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조선일보 why에 실린 기사인데 사실이면 흥미롭군요.
[Why] 단재가 한민족 첫 正史로 소개한 '神誌?詞'… 조선시대 禁書목록에 오른 까닭은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입력 : 2015.10.03 03:00
[김두규 교수 國運風水]
1931년 6월 10일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일보 학예란에 기고를 시작한 ‘조선사’.
1931년 6월 10일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일보 학예란에 '조선사' 연재를 시작한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투쟁…"이라는 명문장으로 '조선사'는 시작한다. 그해 10월까지 103회가 연재되면서 독자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았고 훗날 책으로 간행되는데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조선상고사'이다.
여기서 단재는 우리 민족 최초의 정사(正史)를 '신지비사(神誌 詞)'라고 소개한다. 단군조선 때 신지라는 사관이 쓴 비사이다. 단재는 '신지비사'가 우주창조·단군조선의 건국·산천지리 등을 노래한 것으로 훗날 고려 때의 '해동비록'에 일부 내용이 요약 정리돼 포함되었다고 말한다. '해동비록'은 1106년 예종의 명에 의하여 당시 풍수서들을 집대성한 책이다. '신지비사'는 역사서이자 풍수서이기도 한 셈인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신지비사'에서 단재가 주목한 것은 삼경설(三京說)이다. 저울대·저울추·저울판 이 세 개가 갖춰져야 저울이 제 기능을 다하듯 나라도 세 개의 수도(삼경)가 있어야 나라가 번성하여 주변 70개국이 조공을 바칠 거란다. 저울대·저울추·저울판설은 중국의 그 어떤 풍수서에도 등장하지 않는 우리 민족 고유의 풍수설이다. 그 흔적은 고구려의 삼경제·고려의 삼경제 등에서 드러난다.
'신지비사'가 말하는 삼경이 어디인가에 대해서 고려의 풍수관리 김위제는 평양·개성·한양을 꼽았다. 그러나 단재는 하얼빈(哈爾濱)·안시성(安市城)·평양이라고 반박하였다. 아울러 단재는 고대 우리민족이 활동했던 드넓은 영토를 망각하고 후세인들이 '도깨비도 뜨지 못하는 땅 뜨는 재주를 부려 만주 땅에 있던 지명들을 한반도로 옮겨 스스로 우리 영토를 압록강 이하로 축소시켰음'을 비판하였다.
'신지비사'는 그 후 어찌 되었을까? 고려왕조 까지 은밀히 전해지다가 조선왕조에 들어와 금서가 된다. 조선의 태종·세조·성종은 고려의 수많은 풍수·음양서·비기( 記)들을 금서로 지정하여 소각하거나 비장시킨다. 그 가운데에서도 '신지비사'는 금서의 첫 번째 대상이었다. 예컨대 태종은 1412년 8월 충주사고에 비장된 비결들을 가져오게 하였는데 '신지비사'만큼은 그 누구도 보지 말고 밀봉한 채 가져오게 할 정도였다. 태종은 '신지비사'를 직접 펼쳐본 뒤 "이 책에 실린 것은 모두 괴탄하고 근거 없는 주장들"이라고 하면서 불태우게 한다. '신지비사'가 공식적으로 역사에서 사라진 시점이다(단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보았다).
왜 조선왕조는 그토록 '신지비사'를 없애고자 하였을까? '신지비사'는 우리 민족의 활동 주요 무대를 만주로 보았으나 조선은 우리 영토를 압록강 이남으로 한정시켰다. 최영 장군의 요동정벌론을 부정하고 세워진 나라이다. '신지비사'는 우리 민족이 70개국의 조공을 받는 동아시아 최강국을 표방함에 반해 조선은 스스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되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신지비사'가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가 이 책의 내용을 알까 두려웠다.
이후 '신지비사'는 영원히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뜻밖에도 역사학계의 태두인 이병도 박사 소장설이 나왔다. 이병도 박사가 '진단학보' 창간사에서 "신지가 썼다는 비사를 갖고 있다"고 하였다.
훗날 박성수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역사학)가 이 박사와의 언론사 인터뷰에서 '신지비사' 소유 여부를 물었다. 그때 그는 묘한 표정으로 답변을 회피했다고 한다.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으나 문헌 고증을 중시하였던 이병도 박사이고 보면 어디엔가 비장하고 있지 않았을까. 언젠가 '신지비사'가 다시 세상에 나온다면 드넓은 만주 땅에서 활동하였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다시 쓰일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