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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10-06 09:29
[기타] 무식하여 너무 역겨운 한국 역사학계
 글쓴이 : 두부국
조회 : 3,849  

한국 역사학계의 무식함이 도를 넘어 아직도 사기 수준인 식민주의 사관에 매몰되어 있고 학계가 이처럼 사실에 무지하고 왜곡하니 소수이지만 일반 대중까지도 중국의 고대 기록을 엉뚱하게 해석하여 중국 북경 서남쪽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까지 하며 심지어는 중국 땅 한가운데인 황하.회하.장강 유역에 신라.백제 영토가 있었다며 지도에 추정강역을 그리기까지 합니다. 아마도 이들은 사마천의 <사기>나 반고의 <한서> 그리고 범엽의 <후한서>와 <수경주> 등의 기록이 소설로 보이나 봅니다.
미친 자들이고 정말 한심한 일입니다.
 
역사에 관심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까지는 생각지 않는 것 같은데 현 한국통설이 워낙 논리적으로 허술하다 보니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 입은 현대인들이 저들의 광기어린 역사소설에도 귀를 귀울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렇게까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요?
 
현 한국역사학계를 비롯하여 역사학 비전공인 역사관심가들까지도 고대사를 탐구하면서 갖는 일정한 경향이 있는데,
첫째는 고대라는 한 시기에만 집중하여 중세.근대 역사와의 연계를 생각지 않는다는 것,
둘째는 중국의 동북 경계에 대한 지리지 검토를 게을리 한다는 것,
세번째로는 현대지도의 지명 표기를 과신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강역.지리 부문인 위만조선 강역과 낙랑군 설치 위치를 찾는 일을 탐구한다면서 다짜고짜 지금으로부터 2000 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 패수.평양성 위치 비정에만 집중하여 지금의 평양이 역사서에 기록된 바로 그 평양성이라고 단정하고 지금의 평양시를 흐르는 대동강이 서쪽으로 흘렀으니 역사서에 기록된 패수가 틀림없다고 단정하는 것이 학문적 검토의 끝이라고 앙앙댑니다.
 
그러면 위만이 강탈한 조선의 왕검성이 과연 고구려의 평양성이고 고려의 서경이며 후조선의 평양이였고 지금의 평양이란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요?  또 강역을 추정하는데 패수와 평양성이라는 두 지명만으로 그 위치를 확정지을 수 있을까요? 또한 역사 사건과 거의 같은 시기이거나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기에 역사지리서를 저술한 중국의 사마천, 반고, 범엽, 력도원 등이나 비록 1000 여년 후이지만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나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 등도 현대 한국인이 보는 현대지도에 표기된 지리 인식을 갖고 있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만 리에 이른다는 장성이 완공된 진시황 시기 진나라의 동쪽 국경선은 조선 땅이였던 요동의 만번한이였습니다. 이 요동 땅에는 2100 리 길이의 염난수와 1250 리 길이의 대요수가 거의 한 곳으로 흘러들어온다고 반고를 위시하여 수많은 역사지리가들이 기록을 남겼습니다. 즉 한 시기부터 청 시기까지 대요수 곧 요하는 1250 리였으며 난수 또는 란하라 불린 물길의 길이는 2100 리였습니다.
 
그런데 현대지도에 표시된 요하는 3300 리로 늘었고 요하보다 더 크고 길었던 염난수,난수,란하라는 물길은 지금의 요하 하구에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1911년 청이 멸망하는 시기까지의 중국인들은 자신들과 조선 사이의 국경선인 압록강을 하북성 동북쪽 지역을 흐르는 란하의 동쪽 지류인 청룡하라고 말하는데, 현 한국사학계는 대체 어떤 근거로 지금의 압록강이라고 주장하는가요? 또한 지금의 압록강 하류 북쪽에 있는 불과 100 여리 안팎에 불과한 지금의 애하를 <한서/지리지>에 분명히 2100 리 길이라는 염난수로 추정할까요?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2100 리 물길을 고작 100 리 물길로 비정한단 말입니까?
 
