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 이전 주요 다이묘들의 고쿠다카[편집]
(○는 전투에 참가한 자, ●는 전투 중 배신한 자의 표시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C%84%B8%ED%82%A4%EA%B0%80%ED%95%98%EB%9D%BC_%EC%A0%84%ED%88%AC
서군
이시다 미츠나리 6,000명 / 19.4만석 다이묘
시마 사콘 1천명
가모 사토이에 1천명
시마즈 요시히사. 1500명 / 56만석 다이묘
시마즈 토요히사 1500명
고니시 유키나가. 4,000명 / 20만석 다이묘
오오타니 요시츠구. 4,100명 / 5만석 다이묘
우키다 히데이에. 17,000명 / 57만석 다이묘
토다 시게마사 & 히라스카 타메히로 1500명
아카자 나오야스600명
오가와 스케타다 2100명 / 7만석
쿠쯔키 모토쓰나 600명
와키자카 야스하루 1천명 / 3만3천석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15,000명 / 35.7만석 다이묘
모리 히데모토. 1만5천명 / 120.5만석 다이묘(아버지 대신 참전)
킷카와 히로이에. 3000명, 14.2만석 다이묘
안코쿠지 에케이. 1800명 / 6만석 다이묘
나츠카 마사이에 1500명/ 5만석 다이묘
초쇼카베 모리치카. 6600명 /22만석 다이묘
<동군>
쿠로다 나가마사. 5,400명 / 18만석 다이묘
호소카와 타다오키. 5,000명 / 18만석 다이묘
카토 요시아키. 3,000명 / 10만석 다이묘
츠츠이 사다츠구. 2,850명 20만석 다이묘
다나카 요시마사. 3,000명 10만석 다이묘
후쿠시마 마사노리. 6,000명 / 20만석 다이묘
토도 타카토라. 2,500명 / 8만석 다이묘
쿄고쿠 타카토코. 3,000명
테라자와 히로타카 2400명
마츠다이라 타다요시 3천명 / 10만석 다이묘
이이 나오마사. 3600명 / 12만석 다이묘.
혼다 타다가츠. 500명 / 10만석 다이묘.
도가와 미치야스 400명
카네모리 나가치카 1100명
이코마 카즈마사 1830명
후루타 시게카츠 1200명
오다 유라쿠 500명
카나모리 나카치카 1140명
도쿠가와 이에야스. 3만명 / 255만석 다이묘.
이케다 테루마사 4560명 / 15.2만석
야마우치 카즈토요. 2,000명 / 6.9만석
아사노 요시나가 6510명 / 18만석
데라자와 히로타카 2400명 / 8만석
일본 전국시대 총 석고는 히데요시가 조사한 바..
대략 1850만석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요.
얼추 인구도 1석 = 1명 비슷하게 돌아갑니다.
(일본인들이 밥을 아주 적게 먹죠, 대신 성욕은 왕성해서 애는 많이 낳는 편이구요...)
일본 전국시대 석고를 보면,
대략 1만석 영지에 250명의 병사가 뽑아져 나오는데요.
이걸 1850만석에서 대략 46만명 정도의 병력이 나오죠.
사실, 뭐 돈과 식량만 충분하다면야,
일시적으로 낭인들을 모병해서, 상당한 군대를 꾸리기도 합니다.
히데요시 아들인 히데요리가 오사카 성 겨울 전투에서 그런씩으로 10만명을 모아서
도쿠가와 20만 대군에 대항했죠.
http://hyukjunseo.egloos.com/2956846
대략 당시 일본에선 조선의 석고를 1200만석 정도로 파악했다고 하더군요.
근데.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에 비해 밥을 많이 먹었다고 하죠.
세종 때 결수는 160만결이라고 나오는데..
1결의 쌀 수확량은 세종대왕 이후 400두로 정해지죠.(그 이전은 쌀 수확량 300두가 1결)
1두(말=18리터)=10되(승=1.8리터)=100홉(합=0.18리터)
1두(말=5,8리터)=10되(승=0.58리터)=100홉(합=0.058리터)
*그런데 조선세종 때 도량형이 현재의 1/3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냥 편하게 1/3인 1홉 60cc로 잡겠습니다.
1섬은 15말, 1석은 10말인데..
후대로 가면 1섬, 1석 모두 10말로 통용되고..
대략 도정된 쌀은 144kg가 1섬(석)..1가마는 72Kg (일본식 및 현대 기준)
즉, 400두는 40석이 됩니다.
임진왜란 직전 결수를 대략 150만 결로 잡으면..
* 일부 다른 글을 보니, (150만 결 기준..)
어떤 분은 1결 = 240두 수확량(최저수준)으로 계산하고, (3600만석)
어떤 분은 1결 = 300두로 계산하고 (4500만석)
어떤 분은 1결 = 400두로 (6000만석) 보기도 하던데..
일본의 석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타이코 검지 때 1850만석이지만,
이후 에도시기에 2천만석~3천만석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http://hyukjunseo.egloos.com/2956846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결수는
임진왜란 직전의 150만결에서 종전 직후 30만 결까지 떨어졌다고 하지요.
240두로 잡으면 720만석,
300두로 잡으면 900만석,
400두로 잡으면 1200만석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아마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계산한 조선의 석고가 1200만석이라면,
조선 결 수로 환산시 임진왜란 종전 후인 30만결에 비해 3배가 많은 90만결 정도 되겠군요.
조선 백성들이 6천만석(일본 기준 2천만석) 수확해서 먹고 살다가,
1200만석(일본 기준 400만석)으로 먹고 살려니.. 배가 고플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전시상황이니 군량미와 조세로 꽤나 걷어들였을것도 뻔하구요.
조선의 경우엔 쌀이나 무명 같은 현물이 화폐 역할을 했으니 더더욱 쪼달렸겠지요.
인구수 2배나 되는 일본이 조선의 절반수준의 쌀을 먹고 살아가야 했으니,
조선과의 쌀 교역에 목매거나, 종종 무역규모가 적다거나, 무역이 제한되었다고,
노략질도 불사하는 왜구들이 한편으로 왜 그랬는지 알만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