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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3-01 05:46
[기타] 조선왕조실록 신미양요 관련자료 2
 글쓴이 : zzag
조회 : 2,112  


용량관계로 이어집니다.



4월25일(음)/6월12일(양)          경기 중군 김선필을 진무 중군으로 임명하기로 하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진무사(鎭撫使) 정기원(鄭岐源)의 장계(狀啓)를 보니, ‘양이(洋夷)들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날뛰고 광성진(廣城鎭)이 이미 함락된 조건에서 심도(沁都) 일대가 대단히 우려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경기 중군(京畿中軍) 김선필(金善弼)을 진무 중군(鎭撫中軍)으로 차하(差下)하여 하직 인사는 그만두고 당일로 군사를 거느리고 진지에 나가게 해서 앞뒤에서 서로 호응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풍덕(豐德)은 바로 강화를 뒤에서 지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 현재의 수령은 늙고 병이 많다고 하니 교체시키고 부호군(副護軍) 한치림(韓致林)을 차하하되 해조(該曹)에서 구전(口傳)으로 하비(下批)하고 역마를 내주어 당일로 내려 보냄으로써 기미에 따라 지원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4월25일(음)/6월12일(양)          첨사 이렴이 밤을 타서 이양선을 격퇴시키다

 

          진무사(鎭撫使) 정기원(鄭岐源)이, ‘적병들이 광성진(廣城鎭)을 습격하여 함락하고 초지포(草芝浦) 가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곳 첨사(僉使) 이렴(李濂)이 밤을 이용하여 습격하자 놈들은 이어 퇴각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4월26일(음)/6월13일(양)          중군 어재연이 서양군과 싸우다 전사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일전에 양이(洋夷)들이 광성(廣城)을 침범할 때 진무 중군(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의 생사에 대해서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수신(守臣)이 이미 중군을 대신 임명하여 줄 것을 청한 것을 놓고 보면, 절개를 지켜 싸우다 죽은 것 같습니다. 다시 사실이 등문(登聞)되거든 응당 조정에서 구휼(救恤)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어병수(魚秉琇)가 지금 수성 찰방(輸城察訪)에 있으니, 인정과 사리로 보아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구전(口傳)으로 차대(差代)하여 당일로 하직인사를 하고 말을 주어 내려 보내게 함으로써 제때에 교대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4월27일(음)/6월14일(양)          이양선을 순찰하러 갔던 군사들이 부상병들을 데리고 돌아오다

 

          영종 방어사(永宗防禦使)가, ‘어제 신시(申時)쯤에 우리나라의 일범소선(一帆小船)이 저들의 배에 붙잡혔으므로

탐지하기 위하여 군교(軍校)와 군사를 선발하여 급히 저들의 배 근처에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술시(戌時) 쯤에 군교와 군사들이 탄 배는 강화부(江華府)의 별무사 도령장(別撫使都領將) 유예준(劉禮俊)과 무사(武士) 이도현(李道賢)·황만용(黃萬用)·조일록(曺一祿)·고사달(高士達)·김동진(金東辰), 어영청(御營廳)의 군사 김대길(金大吉)·김우현(金禹賢),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군사 차인식(車仁植) 등 9명(名)을 싣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모두 불러들이고서 보니, 유예준은 오른 다리에 탄환을 맞아 몸은 비록 살아서 돌아왔지만 목숨은 거의 죽게 되었으며 이도현 등 7명도 어깨와 다리 등에 탄환을 맞았습니다. 조일록은 오른팔이 절반 잘라졌고 차인식은 탄환에 맞은 데는 없지만 매를 맞아 들것에 들려왔습니다. 그 정상을 자세히 물어보니 유예준이 아뢰기를,