현 한국통설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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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한국 역사학계의 무식한 예 하나

아래는 1592 년 남부주부 신충일이 조정의 명을 받아 압록강을 건너 누르하치를 찾아갈 때 지나친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과 비를 묘사한 약도인데 당시에는 1125 년 개국한 여진족 금국의 어느 황제묘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건주견문록>에 실린 약도 16 매 중 첫장, 조선시대 북방사 자료집 고구려연구재단(동북아역사재단 전신)편
 

 
 
 
`<고려사>에는 황성으로만, <조선왕조실록>에는 황성은 예전 여진의 황제성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용비어천가>에는 속전으로 대금황제성이라 불리는 고성지가 있고 그 북방 7 리 되는 곳에 비가, 또한 그 북방에 석릉 2 기가 있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도 집안을 황성평, 릉을 황제묘라고 설명되어 있고 1487 년 국경지대를 시찰한 성현의 시 `망황성교`에는 비문을 읽지 못해 `限不讀字`라 표현했습니다. 1536 년에는 집안 주변에 몰래 거주하는 여진족에 대하여 압록강반에서 퇴거하라고 유고한 심언광도 시를 써서 남겼는데, `皇帝遺墳巨碣存`이라 하듯 거비가 있다는 것 밖에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진희 <광개토왕릉비의 탐구> 44 쪽 축약
​위와 같이 조선 전 시기에도 옛 고구려 영역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호태왕릉을 포함한 2 기의 왕릉과 호태왕비가 있었던 압록강 상류 지류인 파저강 가에 있는 황성은 고구려 국내 지역의 위나암성이였며 국내성이였고 고려 말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공격한 우라산성이였습니다. 조선 초기 국경지역에서 일어날 사단을 염려하여 거주민을 소개시키고 비웠지만 엄연한 조선의 강역이였는데 워낙 깊은 백산 서쪽 바로 아래 자락이였고 가까이 인접한 여진만주족이 후금을 세웠고 또한 후금을 공격하려는 명 군사의 침공로로도 내어주다 보니 영토 의식이 분명치 못했을 것입니다. 이후 정묘.병자호란을 끝으로 청의 위엄에 눌려 완벽하게 조선에서 벗어난 땅이 된 것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이러한 황성과 황릉, 비가 있는 지역을 1883 년 왜종일본 육군 참모본부 중위 주구경신(酒句景信,사코오카게아키)이 동북3성 지역을 밀정짓하던 중 청나라 봉천성 흥경부에 속한 집안에 들러 호태왕비문을 쌍구탑본하여 돌아갔고, 참모본부 편찬과에서는 1889 년 <회여록>에 주부본탑본과 고구려고비석문,임나고,임나국명 등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물론 이때의 석문은 사코오가 `래도해파` 등의 극히 일부 비문에 석회를 바르고 변조한 글자를 새겨 탑본한 것을 저본으로 비문을 해석한 것이며 또한 1900 년 전후하여 1883 년 당시 잘못 변조한 글자와 더 필요한 글자를 새겨 넣기 위해 비면 전체에 석회를 바르고 글자를 새겨넣었습니다.
 
한편 비문 내용 문제와는 별도로 1918~1935 년 사이에 이 호태왕비를 원래의 집안에서 일본 본토로 반출하려 했으나 지명이동.지도변조 등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한 근거 자료로 활용할 목적으로 본토로의 반출은 포기하고 지금의 집안으로 이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추정지도- <청사고/지리지> 기록의 봉천성 흥경부 집안현 위치와 현 중국 요녕성 집안


 
 
 
주) 1. 적색 지명은 <청사고/지리지>에 설명된 위치임
​     2. 흑색 지명은 1934 년 제도된 만주국지도부터 표시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름.
 
 
 
그러나 지금의 집안을 청나라 봉천성 흥경부에 속한 집안현으로 인식하는 현 한국사학계나 현대지도에 표시된 지명들이 2000 여년 동안 한치도 변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일반 대중들은 호태왕비 이전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고 안믿고는 사실과는 격이 다르고 한참 동떨어진 별개의 문제입니다.
중국 25 번째 정사인 <청사고/지리지>에는 청나라 직예성에 속한 승덕부와 그 속현인 건창.조양.적봉 등의 원래 위치는 현대지도에 표시된 지금의 건창.조양.적봉 위치가 아닙니다.
즉 청 경사인 지금의 북경을 안전하게 지키려고 북경 주위에 동원 가능한 행정력과 군사를 집중하는 상위 행정단위가 직예성인데 이 직예성의 동서남북 경계까지의 거리 <청사고/지리지> `직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北至內蒙古阿巴喝右翼旗界 千二百裡   북쪽으로 내몽고아파갈우익기 경계까지 1200 리
東至奉天寧遠州界 六百八十裡             동쪽으로 봉천 영원주 경계까지 680 리
南至河南蘭封縣界 千四百三十裡
西至山西廣寧縣界 五百五十裡
廣 一千二百三十裡                             동서 길이 1230 리
무二千六百三十裡                              남북 길이 2630 리
 
