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신 지진에 취약함 ㅋ 지금도 저런거 만들려면 만들수는 있죠 ㅎ 다만 철근을 섞어야 되는 법때문에 일반적으론 못만들뿐.
철근을 섞더라도 튼튼하게 만들면 저렇게 가능한데. 후버댐 같이 대량댐이면서 오래 쓸 건축물에 그렇게 짓고는 합니다.
결국 필요와 돈 문제로 안만드는것이지 그외의 의미는 없다는거.
고대 그리스식 분류로 옥시덴트와 오리엔트를 구별해서 옥시덴트까지만 서양으로 이해한다면 그 서양에 대해서 너무 지나친 환상을 가지진 않았으면 합니다. 그 서양문화의 뿌리는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오리엔트 지역입니다. 거의 왠만한 문화적인 부분들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다 가져와서 발전시킨 것입니다. 단지 옥시덴트가 오리엔트보다 앞섰던 부분은 타 민족과 문명의 것들을 받아들여 종합해서 보편화할 수 있는 인문문화의 전통입니다.
고대 그리스하면 자연과학의 발전했다는것은 알고 있을테지만 그 뿌리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입니다. 수학도 다 오리엔트지역에서 먼저 발전해서 자기네들이 나중에 그 지식을 전수받은 것입니다. 천문과 관련해서도 별자리하면 그리스 신화를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도 그 기원은 메소포타미아입니다. 그걸 가지고 와서 그리스에서 이야기를 덧붙인것 뿐이에요. 오늘날 역법체계의 기원도 고대 이집트입니다. 현재 양력의 기초가 된 율리우스력도 이집트의 학자의 조언으로 이집트의 양력을 기초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율리우스력 이전(bc 45년 이전)까지 로마의 역법은 복잡하고 낙후된 방식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역법은 태음력이 기초였고 메포포타미아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알파벳 문자도 아시다시피 고대 이집트의 문자에서 시작해서 페니키아를 거쳐가서 그리스와 로마에서 오늘날과 거의 유사한 형태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건축도 마찬가지. 로마의 건축기술의 뿌리는 에트루리아(오늘날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입니다. 이 에트루리아 인들도 사실 지금의 터키 지역(리디아)에서 건너간 민족이고 그래서 주요한 건축양식들도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같은 고대 오리엔트 지역의 영향을 받아서 벽돌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다만 에트루리아의 특징이라면 훗날 로마건축을 상징하는 둥근지붕과 기둥사이를 아치형으로 만들었다는 점. 그걸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로마건축입니다. 그럼 그리스의 건축은 굉장히 독창적이냐? 우리가 익히 아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건축기법들도 사실 그 원형은 고대 이집트의 것들입니다. 익히 잘 알고있는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위에 보같은 지붕을 얹히는 방식이 원래 이집트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기법적으로는 사실상 거의 같은 방식입니다. 국사시간에 배우는 배흘림 양식하면 고대 그리스를 떠올리기 쉽지만 그것도 기원은 고대 이집트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문화면에서의 역사적 의의는 고대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선진적인 부분을 흡수해서 자기화한뒤 발전시킨거고 고대 로마는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교류엔 능했엇도 타민족에겐 배타적이었던 그리스와 달리 그들이 정복한 지중해 문명의 각기 최고의 것들을 받아들이고 융합시켜 로마의 특징이기도 한 개방성을 앞세워 자신들을 문화를 전 유럽으로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윗 분들이 말씀하신 내용도 분명 있었기에, 약간의 보강과 그 밖의 이야기들을 해본다면...
사실 중세 극 초기만 하더라도 목욕 문화는 상당히 많이 유지되었습니다. 다만 로마 제국 후반무렵부터 왜곡되어 그러한 것인지, 본래 사교의 장이었던 로마식 공동 목욕에 매음과 매춘적 요소까지 더 해진 상황이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교 문화가 융성해지는 중세 절정기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도시에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해주었던 로마 수도교가 중세 절정기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많이 파괴가 되었습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는데. 중세 초기에는 도시를 대상으로한 전쟁과 약탈이 잦았던 환경상, 외적에 의해 수도교가 의도적으로 파괴 되거나 수도교를 타고 외적이 침입해오는 걸 막기 위해 도시민들이 스스로 파괴해버렸습니다.
여기에 도시가 커가면서 부족한 석재를 가져올 공급처가 마땅치 않아, 일부 유실된 수도교에서 석재를 가져오는 등의 일도 빈번하여. 도저히 복구와 재건이 불가능해진 수도교가 많아졌습니다.
결국 물의 안정적인 공급이 어려워진 가운데, 많은 물을 사용하는 목욕은 점차 사치처럼 취급되었고. 위의 퇴폐적인 부분과 결합하여 목욕을 등한시하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중세 국가나 도시들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살아남은 동 로마 제국은 훗날 야금야금 땅을 빼앗길 때까지도 도로와 수도를 지속적으로 정비하였기에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일부 수도교가 멀쩡한 도시의 경우에도 공동 목욕만 없어졌을 뿐이지, 개인의 목욕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건 기반지식 없이 폄하하기 위해 과소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도 건축에 관하여는 지식이 부족하지만 로마시대의 건축술이 단순히 쌓는다고 표현될 만큼 낮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석재는 분명 목재와 함께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손을 거친 건축 재료이면서, 동시에 그만큼 석재의 가공에서부터 운반, 사용처에 따른 분류법과 건축법, 치밀한 설계와 적절한 부재의 선정 및 활용 등 수반되어 왔습니다. 기초적인 것에서부터만 언급해도 하나하나 수많은 기술과 노하우, 연구와 전승, 교류의 산물인데.