「광성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 탄환에 맞아 쓰러졌는데 저놈들이 큰 배에 붙잡아다가 여러 배들에 조리를 돌린 다음에야 놓아주었으므로 겨우 목숨이나 붙어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별무사 이산석(李山石)은 어제 죽었는데 저들이 끌어다가 부평(富平) 경계에다 묻었습니다. 조일록(曺一祿)은 맞은 탄환이 아직 팔에 박혀있었는데 저들이 약으로 코를 막아 정신을 잃게 한 다음 은칼로 그의 팔을 잘라버리자 조금 뒤에 다시 소생하였습니다. 어영청의 별무사 문계안(文啓安), 전 초군(前哨軍) 이대길(李大吉), 강화부의 김의도(金宜道)·엄원철(嚴元哲)·최국길(崔國吉) 등 5명은 아직도 배안에 갇혀 있어 함께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저들 배의 형편에 대해 더 물어보니, 「우리나라 사람 서너명이 섞여있으므로 불렀더니 머리를 저으며 오지 않았고,

다만 열 대 여섯살쯤 되었을 젊은 아이가 포로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왔습니다. 배 안에 있는 군사는 거의 1,000명에 가까 왔으며, 탄환에 맞은 저놈들 시체 3구가 한곳에 쌓여 있었습니다. 이밖에 다른 배안의 형편은 알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이번의 이 9명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영으로 보냅니다.’라고 아뢰었다.

 

 

4월27일(음)/6월14일(양)          초지진과 덕진을 잃은 자책에 처분을 묻다

 

          진무사(鎭撫使) 정기원(鄭岐源)의 장계(狀啓)에, ‘초지포(草芝浦)와 덕진(德津)을 잃어버리고 불태운 것만 해도 이미 잘 신칙하지 못한 것인데, 광성보(廣城堡)에서 군사와 장수를 잃었으니 더욱 죄를 받아야 하므로 황송스럽게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병가(兵家)에 있어서 이기고 지는 것은 원래 예사로운 일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한마음을 가지는 것이 바로 이길 수 있는 조건이다. 저 고약하고 흉악한 놈들이 지금은 약간 퇴각하였지만 목전의 방어에 대해서는 더구나 소홀히 할 수 없다. 나라를 보위하는 책임을 진 사람으로서 더욱더 스스로 힘쓸 것이며 명령을 받들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먼저 처단하고 나서 후에 보고함으로써 군율을 엄하게 하라.” 하였다.

 

 

4월28일(음)/6월15일(양)          적들이 물러간 후의 정황을 보고받다

 

          진무사(鎭撫使) 정기원(鄭岐源)이, ‘이달 25일 적들이 물러간 다음 휘하의 군관(軍官)을 파견하여 자세히 조사하게 했더니,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에, 「찰주소(札住所)의 광진(廣津) 보루에 달려가 보니, 보루는 텅 비었고 흙 참호는 모두 메워졌기에, 즉시 마을사람들을 동원하여 흙을 파냈더니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과 그의 친동생 어재순(魚在淳), 대솔 군관(帶率軍官) 이현학(李玄鶴), 겸종(傔從) 임지팽(林之彭), 본영(本營)의 천총(千總) 김현경(金鉉暻)이 피를 흘리고 참호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그 나머지 여러 시체들은 몸과 머리가 썩어서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광성진 별장(廣城津別將) 박치성(朴致誠)의 시체는 조수가 나간 다음 강변에서 드러났는데 인신(印信)을 차고 있었으므로 주워서 바칩니다. 별무사(別撫士) 유예준(劉禮俊)의 시체는 아직 찾지 못하였는데 붙잡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별무사 이학성(李學成)의 보고 내용에, 「싸움이 벌어졌을 때 중군은 직접 칼날을 무릅쓰고 대포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선두에서 군사들을 지휘하여 적들을 무수히 죽였으며, 김현경은 손에 환도를 잡고 이쪽저쪽 휘둘러대며 적을 죽이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별무사 유예준은 중군 가까이에서 바싹 따라다니다가 총에 맞게 되었고, 어영청(御營廳)의 초관(哨官) 유풍로(柳豐魯)가 앞장에서 사기를 돋구었으며, 이현학이 큰소리로 적들을 꾸짖는 것을 목격했지만 저도 적들한테 부상당하여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해가 진 뒤에야 간신히 빠져 돌아왔습니다.」 하였습니다.

