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포는 일본 전국상인들이 모여들어 일본인 귀천노약 모두 설치는 노예시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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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처럼 목에 노끈으로 차례로 엮어 묶고
이 끈을 우마가 끄는 달구지에 매달아 뒤따라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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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병들은 전투보다 조선인사냥에 열중하였으며
이렇게 해서 일본으로 끌려간 피랍 조선인은 약 10만 명(일본자료)에
달한다.
이들은 노예로서 일본 농민 대신에 농사를 짓거나 동남아시아 노예로
팔려갔다.
특히 일본 구주에서 온 왜장과 상인들이 이 노예장사 돈벌이에
열중하였는데
진중의 왜장은 40냥을 받고 포로로 잡은 조선 남녀를 일본 상인에게
매매하였는데
미녀는 30냥 더 받았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왜군과 일본 노예상인에 의해서 일본에 붙잡혀간 피로인은
거의 다 삼남(경상, 충청, 전라도) 지방인으로서 임진왜란 때의 10배가
되었다.
그곳(전남)에는 전선 6~7백척이 수리에 걸쳐 가득차 있었고
그 배들에는 조선 남녀와 왜병이 반반씩 있었다.
배마다 조선 포로들의 통곡과 절규의 소리는 바다와 산을
진동시켰다.
일본이 제시한 강화조건이 전부 무시당하고 결렬되자
일본은 조선을 재침하여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이번에는 임진년과 달리 보복전으로 전쟁을 참혹하게 전개하여
닥치는 대로 살육, 방화, 약탈, 파괴를 한다.
그 가운데 사람사냥을 하여 일본으로 끌고 가 노예로 삼고
밑바닥의 힘든 노동에 종사시켰다.
특히 정유재란의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왜병들은 철수를
준비하면서
조선사람들 가운데 젊은 사람들 중심으로 노예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이의 목적은
1) 노예를 팔아서 그 간 쓴 전비를 보상 받는
것이고
2) 정유재란에 끌려온 왜병들은 거의 일본 농민들로서 죽은 사람이
많으므로
귀국 후 농사를 위한 인력보충을 위한 것이다.
이 때 노예로 끌려간 조선인은 약 10만 명으로 추산되며
심지어 규슈 남단 가고시마에 상륙하여 들어 온 조선인만 3만 700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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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노예는 일인당 2.4scudo(포르투갈 화폐단위로서 쌀 두 가마
해당)로서
포르투갈영 마카오에서 다시 유럽으로 가서 전 세계로 팔려 나갔다.
심지어 이탈리아, 피렌체까지 간 노예도 있었다.
이 때 아프리카 흑인노예가 1인당 170scudo에 비하면
조선인 노예 값은 <똥값>으로서 국제 노예 값의 폭락을
가져왔다.
그 수는 6만으로 보고 있으며 덤핑 투매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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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아프리카에서 백인들이 흑인노예를 사고 팔 때는
여자는 처녀이고 젊은 남자는 거세되었다."
남자는 거세되었다...... 남자는 거세되었다...
피가 거꾸로 솟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