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統治以前の「書堂」(日本でいう寺子屋)でも
あくまでも漢文が中心で
ハングルを教えないところも多かったようです。
そもそも一般庶民は「書堂」にすら行っていなかったのです。
そもそもハングルは、1446年に世宗によって公布されたものの
中華思想の影響下にあって、民族独自の文化を蔑視し、
また民族独自の文字を創ることは
明(中国)に対する謀反として怒りを買うおそれがある、
と考える両班の根強い反対にあって
1506年、中宗によって諺文庁は廃止されました。
その後もハングルは一応生き続けましたが
あくまでも「女子供」の文字としてでした。
朝鮮で初めて漢字ハングル混交文の新聞「漢城週報」が発刊されたのは
1886年です。
朝鮮の近代化には識字率の向上が不可欠だと考える福沢諭吉と
その弟子、井上角五郎が
清国の官憲や両班の抵抗に遭いながらも発刊に尽力したんです。
その際に、日本の漢字かな混交文をヒントに
漢字ハングル混交文を考案して
それ以降、漢字ハングル混交文が使われるようになったわけです。
その後、朝鮮総督府も朝鮮語を研究して
1920年、朝鮮最古の国語辞典『朝鮮語辞典』を刊行しています。
また、世宗の命を受けてハングルの創製に尽力した「成三問」の偉業も
学校教育の中で、ちゃんと教えられていました。
● 일본 통치 이전의 "서당"(일본에서 말하는 서당)에서도
어디까지나 한문이 중심
한글을 가르치지 않는 곳도 많은 것 같았습니다.
원래 일반 서민은 "서당"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원래 한글은 1446년에 세종에 의해 공포된 것의
중화 사상의 영향 하에 있어서 민족의 독자적 문화를 멸시하고
또 민족 자체의 문자를 만드는 것은
명동 중국)에 대한 모반으로 분노를 살 수 있고
라고 생각하는 양반의 끈질긴 반대에 부닥쳐
1506년 중종에 의해 언문청은 폐지되었습니다.
그 뒤에도 한글은 일단 계속 살아갔지만
어디까지나 "여자 아이"문자로 했다.
조선에서 처음 한자 한글 혼효 글 신문"한성 주보"이 발간된 것은
1886년입니다.
조선의 근대화에는 문맹률의 향상이 불가결이라고 생각하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그 제자 이노우에 츠노 고로가
청나라 관헌과 양반의 저항을 당하면서도 발간에 주력했죠.
그 때 일본의 한잘까 혼효문을 힌트에
한자 한글 혼효문을 고안해
이후 한자 한글 혼효 글이 쓰이게 된 것입니다.
이후 조선 총독부도 조선어를 연구하고
1920년 조선 최고의 국어 사전 『 조선어 사전 』을 간행하고 있습니다.
또 세종의 명을 받고 한글 창제에 주력했다"성삼문"의 위업도
학교 교육 속에서 제대로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