중군 형제의 시체는 장리(將吏)를 보내어 염습해서 영구(靈柩)를 본고장으로 가져가는 예식을 각별히 돌보도록 하였으며, 전사한 장수와 병졸들의 이름은 그가 말한 데 따라 성책(成冊)해서 올려보냅니다. 중군 어재연의 겸종 김덕원(金德源)이 칼날을 무릅쓰고 도장을 주어가지고 와서 바쳤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죽은 사람이 53명(名), 부상당한 사람이 24명이다.】

 

 

4월28일(음)/6월15일(양)          서양군과 싸우다 전사한 어재연 등에게 관직을 추증하고 표창하다

 

          전교하기를, “중군(中軍) 이하의 사람들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실에 대해서는 이번 장계(狀啓)에서 비로소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 충성과 용맹이 마치 그 사람들을 직접 보는 듯하다. 몸소 칼날을 무릅쓰고 흉악한 적들을 죽이다가 적들의 공격이 집중되는 바람에 결국 목숨을 바치고 말았으니, 그 빛나는 큰 절개는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군사들이 마음을 고무시킬 만하다. 그러므로 진무 중군(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에게 특별히 병조 판서(兵曹判書)와 지 삼군부사(知三軍府事)를 추증(追贈)하고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시장(諡狀)이 올라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시호(諡號)를 의정(議定)하게 하라. 장사에 필요한 물자는 호조(戶曹)에서 넉넉히 보내주고, 녹봉은 대상(大祥)을 마칠 때까지 제급(題給)하도록 하라. 정려(旌閭)를 내려주는 세워주는 은전과 제사를 지내주는 절차는 각 해사(該司)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여러 아들은 거상 기간이 끝나면 각별히 수용(收用)하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자가 있을 경우에 음직(蔭職)에 조용(調用)하라. 그의 아우 어재순(魚在淳)은 명령을 받은 신하도 아니며 관리로서의 직책도 없었지만,  한 몸을 돌보지 않고 떨쳐 일어나 적들과 맞서 싸우다가 죽었으니 형제간의 두터운 우애와 드높은 충성과 의리가 평소에 수양하여 온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별히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추증하고, 영구를 고향에 가져다 장사지내는데 필요한 물품을 또한 호조로 하여금 각별히 유념하도록 하며, 정려를 세우는 일과 제사를 지내주는 일을 일체로 시행하라.

어영청 초관(御營廳哨官) 유풍로(柳豐魯)는 앞장서서 기세를 돋구었고 일신은 생각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특별히 좌승지(左承旨)로 추증하라. 대솔(帶率) 군관인 출신(出身) 이현학(李玄鶴)은 큰소리로 적을 꾸짖으며 굴함 없이 의리를 지켰다. 특별히 3품직에 추증하라. 천총(千總) 절충 장군(折衝將軍) 김현경(金鉉暻)과 광성 별장(廣城別將) 절충 장군 박치성(朴致誠)은 죽음을 달게 여기며 적을 증오하는 큰 의리를 지켰으니 모두 상당과(相當窠)에 추증하라.

전사한 군사와 중군의 겸종(傔從)들은 본영으로 하여금 각별히 돌봐주어 잘 묻어주게 하고, 처자들을 찾아보는 동시에 더욱 돌보아 주어라. 나루터에 제단을 쌓고 귀신을 널리 불러 제사지냄으로써 저승에서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영혼을 위로하라. 부상당하고 죽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약을 넉넉히 주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하여 치료함으로써 조정에서 불쌍히 생각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그 밖에 공적을 세운 사람들도 모두 본영으로 하여금 후하게 포상(褒賞)하게 하라.” 하였다.

 

 

4월28일(음)/6월15일(양)          서양군과의 싸움에 공이 큰 이재로에게 차하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어영청 초관(御營廳哨官) 유풍로(柳豐魯)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 뛰어난 절개는 참으로 빛납니다. 듣건대, 90세 되는 노모(老母)가 있고 집안 살림도 가난한데, 전 우후(前虞候) 유재로(柳在魯)가 그를 따라 싸움터에 나갔다고 합니다. 울진(蔚珍)에 지금 자리가 났으니 특별히 차하(差下)하여 그로 하여금 정성껏 봉양하게 함으로써 조정에서 돌보는 뜻을 보여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4월30일(음)/6월17일(양)          서양군의 침입에 맞서 싸운 강화도와 각 고을의 군사들을 위로하다

