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어떤 weeaboo분이 이런 글을 남기셨더라구용 약간 발광 비슷해 보이는 태도로
말 자체가 너무 허황되서 재미있지만 느낀점 한가지는 어떻게든 정신승리는 이어나가는 구나
인데 지금껏 발견한 공통점이라면 약간 망상장애가 있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관찰의 결과 ^^
(1).일단 이게 뭘 근거로 이야기를 하는지는 대충 알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일본의 율령제가 붕괴하면서 각 지역에 무력집단으로의 장원제가 성립하고
각 시스템의 붕괴로 인해 물자의 조달도 역시 같이 붕괴되면서 각 지역간에 협의에 의해 물자 조달을 위해
동전으로의 내납화를 실시하고 동시에 자체적인 동전의 주조및 유통이 어렵자 고려등을 통해
송전등을 수입해서 사용하던 시대를 이야기 하는 것 같은데 ...이게 참 용감하다고 해야하나
그런 느낌이 드는데용 일단 장원영주들의 내납화를 강제하니 당연히 무력지배를 받던 농민들
입장에서는 그에 따라야 했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동전은 외국에 의지한 체제이고 그 현실도
햐야미 아키라교수님의 저서에서 발췌를 하면 [일본의 근면혁명/역자:서울대 정안기]
그러니까 지금 이런 상태를 놓고 뭘 생각을 하는지...대체 중앙정부가 붕괴된 것이
자랑이라는 것인지..게다가 예전에도 적었지만 그나마 이것도 구하기 어려워진 14c부터는 각종 사업이나 불에탄 사찰을 재건하는 목적으로 고려와 조선에서도 동전을 하사해 달라고 일본의 사신이나 승려들이 오기 시작하죠 고려사나 실록에는 이러한 기록들이 공식 사서에만 수십건이 됨으로 당시 사무역이나 밀무역등 통해 일본으로 반출된 실제 량은 훨씬 막대할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는데요 그 간단한 사례로 조선초기 세조실록에만 일본의 공식 국왕의 사신이나 오산의 승려들이 동전을 하사해주십사 하고 요구하는 기록만 총10건이 등장하죵 이중에서 세조는 2번에 걸쳐 1만1500관을 허락해요 그러니까 그 수량을 따지면
1관=100냥
1냥=100푼
1관=10000푼
1만관=1억푼
1만1500관=1150만푼 즉 동전 1150만개를 그냥 줘요
세조실록 7권, 세조 3년 5월 26일 무자 4번째기사 1457년 명 천순(天順) 1년
세조실록 29권, 세조 8년 12월 14일 갑술 1번째기사 1462년 명 천순(天順) 6년
물론 이런 발언을 하기전에 이미 원간섭시기에 교초라고 해서 세계적인 지폐경제권에 통합되어 있던 고려를 두고.. ..뭘 아는게 없으니 일일이 모두 설명하기도 힘드네요 정말...
고려나 조선의 시장및 상업에 대해서는 카이스트의 고동환교수님의 저작이 시중에 출판되어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참고해 주시면 감사^^
두번째는 에도시대인데 에도시대는 기본적으로 삼화화폐라고 해서
에도 막부에서는 초고가인 금을 사용하고 오사카에서는 은을 그리고 절대다수인
백성들은 동전을 사용하여 신분제에 따라 사용하던 화폐를 달리했는데요
대충 그 수량을 보면 에도시대 내내 누적 수량이 18c중반인 명화연간까지는
2199만 관문으로 대략 쌀로 환산하면 약 4~500만석으로 당시 일본 총 추정gdp
4000만석의 10%수준이고 에도말기까지도 전체 gdp에 15~17%가량일뿐인데..
대체 이걸 두고 무슨 상업이 어째서 국력이 어떻다고 하는건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나세요 weeaboo분들....제발
(2).임진왜란시기 일본의 총 석고가 1850만석일때 조선에서 걷으려고 했던 세금만 1200만석으로
이런 계획표를 세우고 실제로 점령지역에서부터 수취한 조세장이 현존하는데
함경도의 6개현에서만 일주일만에 실제 곡물 24만4천석을 걷어들임
불과 인구가 고작 5만명인 지역에서.
(펌/http://blog.naver.com/zajo0/220401760441)
(3)개항후 일본의 수출품 통계
압도적으로 생사(누에고치)나 해산물(주로 다시마나 해삼등) 차가 주종
그나마 공업품이라고 할만한 직물이 수출되기 시작한 시기는 1875년부터인데..
대체 내가 알지 못하는 뭔가 학계에 존재하지 않는 특별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음...
개항후 조일무역의 양상은 흑자를 기록하다 73년 이후부터 조금씩 적자를
기록하는데 당시 일본이 조선에 수출했던 주요 품목은 일본의 제품이 아닌 당시 외교관계가
없었던 영국산 옥양목 즉 셔츠등의 상품을 대리구매해서 조선으로 수출했기 때문에
무역적자에서 벗어나기 시작 즉 이런 중계가 없었다면 계속해서 적자를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