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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9-30 17:54
[기타] 이병도 스승은 위대하신 분들이다???
 글쓴이 : 유리수에요
조회 : 2,500  

일제강점기 이병도 스승들이 천황중심사학에 반대했으므로
이병도느님은 식민사학자가 아니라는 미친 식민빠 버러지들은 눈구녕을 스스로 파라

그가 와세다(早稻田) 대학에 입학한 1914년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때였다.
당시 와세다 대학에는 사학과 대신 동양사, 서양사, 일본사, 사회학 등이 분리되지 않은 채 한데 합쳐진 '사학급 사회학과(史學及 社會學科)'가 있을 따름이었다.
사학급 사회학과에 들어간 그가 애초에 전공하려던 것은 서양사였다.
그러나 일본사의 권위자였던 요시다(吉田東伍) 박사의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 책을 접하고 그의 강의를 들은 뒤 국사를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뀐다.
이병도가 학사 1학년 때부터 가르침을 받은 요시다 박사는 일본 사학계에서 알려져 있는 석학이었으며 일본사 외에도 한국고대사 연구에도 영향력이 있는 학자로서 이병도를 비롯한 한국 유학생들에게도 영향력이 컸으며 그만큼 교분도 넓었다.
그의 영향력하에 있었던 이병도를 비롯하여 문학부에 적을 둔 한국 유학생들은 어느 날 그의 초대를 받고 간 자리에서 소위 한일합방이 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그동안 궁금했던 사안을 놓고 대화를 하게 된다.
이병도와 그의 선후배 한국 유학생들은 "일본이 한국을 동화시키려고 하는데 과연 그렇게 되겠습니까?" 하고 질문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요시다 박사는 "단시일엔 안 된다. 그러나 앞으로 50년만 이 상태가 계속되면 반드시 동화가 될 것이다."라고 자신있게 답한다.

한국 유학생들의 질문에 요시다 박사는 소위 '일선동화론(日鮮同化論)'으로 자신있게 답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학생도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이병도 스스로 해방 이후 6,70년대 잡지글에서까지 자신의 생애에 '가장 영향력을 많이 준 사람'으로 꼽고 있는 일인 식민사학자 요시다 박사는 일본이 소위 한일합방 이전부터 식민사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고대사 연구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그는 이병도의 역사관 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병도는 요시다 이후 취임한 쓰다(津田左右吉) 박사 밑에서 강의를 받으면서 국사 연구의 뜻을 굳히게 된다.

 

이병도가 국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27년경 조선총독부 중추원 산하에 조직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식민사가 이마니시(今西龍)의 수사관보라는 직함을 맡게 되면서부터였다.
와세다 일본 유학 시절 사학교수였던 이케우치(池內宏) 박사가 이병도를 추천하여 몇 해 동안 촉탁으로 근무하게 된 것이다.
일제하 한국사 연구에 종사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른바 대일본 제국의 이념에 투철한 황국사관의 학자였다.
이러한 학자들은 조선총독부의 지원하에 경성제국대학이라든가 조선총독부 중추원 및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나, 만철(滿鐵, 남만주철도의 약칭)의 지원하에 막대한 예산으로 식민지화를 위한 조사 사업을 진행하던 만철조사부에서 연구하고 있었다.
이름난 교수들은 어느 직장에 있거나 간에 앞에 열거한 연구기관의 고문 또는 촉탁으로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들은 일본사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제국대학 중심의 관학파들이었다.
식민사관에 깊이 공감하던 이병도가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으로 임명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식민사관 총서 《조선사》 간행 참여

이병도는 이마니시의 수사관보 역할을 하면서 그의 연구 과정에 결합하여 《조선사》 제1,2편(통일신라시대), 3편(고려시대) 편집 등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사관 수립 사업에 기여하게 된다.

일제의 한국사관이 총괄되어 있는 《조선사》는 37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방대한 연구서이다.

