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요 몇일 기독교의 불교에 대한 땅밟기 논란으로 기독교가 좋으냐 나쁘냐로 나뉘어 아주 많은
게시물이 올라왔습니다. 그중엔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행한 행동에 대해
잘못된 지식과 인식으로 무조건적인 배타만 하는 글도 봤고 또 어떤분들은 불교가 무조건적으로
좋다 라는 인식도 있었습니다.
전에도 쓴적이 있지만 전 종교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종교에서
말하는 어떠한 특징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첫째, 종교는 신을 믿는다.
식상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사실입니다. 불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의 주체는 신이고 신을 믿고
추구한다며 신앙심이라는 단어로 표현됩니다. 또한 신의 가름침을 배우는 학문 즉 신학 이라는
것도 존재 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의 신학은 신학이라 말할수 없고, 신의 족보학 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신의 가르침, 그뜻을 파악하고 공부하려는것이 아니라 신을 믿는다는 전제로
신의 발자취를 따르고 신의 후손을 따라가고..
그렇다면 사람은 신을 믿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후에 천당을 가기 위해??
단순히 믿기만 하면 되는것입니까?
기독교도 불교도 사후세계에 대하여 천당이나 지옥이란것이 존재합니다. 기독교든 불교든
천당이 필요한 이유는 현실적 인간의 선업에 대한 보장 때문에 있는것입니다.
그 보장에 대한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하느님이란 존재가 필요 한것입니다.
(선 혹은 사랑을 베푼다>>>천국에 간다>>>누가보증해??>>>신이 보장한다)
임마누엘 칸트는 신이란 것은 우리가 존재한다 안한다를 말할수가 있는것이 아니요, 인간의
윤리적 요청에 의해서 만든것이다. 라고 하였고 서양의 종교에서는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선을 쌓는다는 행위는 절대 나쁘지 않은 행동인데 가장
기본이 되는 선을 쌓는 행위에 대하여 꼭 어떠한 보답이나 보장이 전제되야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인간은 자율적 도덕성을 가지기 힘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욕망이란게
존재하고 이 욕망이 도덕적 양심보다 강할때가 많기 때문에 인간은 어떠한 도덕적 압력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선을 행하는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선을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에 댓글로 한번 언급한적 있지만 세계는 3가지의 세계관이 있는데
첫번째는 초월적 세계관 입니다. 두번째는 역사적 세계관, 그리고 세번째는 윤회적 세계관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도덕적 압력(moral pressure)을 어디서 받느냐에 따른
기준입니다.
즉 누군가의 강요나 강압이 아닌 스스로 욕망을 절제하고 악행을 하지않게 되고 선을 지키게되는
압력을 어디서 받느냐에 따른 분류라고 할수있습니다.
초월적 세계관은 서양, 그리고 유일신, 즉 기독교가 이곳에 포함된다고 할수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유일신 하느님이 나와 항상 함께하시며 위에서 나를 언제나 지켜보시기에 언제나 선을
행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만 사후 천국으로 갈수있다 라는 압력입니다.
역사적 세계관은 중국 및 과거 유교중심의 동양국가에서 발전했는데 이들의 특징을 보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을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라는 말이 가장 이 세계관을
잘 표현한것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즉 나의 역사나 우리 가족의 역사. 더 나아가 국가의 역사속에서
후대에 내가 어떠한 존재로 평가받을 것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마인드가 여기에 포함된
다고 할수있습니다. 따라서 선을 행함에 있어서 역사에 압력을 받고 살아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것이 오늘 이야기할 불교적 특징인 윤회적세계관 입니다. 이 윤회적 세계관은
초월적 세계관과 역사적 세계관 사이에서 교차적으로 움직이는 성향을 가지고있습니다.
이 세계관은 초기 불교의 근간이라 할수있습니다.
둘째, 모든 종교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팔아먹고 사는것이다.
살아 숨쉬는 모든 생물들 중에 오직 인간만이 죽음을 인식하고 살고있습니다.
인간이 원시인일때. 혹은 부모와 나를 인식하고 대화가 가능한 아기를 벗어나
갓 꼬맹이였을때, 인간은 죽음을 인식하고 살았습니까? 이 죽음이라는 의식은 오직 언어라는
것과 더불어 생겨난 것입니다.
죽음은 개념이며 언어입니다.
종교는 언어를 통해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팔아먹고 사는것입니다.
하다못해 어떤 암이 걸린 환자에게 의사가 "살수있습니다 희망을 가지세요." 라고 말하는것과
"죽을수도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것중 어떤것이 환자에게 힘이 되며 위안이 되는가.
한국의 불교를 알기전에 우리는 먼저 초창기 불교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논란에 대한
글을 보면 초기기독교 자체와 인간의 의지와 문화 및 환경적 요인으로 성서를 기형적으로 해석하고
실천하는 지금의 변질된 소위 "개독교"라 불리는 개신교를 동일시 하면서 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원래적 모습을 살펴보지 않고 이들을 동일시 하는것은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불교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되어 불교도 똑같이 욕할수 있는 일종의 "꺼리"를 제공할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가장 순수했던 원시적 모습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것이 가장 중요
하다고 할수있습니다.