위 기록으로 직예성의 땅 모양은 대략 남북 길이가 동서 길이보다 약 2 배 정도 긴 타원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최대면적을 상정하더라도 가로 680 리, 세로 1200 리 직사각형 지역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북경에서 동쪽으로 680 리 떨어져 봉천성 금주부에 속한 영원주가 있기 때문에 직예성에 속하며 북경을 기준한 남북선의 동쪽 방향에 설치된 승덕부와 승덕부에 속하였던 적봉현에서 승격한 적봉직예주. 승덕부에 속하였던 조양현에서 승격한 조양부, 영평부, 준화직예주, 다륜약이구 등은 기준선에서 동쪽으로 최대 680 리를 떨어져 있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동.북으로의 릿수와 지형지세 그리고 오래된 지명들을 감안하면 직예성의 동쪽 경계는 지금의 란하를 동쪽으로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조양.적봉.건창.무녕.노룡.창려.산해관 등은 어떤가요?
지금의 란하를 동쪽으로 약간 넘어가 있는 영평부의 무녕.노룡.창려.산해관과 건창까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조양과 적봉을 직예성에 속하였다고 볼 수 있나요?
아니지요? 
 
그렇다면 현대지도에 표기된 지금의 적봉과 조양은 청 시기의 적봉과 조양이 아니며 지금의 적봉과 조양은 지명만을 동쪽과 동북쪽으로 약 1000~1500 리 씩 옮겨졌다고 추정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청나라 정사인 <청사고/지리지> 직예 승덕부,조양부,적봉직예구 기록에는 승덕부 평천현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는 노합하가 적봉현으로 흘러들어가 적봉현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황하에 합쳐져지고 또한 적봉현에서 흘러오는 영금하도 황하로 합쳐진 후 동쪽으로 흘러 조양을 경유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노합하.황하.영금하 등이 모두 대릉하로 흘러들고 이 대릉하는 요하로 흘러들었지요.
그러면 지금 적봉을 흐르는 노합하가 지금의 대릉하로 흘러들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지금의 적봉과 지금의 조양 사이에는 송.요 시기 이후 장백산이라 불린 동서 방향으로 1000 리에 뻗어있는 산군이 분수령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적봉 부근의 물은 모두 동북쪽으로 흐릅니다. 즉 지금의 적봉과 노합하는 청 시기 노합하.영금하.황하가 흐르는 그 적봉이 아닌 것입니다.
청 시기의 승덕.적봉.조양은 모두 지금의 북경 북쪽에 있는 밀운.고북구 가까이에 위치했었습니다. 이곳 청나라 승덕부의 열하.조양.적봉현 지역을 장악한 왜종일본이 만주국의 승덕성을 설치하면서 적봉.조양을 동쪽,동북쪽으로 약 1000~1500 리 떨어트려 놓은 것입니다. 무식한 것인지 미친 것인지 모르겠으나 <청사고/지리지>에 기록된 적봉의 노합하와 조양의 대릉하도 당연히 저 거리만큼 떨어트려 놓았습니다.
 
즉 몇몇 지명 정도를 옮긴 것이 아니라 땅.물길.산 등 종류와 갯수를 가리지 않고 몽땅 옮겼기 때문에 지도변조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 땅을 점유한 만주국이 성.부.주.현을 설치했다면 그 역시 역사이며 역사지리입니다. 문제는 만주국 지리지에 옮긴 사실을 기록해야 하는데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변조.조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눈에 띄는 조양.적봉의 예를 들었지만 이뿐만이 아니고 청나라 직예성 승덕부 동쪽에 설치된 봉천성 금주부.봉천부.흥경부.장백부 등도 당연히 조양 동쪽인 지금의 요동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면 조양.적봉 등이 옮겨진 곳에는 무엇이 있었으며 원래 있었던 지명들은 어디로 옮겨졌을까요?
 
지금의 조양 서쪽 지역에 있었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봉천성 흥경부에 속한 집안현이며 고구려 국내 위나암성이 있었고 호태왕릉과 비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비가 있었던 지금의 조양 약간 서쪽 위치에서 지금의 집안으로 옮길 수 있다면 어떠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실증사학이라면 목숨을 걸 정도로 유적.유물을 절대시하는 성향의 역사학자들을 손쉽게 속일 수 있습니다. 즉 호태왕비가 있는 지금의 집안이 청 시기의 원래 집안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본왜종은 바로 이점을 노리고 일본본토로 반출하지 않고 지금의 집안으로 옮긴 것입니다. 1918 이후 1935 년 사이에 왜종일본은 호태왕비만 지금의 집안으로 옮겼고 결국 지금의 집안은 고구려의 국내성으로 비정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역겨운 역사조작이고 이를 역사사실로 믿고 있는 현 한국사학계가 너무 한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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