 

          전교하기를, “흉악한 적들이 날뛰는 바람에 중군(中軍)을 비롯한 군관(軍官)과 군사들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데 대해서는 방금 구휼(救恤)의 은전을 베풀었다. 그런데 부상을 당한 저 불쌍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치료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심도(沁都)와 각 읍진(邑鎭)에 비상 방어를 하느라고 많은 장교와 군사들이 풍찬노숙(風餐露宿) 생활한 지 거의 한 달이 되어 가는데 능히 앓는 사람은 없는지, 밤낮으로 이 한 가지 생각에 몹시 걱정스러워 마음이 불안하다. 경기 감영(京畿監營)으로 하여금 각별히 호궤(犒饋)를 후하게 제급(題給)하게 하고, 그 물력(物力)은 공전(公錢)으로 회감(會減)하라. 선전관(宣傳官)을 나누어 보내어 이 전교 내용으로 일일이 각별히 잘 위문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각처(各處)에서 징병(徵兵)하여 진을 설치하되, 명령에 복종하지 않거나 요언(妖言)으로 대중들을 현혹시키는 자들이 있을 경우에는 각 주장(主將)들은 반드시 군사 법률을 적용함으로써 상과 벌을 분명하게 하도록 선전관들이 함께 전하게 하라.” 하였다.

 

 

5월1일(음)/6월18일(양)          기병 2초를 진무영에 더 보내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방어대책으로서는 실로 활 쏘는 부대와 포 쏘는 부대만한 것이 없지만 기병(騎兵)이 협력하는 것도 이길 수 있는 조건과 관계됩니다. 기병 2초(哨)를 즉시 동원하여 해당 장수를 시켜 인솔해다가 진무영(鎭撫營)에 넘겨주게 하고, 마태(馬太) 200석(石)은 배로 실어 내려 보내도록 훈련 도감(訓鍊都監)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장궁(長弓) 80장(張)과 장전(長箭) 500부(部), 편전(片箭) 300부, 통아(筒兒) 300개(箇)를 또 내하(內下)할 것이니, 먼저 전번에 이미 내려 보낸 것과 함께 방어에 대비하라고 행회(行會)하라.” 하였다.

 

 

5월4일(음)/6월21일(양)          국가 비상시에는 삼군부가 개인의 사정을 듣고 출전 여부를 판단하게 하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토벌에 출정한 군사들에 대하여 어제 장려하는 뜻을 보여주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출신(出身) 이재정(李在靖)은 지모와 용력에서도 뛰어나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사적인 사정 때문에 싸움터로 나가기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임시변통으로 기복(起復)시켜 출정하게 하소서. 이후에 이런 사람이 있게 되면 그때마다 번거롭게 문의할 것 없이 본 삼군부에서 분부하여 내보내고, 서경(署經)은 첩정(牒呈)에서 청한 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5월5일(음)/6월22일(양)          서양군과 싸웠던 군관과 군사들에게 이상이 없다는 보고를 받다

 

          전교하기를, “위로하러 갔던 선전관(宣傳官)이 돌아와 보고한 것을 들으니, 각처(各處)에 있는 군관(軍官)과 군사들이 모두 탈이 없다고 하는데 매우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가뭄 피해가 심한 이때에 달포나 방어하다가 혹 병이라도 나지 않겠는가 하는 걱정 때문에 침식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내하(內下)한 각종 약품을 무부(武府)에서 골고루 나누어 내려보냄으로써 치료에 대비하게 하라.” 하였다.

 

 

5월10일(음)/6월27일(양)          경기 중군 양주태를 출전하게 하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경기 중군(京畿中軍) 양주태(梁柱台)는 수군(水軍)을 조련(操鍊)하는 데 능숙하고 지략도 있는 사람입니다. 배를 비롯한 무력을 거느리고 즉시 출전하게 하여 진무 중군에 함께 부쳐 주어 전적으로 진무사(鎭撫使)의 지휘를 따르게 함으로써 임기응변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5월13일(음)/6월30일(양)          신미년에 군공을 세운 군관들에게 첩가하도록 하다

 

          신미년(1871)에 서쪽을 토벌할 때 군공(軍功)을 세운 사람들의 별단(別單)을 놓고 전교하기를, “장령(將領)들은 상가(賞加)하고, 군졸(軍卒)은 첩가(帖加)하라. 아울러 각 해당 서울과 지방의 군영(軍營)에 미(米)와 육(肉)을 제급(題給)하라.” 하였다.

