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떴다.
창가에 서니 아침 햇살 너머 묘지가 보인다.
태평양 전쟁에 전사한 나의 할아버지와 국민들의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 걸 보면서 이제 다시는 그런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신에게 기도를 했다.
시계를 봤다. 현재 시각 7시20분. 9시에 공군 전용기를 타고 일본에 건너가 미일 국방 장관 회담에 참석해야 한다.
회담이 끝나면 순서대로 아베 총리와 면담하고 뒤를 이어 주일 대사와 모종의 비 공개 면담을 가질 예정이다.
10시30분.
회담이 끝났다. 문을 열고 나서면서 짜증 섞인 답답한 마음에 넥타이에 손을 댔다.
뭐지? 이 답답함은?
말로는 중국 포위망 구축에 성의를 보이겠다 하는데, 후텐마 공군 기지 이전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
죄송하다 죄송하다 말로는 사과하는데, 결론은 돈은 못 내겠다. 우리 보고 다 내라는거 아닌가?
더러운 창녀의 자식들. 요즘 우리 경제 사정 다 알면서. 우리보고 착한 바보가 되라는거 아닌가?
중국이 무서워 벌벌 떠는 주제에. 자위대가 딸려 우리에게 도와 달라는 주제에. 우리를 이렇게 이용만 해먹으려 하다니.
문득 창문 너머를 봤다. 나의 할아버지.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한, 흑백 사진 속 젊은 병사의 웃는 얼굴이 활기찬 거리의 사람들과 겹쳐 보인다.
얘기로 듣기로는 시가전 도중 아기를 안은 여자를 발견.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려다 여인에 감긴 시한 폭탄이 폭발. 현장에서 즉사했다고 들었다.
오 마이 갓. 다른 나라를 병합한 주제에소모 품 정도로 현지 주민들을 자폭 시키다니. 그리고 하필이면 할아버지가 희생당하다니.
저 거리에 붐비는 일본인들은 그때의 참상을 알고는 있는걸까? 방금 몇 번이나 고개 숙여 사과하던 일본 외교 장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리고 보니 이달 말에는 한국과 회담이 잡혀 있지? 한국 전쟁때 삼촌이 전사했는데, 이번에야 말로 백마 고지에 둘러 볼까?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시계를 봤다. 음...이제 곧 총리와 면담을 가질 시간이군. 장관과는 말이 안 통하니 총리에게 후텐마 기지 문제를 따져 볼까?
11시 정각.
도대체 이 무슨 무례인가? 면담이 시작되자 마자 이 자식이 나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장소가 있다고 같이 가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채 총리를 따라 나섰다. 같은 차 안에서 어디로 가는지 정중하게 물어봐도 그냥 웃으면서 가보면 안다면서 창밖만 본다.
왠지 모를 경건한 표정에 나도 더 이상 질문은 하지 않았다. 단지 침묵하면서. 이 인간도 이런 표정을 지을때가 있구나 싶었다.
12시20분.
차에서 내리고 보니, 넓은 광장에 수많은 일본인들로 붐비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멀리 일본 전통 건축물이 보인다.
총리는 나를 데리고 그곳으로 갔다. 총리 일행이 계단을 올라 건물 안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이는게 보였다. 그런데 문득 문 안에 늘어서 있는 이름들 중 낯익은 한자가 보였다.
저건...
1시 40분.
면담은 예정대로. 총리 관저에서...하지만 면담 내내 나는 창밖만 쳐다봤다. 가끔 왜 그러시냐는 아베 총리의 웃는 얼굴을 보고는, 형식적으로 후텐마 기지 문제에 대한 총리의 답변을 요구했다.
그러나 역시나 몇번이나 미안하다 미안하다면서 결론은 더 내각과 상의해보고 답변을 주겠단다.
아아..그 웃는 얼굴이라니. 나는 울컥했다. 젊은 시절 울창한 밀림을 헤치며 몇번이나 죽을뻔했던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간듯 싶다.
몇번이나 발로 테이블을 걷어차고 저 역겨운 원숭이의 목을 조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참는다. 참아야 한다.
몇 번이나 반복해 주문을 외우다 문득 차 안에서 정신이 퍼뜩 들었다. 당혹감에 빠져 눈만 깜박이다 옆을 보니..
" 하이?"
"......."
....다 늙어 얼굴에 주름 가득한 원숭이가 웃는게 아닌가?
그날 저녁. 저녁 만찬은 물론이고 이후 일정을 다 취소하고 공군 전용기에 올랐다.
아아...오랜만에 기관총 잡고 야간 사격이나 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