다 라는 책소개 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네요.
금나라 제 4대 임금 해릉이 등극한 후 넓어진 영토를 보고 의기양양해하자, 한 신하가 "본국은 강토는 넓지만 천하에 군주가 넷이옵니다. 남에는 송, 동에는 고려, 서에는 서하가 있어 이를 통일해야 진정 넓다 하겠습니다"라고 답한 바 있다.
촐라롱콘인가 저 사람은 그냥 외국인 같은데 어그로 아이디 네요, 상대 안하는게 정신 건강에 좋을듯,,
금나라 건국에 발해인들이 일정한 역할을 했고 금 건국 후에도 금 지배층의 대부분이 발해인이었던 걸 감안하면 발해 멸망후 고려에 망명했던 발해인들과 금 상위 지배층들인 발해인들과의 교류가 있었고 그 당시 금,고려간 서로 우호적이었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인데 선동질하고 ㅈ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