《조선사》 편찬은 당시 조선총독부가 정책적으로 결정한 사업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3·1운동 후 한국인들의 독립 정신을 무마하고 이들을 회유동화시킬 고차원의 식민지 문화정책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조선사》는 그들이 시행한 문화정책의 명분을 살리는 한편, 이로써 한국인의 역사 의식을 흐리게 하여 장기적인 식민지화의 포석을 굳히는 데 이용되었다.

그들의 《조선사》 편찬의도는 《조선반도사》 편찬 요지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인은 다른 식민지에 있어서의 야만(野蠻)적이고 반(半) 개화된 민족과 달라서 독서속문(讀書屬文, 독서문화)에 있어서 문명인에 떨어지는 바가 없다. 고래로 사서의 존재하는 바 많고, 또 새로이 저작되는 바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전자는 독립 시대의 저술로서 현대와의 관계를 결하여 다만 독립국의 구몽을 추상시키는 폐단이 있으며, 후자는 근대 조선에 있어서의 일청, 일러의 세력 경쟁을 서술하여 조선의 향배를 말하고, 혹은 《한국통사》라고 하는 재외 조선인의 저서와 같은 것은 일의 진상을 살피지 아니하고 망설을 함부로 한다.

이들의 서적이 인심을 어지럽히는 해독은 참으로 말할 수 없는 바 있다.

●이병도의 연구활동

조선사편수회에서 국사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던 이병도는 활발한 연구 성과를 발표하게 된다.

그는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기 전 한국의 근대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당쟁상(黨爭史)를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고 있었으나, 조선사편수회 연구 활동 과정에서 연구 방향을 유학사(儒學史)로 전환하였다.

그 이유는 당쟁사보다 유학사가 더 근본적인 요건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유학사 연구는 무엇보다도 퇴계와 율곡을 중심으로 그 전후의 유학사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연구 논문 주제로 '이율곡의 입산동기'를 잡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논문은 조선사편수회에서 발행된 {조선사학} 창간호에 발표되었다.

'조선사편수회'가 창립되었던 1920년대 후반기의 역사 연구의 학풍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박은식, 신채호(申采浩) 등에 의해 주도된 민족주의 사학, 문헌고정비평과 역사적 사실의 고증적 인식을 주로 하는 실증사학 및 사회경제사학으로 불리는 유물사관으로 분류되는데, 이러한 학풍은 1940년대까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병도는 실증사학계로 분류된다.

실증사학은 당시 일본 사학계의 일반적 조류인 랑케(Leopold von Ranke)의 사학을 밑바탕으로 하여 개별적인 역사 사실의 문헌 고증을 주로 한 계열이다.

이들은 랑케의 "주관적인 판단 없이 역사적 사실을 원래 있는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입장에서 한국사를 연구했다.

이들은 주로 일제의 고등교육을 통하여 신학문에 접했던 역사가들이기 때문에 일본인 조선학 연구가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병도는 얼마 후 고대사 연구에 착수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 이병도 자신이 "일본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그의 연구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일본인 선생들은 "그들의 정치적 요구와 학문적인 호기심으로 한국과 만주에 걸친 역사 지리에 관한 조사 사업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독려했던 것이다.

당시 이병도가 고대사 연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그의 스승인 이케우치(池內) 박사가 그 방면의 연구 논문을 쓰기 위해 연구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가 이병도에게 만주 지리 역사 연구 보고를 꾸준히 보내 주었기 때문이다.

이병도는 자신이 존경하는 스승이 보내 주는 그 자료에 대해 "필시 고대사 연구에는 역사 지리의 연구가 기초적이고 선결 요건"임을 스스로 간파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가 분분한 삼한사군(三韓四郡)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병도는 자신의 연구 방향을 일본 학자들의 의도와 방향에 성실하게 따랐으며 그들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이병도 자신의 연구 주제와 관련하여 일인 학자들의 관심과 배려에 대해 깊은 감사와 은혜를 입은 것으로 생각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는데서 유래된다.