현대 건축술의 기초라도 해도 좋을 내용들이 정립된 로마시대의 건축물들을 무시한다는 건 이제껏 쌓아올린 건축공학의 기초와 그 전반에 대한 폄하와 다를 바 없다고 여겨집니다.
게다가 대제국 정도면 누구나 저렇게 만든다는 것도 참 아이러니한 표현인데. 분명 제국이라고 일컫을 만큼 국력이 있는 국가라면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은 많이들 짓지만. 로마의 건축법은 지중해 전반을 아우르는 여러 민족과 여러 산물, 여러 문화가 총체적으로 집약되었다는 데에서 매우 큰 의의가 있습니다.
그것도 단기적인 결과물을 만들기 위함이 아닌, 천년을 아우르는 제국을 운영함에 있어 그것을 지탱하는 시스템이라는 의미에서도 상당히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공공건축의 정의를 세우고, 도시건설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이용자의 편의를 본격적으로 고려하였으며, 건축물의 유지 및 보수와 관리에 대한 본격적인 계획과 실행에 이르기까지 로마 시대 건축물은 상당히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기술적인 의미에서도 단순히 사람을 갈아넣는다고 해서 해결되진 않습니다. 우스갯소리로 공돌이를 갈아넣으면 된다는 요즘 표현이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제대로 굴러가던가요?
대표적으로 건축 설계만 하더라도 고대로부터 있어왔지만, 이것이 대폭 발전하게 된 건 로마시대부터인데. 위의 댓글에서처럼 현대와 같이 건물의 뼈대가 되는 철 골조가 없거나 미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건축물들의 지붕까지 무너지지 않게끔 쌓는다는 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석재 그 특성상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과도한 하중을 분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더 높고 복잡하고, 정교한 석조건축물을 만들기까지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으면서, 그러한 경험이 쌓일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그 토대에서 보다 발전된 형태의 건축법이 도입하게 된 것도 로마시대입니다.
그 산물이 '돔'지붕이고 말입니다. 지진이 잦았던 지중해 특성상 순수하게 석재만으로 내진 설계의 한계까지 끌어올렸는데. 이것의 정점이 성 소피아 성당의 돔이기도 합니다. 그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돔이 올라간 3번째 재건 이후로) 몇 차례 지진에서 무너지는 일 없이 보수만으로도 1500년을 견뎌온 뛰어난 건축물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과거 석조건축물은 그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석재의 특성상 비좁은 실내면적만을 확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석조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넓은 실내 공간을 확보하는 데에 이르게 됩니다. 이게 단순히 인력만 있다고 해서 가능한 일일까요?
로마의 건축물을 과소평가하는 분들은 그 건축물이 건축될 수 있었던 배경적 요인들을 전부 '나라가 강하닌깐, 부유하닌깐, 사람이 많으닌깐'식으로 단순화해서 바라보시는데.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이해를 거부하고 본질을 보지 않으면서 평가하는 건. 결코 평가라 할 수 없는 외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200년전 건물이라면 무시하겠지만, 시간이 고대시대 2000년 전이라는건 무시할 수 가 없죠.
로마 건축기술의 백미는 지금은 몇몇 흔적만 남았지만 서울 한강보다 넓은 폭 1km이상의 도나우강에 군부대 이동용 석조다리 짓고 루마니아지역 다키아 정복하고, 그걸 로마의 트라야누스 석조 원주에 기록까지 한것. 이건 최근 몇백년전까지도 불가능 했을텐데요. 트라야누스때 아폴로도루스라는 천재 건축가가 있어서 지금도 어마어마한게 남아있죠.
스크린샷만의 내용상 약간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는 페르시아 제국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페르시아 제국의 고속도로가 (상대적으로) 오래 유지 되지 못하였고 군사와 통치의 이용에만 그 비중이 몰려있었다면, 로마 제국은 여기에 민간 이용까지 고려하여 도로망을 확충/발전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현대적 의미에서 보다 가까운 건 로마식 고속도로이기에 이를 최초라 볼 수도 있습니다. 후에 페르시아 제국의 방치된 고속도로마저 자신들의 통치에 맞게 개조하여 사용한 것도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콘크리트 또한 본래는 이집트 및 지중해 동부 전반에 걸쳐서 사용되어 왔으나, 대체로 주 원료인 시멘트/석회와 같이 건축에 있어 부재 역할이었고, 그 비율또한 지역마다 시대마다 천차만별일 만큼 통일성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것이 로마 제국에 이르러서 품질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균일화되었고 민간 건축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되면서 '상업화?'라는 의미에서 콘크리트는 로마인들이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건 현대 콘크리트와는 좀 다른 것이었지만 말입니다.
추정되는 원인은 다양합니다. 로마인들만 유별나게 빨리 죽은 것도 아니었고 말입니다. 다만 도시문화가 발달하고 규모가 컸던 로마의 특성상, 한번 도시질병이 발생하면 겉잡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중세를 넘어 근대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해결 붙잡은 문제였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의 질에 있어서도 그나마 상하수도를 갖추고 가급적 수원지나 강의 상류에서 물을 공급받는 등의 노력은 했었지만, 고대 상하수도는 지금과 달리 완전하게 분리된 구조가 아니었고 원시적인 소독법만이 전부였기에... 그리 좋지는 않았을 것으로 여기는 건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