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6年、中宗によって諺文庁は廃止され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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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주장한 것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 후로도 계속 한글은 국가 정책에 사용되어 왔습니다.
성종, 중종 등의 언해(한문 서적을 한글로 번역)를 통한 교화 작업 : 향약집성방, 구황촬요 등 일반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약이나 곡식에 대한 서적을 국가에서 한글로 번역하여 적극적으로 반포했다. 백성들의 실생활에 필요한 내용들을 한글로 번역했다는 것은, 한글의 학습을 권장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왕과 관리층의 교육에 필수적인 보조 자료인 언문 : 헌종 7년 10월 11일 상소문에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원자가 현재 강독하고 있는 책을 다 마치면, 언해에 잘못된 곳이 꽤 있으니 지금 바로 잡아야 하겠습니다."이것은 왕실이나 사대부들이 한문을 배울 때 언해서가 필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조임금의 언문 교지 : 선조 임금은 왜적에게 잡혔거나 빌붙은 백성들에게 꾀를 써서 빠져나오기를 권유하는 교지를 한글로 써서 발표했다. 이것은 국가의 통치자인 임금이 한글을 통해 백성들에게 뜻을 전했음을 의미한다.
국가 포고문을 한문과 언문으로 동시 발표 : 영조와 정조는 구휼(가난 구제)에 관한 윤음을 한문과 언문으로 옮겨서 동시에 발표했다. 비록 백성을 대상으로 실생활에 관한 내용을 적은 글이지만 한글은 한문과 거의 대등한 모습으로 조정의 발표에 쓰인 것이다 .
외교 문서로 활용 : 경종 원년(1720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간 고부사 이이명은 왕비 책봉에 관한 청나라에서의 상황을 언문으로 써서 조정으로 알렸다. 한문으로 썼을 경우 비밀 보장에 대한 고육책에서 나온 것이지만, 언문은 외교문서로 까지 활용된 것이다.
왕실 여성들의 제도적 언문 사용 : 조선 시대 훈민정음 보급의 일등 공로자는 왕실 여성들이다. 왕실의 여성들이 발행한 공식 문서는 언문으로 되어 있다. 수렴청정을 했던 대비나 대왕대비의 글 역시 언문으로 되어 있으니, 이것은 언문으로 된 문서가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같은 명작이 나올 수 있었다.
사대부의 한글 문학 창작 및 한글 작품에 대한 이해 : 정철, 박인로, 윤선도 등의 시조나 가사 작품 및 김만중의 송강 작품에 대한 높은 평가 등은 사대부들 중에도 한글을 한문 학습의 보조도구를 넘어 문학적으로 심취한 이가 적지 않았다는 증좌이다. 그밖에 허균과 김만중의 한글 소설 역시 같은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더하여, 왕족들을 비롯한 한글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사용했습니다.왕족들 사이에서 오고간 편지를 보면 알 수 있고, 조선총독부에 의한 맞춤법 제정은 한글의 보급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법률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맞춤법과 사용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습니다.맞춤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