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25사 중 하나인 『수서』를 보면 고구려의 영토를 '동서 6천리'라고 기록하였다. 동서 6천리 이 말은 고구려 동쪽에서 서쪽에 이르는 영토가 6천리라는 것이다. 6천리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는 우리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엄청난 영역을 소유한 대제국이었다.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또는 국내성 기준)을 중심으로 볼 때 고구려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사할린 앞바다 서쪽으로는 만리장성 이남에 이르렀다고 추정할 수 있다.(고구려의 젖줄인 요하가 현재의 랴오허 강이 아닌 서쪽의 난하라면 고구려의 서방경계는 태원이남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가 만리장성 이남 즉 북경지방까지 진출했다는 근거로 북경 근처의 고구려의 성터인 고려영高麗營, 평안남도 대흥시 덕흥리 고분벽화의 주인공인 유주자사 진(유주는 오늘날 북경을 포함한 하북성 일대), 업(태원 부근)에 고구려인 56만명이 가득했다는 위서의 기록을 들 수 있다. 또한 『수서』 「고구려전」을 보면 고구려 침략을 앞둔 수 양제가 고구려인들이 수나라 이전, 발해에서 요서지방의 갈석산에 이르는 넓은 땅을 확보하여 집단적 농경생활을 함으로써 중원땅이 고구려인의 땅이 된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놀랄만한 사실¹을 밝힌 바 있다. 이렇듯 고구려는 우리가 상상했던 이상으로 넓은 영토를 차지한 대제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