그의 고대사 연구는 일본의 '만선사관' 창출과 관련하여 일제 관학자들의 연구를 돕는 역할을 충실히 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는 결국 일인 사학자들의 바램대로 사군 문제를 연구하게 되고, 그 연구 성과는 '진번군고'라는 논문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1927년 그는 이케우치 박사를 통해 동경제대 중심의 { 잡지}에 [진번군고]를 비롯하여 [고려삼소고] 등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일본에 발표된 이 논문은 일본 동경에서 열리는 사학 대회에서 와세대 대학의 시미즈(淸水泰次) 박사의 권유로 공식 발표하기까지 하였는데,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만큼 일본 학계에 선풍을 일으켰다고 회상하는 이병도는 이러한 자신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병도는 해방 이후 자신의 연구 활동을 뒤돌아보면서 "일제의 탄압 밑에 민족의 역사가 짓밟혀 가는 수난 속에서 자기 나라의 역사를 밝혀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과 책임감"이 있었다고 합리화한다.

이병도의 소박한 의무감과 책임감은 자신의 연구 결과가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식민사관 정립을 위해 설립했던 조선사편수회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공헌하고 있었음을 간과하는 주관적 의지일 뿐만 아니라 환상이며 감상적인 의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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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수에요 15-09-30 17:54
   
일본의 천황 역사관을 이병도 스승이 부정했다고???
이병도의 첫 스승이 일선동화론을 주창하고 이병도는 그걸 철썩같이 믿었는데?
 
일선동화론이란?
일제가 식민지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역사이론으로 와세다 대학의 요시다 도고에 의해 주창되었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의 조상에서 비롯되며 조선의 역사는 일본에서 시작한다고 이론을 펴 일제시대 조선의 저항을 누그려트리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된 식민사관이다.
유리수에요 15-09-30 17:58
   
한민족 고대사를 말살하고 일본이 조선의 조상의 나라가 된다는 일선동화론에
흠뻑 빠져들어 동양 고대사로 전공을 정하여 일제가 조선 고대사 말살을 위해
조선편찬위에 한일학자 통틀어 최장기 근무한 이병도가 민족사학자라고? 뇌를 토하고 죽어라

이병도 스스로 해방 이후 6,70년대 잡지글에서까지 자신의 생애에 '가장 영향력을 많이 준 사람'으로 꼽고 있는 일인 식민사학자 요시다 박사는 일본이 소위 한일합방 이전부터 식민사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고대사 연구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그는 이병도의 역사관 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병도는 요시다 이후 취임한 쓰다(津田左右吉) 박사 밑에서 강의를 받으면서 국사 연구의 뜻을 굳히게 된다.

뒈지는 그날까지 한민족 고대사 말살 조선인 자체를 없애기 위해 일선동화론을 주창한
스승을 존경한 이병도를 민족사학자라느니 식민사학자가 아니라는 무뇌충 버러지들 ㅉㅉㅉㅉ
유리수에요 15-09-30 18:00
   
식민빠 버러지들은 또 정신승리를 하겠지 빨간 글씨만 제대로 읽어도
이병도는 구족을 멸할 민족반역자 식민사학의 철저한 신봉자라는걸 알텐데
죽어도 식민사학자가 아니라느니 한발 더 나아가 민족사학자라는 총맞아 죽을 소리나 해대지
유리수에요 15-09-30 18:04
   
내가 식민빠 버러지들 민족반역자 새키들 아닥하게 할
이병도 죄악을 낱낱이 밝힐 증거자료를 넘치게 모아놨는데
문제는 식민빠 버러지들이 개독과 동급 아니 그 이상으로
이병도교 광신도들이라 숱한 증거를 보여줘도 찬양하기 바쁘다는거
원조 일뽕 버러지들 식민사학이 버젓이 살아숨쉬는데 그걸 죽어라 부정하는 민족 반역자들
     
바람따라0 15-09-30 18:13
   
그심정 이해합니다.

이병도의 죄상에 대해 반론은 못하고,
물타기에 급급한 것이 저들이지요.
          
유리수에요 15-09-30 18:35
   
초록불 이 천하의 개잡 놈 때문에 여러 사람을 버려놨지요
     
지나가던이 15-10-04 14:42
   
2222222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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