 

 

5월15일(음)/7월2일(양)          계속 방어를 서고 있는 장수와 군사들을 위로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여러 곳의 장졸(將卒)들이 한 달 넘게 방어를 서고 있으니 실로 민망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 무덥고 습기 찬 때에 병에 걸리지나 않겠는지 늘 걱정이 놓이지 않는다. 경기 감영(京畿監營)으로 하여금 호궤(犒饋)를 전례대로 하게 하고, 별군직(別軍職)을 나누어 보내 위로하고 오게 하라.”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척후 기병들이 한 달여에 걸쳐 고생하고 있으니, 그들이 해야 할 직분상의 일이기는 하지만 장마 들고 무더운 이때에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각 해당 군영으로 하여금 건호궤(乾犒饋)를 넉넉히 나누어주게 하고,

동시에 일일이 위로하고 앓는 사람이 없는가를 특별히 잘 살펴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5월17일(음)/7월4일(양)          서양군과의 싸움에서 부상 입은 포수들을 치료해 주게 하다

 

          전교하기를, “오늘 환궁(還宮)할 때, 관서(關西) 몇 개 고을의 포수(砲手)들이 싸움터로 나가기 위하여 올라와서 삼군부(三軍府)의 앞길에 늘어서 있었다. 그래서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위로하며 물어보게 하였더니, 양덕 포수(陽德砲手) 1명(名)과 운산 포수(雲山砲手) 1명은 병으로 인해 봉산(鳳山)과 평산(平山)에 머물러 있다고 했는데, 그 소리를 들으니 매우 측은하였다. 삼군부로 하여금 해당 도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각별히 치료해 준 다음 그들이 있던 고을로 보내도록 하고, 이어 계문(啓聞)하도록 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5월17일(음)/7월4일(양)          미국 병선이 더욱 소란을 피우는 것에 대하여 자문(咨文)을 만들어 북경에 보내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양이(洋夷)들이 소요를 일으킨 데 대하여 중국(中國)에 자문(咨文)을 보내는 것은 근래의 규례이지만, 이번의 전후한 전말에 대해서도 자세히 진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임(文任)들로 하여금 자문을 짓도록 하고, 별도로 자문을 가지고 갈 관리를 사역원(司譯院)으로 하여금 차출(差出)하여 속히 들여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미국 병선(美國兵船)이 소요을 일으킨 상황을 진술한 자문의 대략에,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박영보(朴永輔)와 강화 진무사(江華鎭撫使) 정기원(鄭岐源) 등 관리들이 금년 4월 11일에 올린 장계(狀啓)에 첨부된 부평 도호부사(富平都護府使) 이기조(李基祖)의 첩정(牒呈)에,

‘이번 달 3일 이국선(異國船) 5척(隻)이 서남쪽으로부터 부평부의 앞바다에 와서 정박하고 글을 보내왔는데, 자칭 미국 군주가 흠차(欽差)한 대신과 수군 제독(水軍提督)이라고 하고, 협상할 일이 있으므로 고관(高官)을 만나볼 것을 요구하면서 결코 해칠 의도는 없으니 놀라지 말라는 등의 내용이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의정부(議政府)에다 3품의 관원(官員)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온 수고를 위문하며, 협상할 내용을 대략 알아보도록 칙하(飭下)하였습니다. 의정부의 장계와 차송관(差送官)의 문보(文報) 내용에, ‘문안 총판(文案總辦) 두덕수(杜德綏)라는 자가 나와서 응접사(應接使)에게 하는 말이 이 관리들은 직품이 낮으므로 자기네 나라 공사와 만날 수 없다고 한다면서 거절하고 들여놓지 않았으며, 다시 더 말하지도 않고 항구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관찰사 박영보와 진무사 정기원 등이 올린 치계(馳啓)를 계속하여 받아 보니, ‘이범선(二帆船) 미국배 2척이 손돌목〔孫石項〕으로 들이닥쳤는데, 여기는 우리나라 수역내의 항구로서 중요한 요새지입니다.

