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16년 4.11일[서기1434년]에 임금이 전라도 감사에게 지시하기를,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김인( 金? }이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있을 때 원숭이 여섯 마리를 잡아 길들이게 하여, 지금의 목사 이붕(李鵬)에게 전해 주고 왔는데,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육지에 가져오게 할 것은 없으니, 만일 어떤 사람이든지 와서 주의하여 먹여 기르겠다면 육지로 가지고 나와서 풀이 무성한 섬[島]이나 갯가에 놓아기르게 하되, 혹시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잡아 가지 못하게 하고 힘써 번식하도록 하라.”라는 기록과
세종 1.8년 6.16일[서기1436년]
"제주 안무사(濟州按撫使) 최음산(崔淫山)이 원숭이[ ?子]와 노루[獐] 한 쌍을 바치니,명하여 상림원(上林園)에서 기르다가, 그 뒤에 인천(仁川) 용류도(龍流島)로 옮겨 놓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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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무신의 난'이 일어나자 선비들은 칼끝을 피해야 했다. 많은 선비들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절에 몸을 숨겨야 했다. 19살의 젊은 이인로도 한동안 머리를 깎을 수밖에 없었다.
이인로는 속세를 떠나려고 지리산의 청학동을 찾아 나선 적이 있었다. 대나무 궤짝을 소의 등에 싣고 떠났다. 화엄사를 거쳐 신흥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가는 곳마다 선경이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끝내 청학동은 찾을 수 없었다. 별수 없이 시 한 수를 바위에 남기고 돌아섰다.
"지팡이 움켜쥐고 청학동을 찾으려 했지만
(策杖欲尋靑鶴洞)
첩첩한 숲 속에서는 원숭이 울음소리뿐
(隔林空聽白猿啼)…."
`난데없이' 원숭이 울음소리가 등장한다. 이인로는 정말로 원숭이의 울음소리를 들었을까.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원숭이가 있었을까. 그렇다면 지금은 왜 없을까. 단지 관용적인 표현으로 원숭이 울음소리 운운했던 것이 아닐까.
원숭이에 관한 글은 이규보도 남기고 있다. 이규보는 무신정권에 아부한 `해바라기성'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관리였다. 그가 상서(尙書) 벼슬을 하는 사람의 집에 갔더니 성난 원숭이(怒猿)가 있었다.
"원숭이가 성을 낼 일이라도 있었던지
(猿公有何嗔)
사람처럼 서서 나를 향해 짖고 있다
(人立向我 )."
삼국유사에도 원숭이 이야기가 나온다.
"이차돈이 순교하자 하얀 피가 한 길이나 솟아올랐다. 하늘이 컴컴해졌다. 땅이 진동하며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감천(甘泉)의 샘물이 말라 고기와 자라들이 다투어 뛰어올랐다. 나뭇가지가 부러지자 원숭이들이 떼지어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