병인년(1866)의 난리를 거친 다음부터 군사를 늘리고 방비를 더 엄하게 해서 설사 우리나라의 관청이나 개인의 배라고 하더라도 통행증이 없으면 통과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군사를 실은 이국선이 우리나라에 통지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는 형편에서 절대로 팔짱을 끼고 앉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물목을 지키던 장수와 군사들이 포를 쏘아대며 막으니 그들의 배는 곧 물러가서 부평 해상에 정박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그림자를 보고 형태를 살피며, 나타난 형적을 가지고 사실을 논한 것은 천하의 응당한 이치로써 여기서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이번에 미국배가 왔을 때 먼저 밀봉한 편지를 띄우고, 이어 글을 보내오면서 걸핏하면 ‘화목하게 지내려고 왔다.’, ‘의심하지 말라.’, ‘절대로 해칠 생각은 없다.’, ‘놀라지 말라.’느니 하였는데 갖은 말로 가장하는 내용이 다 이러한 말들이고, 예의로써 접대해달라는 것이 특히 그들의 요구였습니다.

상대방이 호의를 가지고 대하면 내가 호의로 응하며, 상대방이 예의를 갖추어 대하면 내가 예의로써 접대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으로서 당연한 일이며, 나라 간의 일반적인 규례인 것입니다.

그런데 화목을 표방하면서도 어찌하여 군사를 싣고 오며 예의로써 접대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어찌하여 위문하는 것을 거절한단 말입니까?

그들의 생각에 벌써 요새지에는 반드시 방어가 심하리라는 것을 계산하고 ‘의심하지 말라.’, ‘절대로 해칠 뜻은 없다.’는 등의 갖은 말을 잔뜩 늘어놓음으로써 실로 우리의 방비를 완화시키고, 그 틈을 이용하여 감히 들어오자는 간사한 속임수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남의 나라를 짓밟고 멸시하며 무인지경과 같이 보았다는 것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화목하자는 것이 이러하며, 예의로 사귀자는 것이 이렇겠습니까?

그 의도는 사건을 일으키자는데 있으며, 그 계책은 오로지 강제로 조약을 맺자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4월 24일에 계속해서 올린 강화 진무사 정기원의 치계에, ‘미국배가 다시 항구로 들어와서 광성진(廣城津)을 습격하고 함락하였는데,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이 힘껏 싸우다가 목숨을 바쳤고, 사망한 군사가 매우 많습니다.

적병은 초지포(草芝浦)에 진을 쳤습니다. 그리하여 변진(邊鎭) 이렴(李濂)이 밤을 이용하여 습격해서야 그들을 퇴각시켰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연이어 받은 경기 관찰사 박영보의 치계에 첨부된 부평 도호부사 이기조의 첩정에, ‘적의 군사가 성과 보루를 파괴하고 모든 것을 불지르고 약탈하여 털끝만큼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또 정찰해보니 그놈들의 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우 많았으며 다 나라를 배반한 간악한 무리들로서 길안내를 해가지고 온 자들이었습니다. 놀라움과 격분을 금하지 못하여 편지를 보내어 꾸짖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인천 도호부사(仁川都護府使) 구완식(具完植)의 첩정에, ‘이연귀(李蓮龜)와 이균학(李筠鶴)은 원래 예수교의 두목이었던 이승훈(李承薰)의 손자인데, 그들의 배가 정박해 있는 바닷가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면서 살피는 것을 현장에서 체포하여 엄격히 신문하니, 그들의 배에 들어가서 기꺼이 길 안내를 하려고 하였다는 등의 사실을 남김없이 실토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서둘러 효수(梟首)하여 백성들을 경계하도록 하였으며, 부평 등 고을에 엄격히 명하여 그 놈들의 배와 다시는 복잡하게 편지질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올해 5월 14일에 계속해서 올린 경기 관찰사 박영보의 차계에 첨부된 부평 도호부사 이기조의 첩정에, ‘지난달 27일에 그들의 배에서는 한통의 편지를 보내면서 조정에다 전달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편지는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으나 봉투에 쓴 글은 자못 헷갈리는 것 같으니 어찌 이 나라의 신하로서 이것을 감히 위에다 전달하겠습니까? 그래서 거절해 버렸는데도 그들은 오히려 끈질기게 굴면서 따로 대책을 세워 다른 길을 통해 전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논쟁하였는데, 그들이 따로 대책을 세워 다른 길을 통해서 전달하겠다고 한 것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이해는 되지 않지만, 이달 7일에 그들의 배 1척이 먼바다 쪽으로 갔다가 13일 날 다시 돌아와 정박하였는데, 그 배가 가고 온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16일에 올린 치보에 첨부된 부평 도호부사의 첩정에, ‘정박하고 있던 여러 미국배들이 본부(本府)에다 한 통의 편지를 보내온 동시에 닻을 올리고 먼바다 쪽으로 가버렸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미국배들이 우리나라에 정박한 것을 조사해보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40여 일입니다.

그들이 지방의 관리, 통역들과 서면으로 논쟁한 것과 떠날 즈음에 남겨둔 편지를 비롯한 상황을 다 진술하게 되는 지금,

귀 예부(禮部)에서 이해하도록 갖추어 보내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번에 초록한 것들을 모아서 함께 첨부해 올리니 진상을 대체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겉으로는 화목을 빙자하여 감언이설로 접어들지만 속에는 위험한 생각을 품고 있으므로 실로 간사하고 음흉한 계책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위문하는 것을 거절한 까닭은 반드시 높은 관리가 서둘러 맞이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으며, 우리나라의 요충지에서 충돌을 일으켜놓고도 저들이 도리어 애써 방어하였다고 하니 어찌 된 일입니까? 이와 같이 오만하고 이와 같이 포악한 놈들입니다. 더구나 나라를 배반한 비적 무리들을 숨겨두고 수도로 들어올 길잡이로까지 삼았습니다. 도대체 이와 같이 하고도 스스로 화목을 부르짖으며 예의로 접대할 것을 기대하고 있으나, 우리의 불신임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그들 자신이 우리가 틀림없이 화해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제 떠나면서 편지를 남겨 공연히 성을 내며 마구 으름장을 놓은 것은, 저들이 불순한 뜻을 이루지 못하여 스스로 이러한 불만과 원망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다시 거짓말을 꾸며 비방함으로써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혹을 일으키게 하여 세계 각국에서 우리나라가 멀리서 온 사람들을 후하게 접대하지 않는다고 잘못 의심을 사게 한다면 그것도 매우 수치스러운 노릇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가지고 그 나라 공사가 이해관계를 똑똑히 알게 하고 양측에 다 유익한 점이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알게 하며, 다시는 사단을 일으키지 말고 각기 아무 일없이 편안히 지내도록 해줄 것을 간절히 원합니다.” 하였다.

 

 

5월18일(음)/7월5일(양)          병에걸려 목숨을 잃은 군사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게 하다

 

          전교하기를, “방금 강화도(江華島)에 위문하러 갔던 별군직(別軍職)의 보고를 들으니, ‘파수(把守)를 서고 있는 장졸(將卒)들이 아직 탈이 없지만 금위군(禁衛軍) 1명(名), 철원군(鐵原軍) 1명이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라고 하니, 매우 불쌍한 일이다. 무덤을 써주고 돌보아줄 방도를 삼군부(三軍府)로 하여금 각별히 제급(題給)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5월18일(음)/7월5일(양)          이양선이 돌아갔지만 해안에 대한 방어는 계속하게 하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양선(洋船)은 비록 멀리 달아났지만, 연해에 계엄이 내려져 있으니 해안에 대한 방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기병과 선박은 현재 긴절하게 쓸 곳이 없으니, 모두 먼저 풀어 보내도록 진무 군영(鎭撫軍營)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5월19일(음)/7월6일(양)          해안의 습한 조건에서 방어를 했던 군사들을 시상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나쁜 기운과 습기가 많은 연해(沿海)에 나가 서울과 지방의 군졸(軍卒)들이 밤낮 한데서 지내고 있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마다 밤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양이(洋夷)들이 지금 이미 멀리 달아났으니 차례로 군사를 철수하여야 하겠다. 출정한 군사들에게 삼군부(三軍府)로 하여금 분등(分等)하여 시상하게 하라.

전사한 군사들은 더욱 불쌍하니 상등례(上等例)에 따라 그 처자들에게 대급(貸給)하도록 하고, 포목(布木)은 선혜청(宣惠廳)의 저류고(儲留庫)에 있는 것을 실어다가 계엄을 해제한 다음 일일이 나누어 주어라. 지방 군사들이 돌아갈 때의 식량도 삼군부로 하여금 넉넉하게 제급(題給)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5월20일(음)/7월7일(양)          진무영에 군수비용을 지급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갑옷과 투구용 값으로 미(米) 1,000석(石)을 진무영(鎭撫營)에 이획(移劃)하여 앞으로 군수비용으로 삼게 하도록 선혜청(宣惠廳)에 분부하라.” 하였다.

 

 

5월21일(음)/7월8일(양)          표창에서 빠진 군사들에게 휼전을 베풀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박영보(朴永輔)의 장계(狀啓)를 보니, ‘통진 부사(通津府使) 홍재신(洪在愼)의 첩정(牒呈)을 일일이 들면서 아뢰기를, 「전번에 양이(洋夷)와 서로 싸움이 붙었을 때, 포군(砲軍) 강선도(姜善道)는 대포를 쏘아 적함의 갑판을 부수고, 차재준(車載俊)·하도현(河道鉉)·방대진(方大振) 등은 총으로 서양놈 두 놈을 죽였으니 장려하는 정사에 있어서 응당 포상(褒賞)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삼군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포로 선판(船板)을 부수고 총으로 서양놈을 죽여 저 더러운 놈들로 하여금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게 하였으니, 군사를 철수한 다음 상등례(上等例)에 따라 삼군부에서 넉넉하게 시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5월22일(음)/7월9일(양)          진무영과 연해 각 진의 계엄을 해제하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서양놈들이 이제는 멀리 달아나고 전혀 자취가 없는 상황에서 허다한 군사들이 한 달이 넘도록 진을 치고 있는 것은 사실 민망한 일입니다. 진무영(鎭撫營)의 대진(大陣) 및 영종(永宗)·교동(喬桐)·인천(仁川)·부평(富平)·통진(通津)·풍덕(豐德)을 비롯한 각진(各鎭)은 모두 표신(標信)이 없이 계엄을 해제하고 본부(本府)에서 통지하여 강화도와 통진에서 영솔하고 있던 군사는 경기 중군(京畿中軍) 양주태(梁柱台)로 하여금 인솔하여 올라오게 하고, 영종과 인천에서 영솔하고 있던 군사는 출정한 장사(將士) 이재정(李在靖)으로 하여금 인솔하여 올라오도록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5월24일(음)/7월11일(양)          출전한 군사들에게 은전으로 식량과 무명을 주었는데 제대로 시행되지 않다

 

          전교하기를, “일전에 출정(出征)한 군사들에게 분등(分等)하여 시상하고, 또 돌아갈 때의 식량을 주도록 하교한 일이 있었다. 방금 듣자니, 지방 군사들에게는 돌아갈 때의 먹을 식량만 주고, 서울 군사들에게는 목포(木布)를 제급(題給)하였다고 한다. 지방 군사들에게 목포를 시상하는 것은 바로 상전(賞典)이고, 돌아갈 때의 먹을 식량을 주는 것은 바로 길가는 동안의 노자(路資)이다. 이번에 서울과 지방의 군사가 공(功)은 같은데 시상을 달리 하였으니, 이것이 시행할 수 있는 일인가? 무부(武府)의 여러 당상(堂上)에 대해 모두 엄하게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출정하였던 장졸(將卒)들이 지금 이미 철수하여 돌아왔으니,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위문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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