원시 기독교의 모습은 간략히 설명하면 인간은 원죄가 있으니
(선악과 이야기인듯, 왜 도덕적 압력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 및 근거),
항상 죄를 짓지말고 선을 행하고(이것이 중요),
하느님을 믿고(도덕적 압력을 주는 주체 및 결과에 대한 보증자)
우리주 예수그리스도(선의 구체적 방향제시자 및 보이지않는 도덕적 압력을 구체화)가
우리의 죄를 위해 희생한것을 믿으면 천국에 임하게(결과 및 보상) 되리라
이런 형태가 원시기독교의 모습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즉 어떠한 행위에 대한것은 결과가
있는것이 필연적인데, 그 어떠한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결과나 결과에 따른 보상이
있어야만 인간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게 정석이겠죠. 이것은 결국 인간은 자율적 도덕성이
부족하기에 압력을 가하는것이라 할수있습니다. 행위에 대해서 나쁜것은 벌, 지옥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고 좋은 행위에 대한것은 보상으로 나타납니다. 보상이 없으면 행위 자체를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보상이라는것이 나오는거죠. 그 보상에 대한 믿음과 보증을 하기위해
인간의 개념으로 "신" 이라는 것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초기기독교인들은 모습은
행위-결과-결과에 따른 보상-믿음 이 순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행위" 에 충실했다면,
인간의 개념대로 각 지역별 문화별 혹은 시대별, 정치적 정복수단이나 이념적 대립의 수단으로도
종교는 변질되고 종파별로 나뉘고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나뉘어 결국엔
가장 기본이 되는 "행위"가 우선이 아니라
"죽음과 결과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여 믿음이라는 것이우선" 되는것으로 변질되었다고
할수있습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도 부처를 인간으로 규정하지만 해탈을 통한 초월자로 불상이나 형태를 만들어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가? 이것을 어찌 신이 아니라 할수있는가?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것입니다.
이제부터 초기불교의 모습부터 불교의 변질화되는 과정과, 한국내에 있는 모든 불교가 좋은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이 변형되고 지금의 "개독교" 라 불리는 부류와 다를바 없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가 될수도 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불교의 시초는 부처라고 알고있습니다. 기독교의 예수님이 등장하기 이전에
부처는 등장했지만 현재 많은 진실과 왜곡으로 인해 예수라는 존재가 실제로 존재했느냐?
안했으냐를 가지고 논란도 있지만 예수는 존재 했던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존재하느냐 안하느냐 에 대한 존재성 여부 논란 자체를 할수 없는 부분은 절대자
유일신 하나님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존재성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예수 보다 더 오래된 부처의 존재성 여부는 논란이 되지 않았던 것이 인도 역사상
가장 강력한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이 적극적으로 소승불교를 장려하였는데 경전을
정리시키고 주변국에 불교를 전하여 불교가 세계종교로 발전하는데 공헌하며 각종 그시기의
기록과 유적이 많이 남게 되는데 이 아소카왕이 살던 시기와 부처가 사망한지 불과
100년밖에 차이가 나지않았고 부처의 가족이 살던 성과 가족에 대한 기록도 있기에 부처의
존재성 여부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당시의 초기 불교는 지금처럼 불상
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서 수레바퀴(윤회굴레 모습 형상)로 불법을 상징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부처는 이름이 아닙니다. 예수가 그리스도(Christ :
기름부음을 받은자, 하느님의 아들로 선택받은자)가 되었듯이, 부처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 입니다.
이 싯다르타가 붓다(깨달은 자)가 되고 불교가 중국을 거쳐 신라도 들어오면서 붓다
라는 말이 부처로 번역된것입니다. 여기서 고타마는 성이고 싯다르타가 이름인데
중국의 한자에 없는 발음이기에 한자식 발음으로는 구담실달 이라고 합니다.
그럼 석가모니는 무엇인가? 석가모니도 인도식 발음으로는 샤카무니 입니다.
이뜻은 샤카는 고타마씨족의 커다란 씨족 이고 무니는 성자라는 뜻입니다.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제가 만약 밀양박씨 라면.
밀양이 "샤카" 이고 고타마 가 "박" 이라고 할수있죠. 즉 샤카무니는 샤카족의 성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오는 말하고자 하는것은 부처의 역사를 논하고자
하는것이 아니기에 이정도만 상식적으로 알고 계시면 좋을듯합니다.
고대 인도의 언어는 샨스크리트 어로 불교의 초기 경전은 대부분 샨스크리트어로 기록
되어있습니다. 샨스크리트 어는 한글과 같은 표음문자이고 중국의 문자는 표의 문자
이기 때문에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될때는 불교의 경전을 해석하고 표의문자로 재작성
되는 기간이 100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불교가 중국을 거쳐 신라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적잖은 왜곡이 발생됩니다. 이것은 언어적 차이도 있지만
문화적 차이도 한몫을 하게됩니다.
위에서 언급한데로 윤회적 세계관은 역사적 세계관과 초월적 세계관 사이를 왕복한다
하고 정의했는데 기본적으로 샨스크리트어와 불교의 지독한 개인주의 사상은 서양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인간의 선의 실천과 고도의 도덕성 강조는 동양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수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중에 "그게 니 업보다" 라는 말을 종종 쓰곤 합니다
업이란 인도말로 karma 즉 영어로는 do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고, 우리식으로 해석하면
어떠한 "행위" 라고 할수있습니다. 보 란 그 행위에 대한 결과 라고 할수있습니다.
윤회란 업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라고 할수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세계관은 지닌
중국의 불교에서는 윤회가 없어도 불교 이론에 대한것을 성립할수 있었습니다.
흔히 서양문명이나 종교를 보면 인간이 사후에 영혼이 하늘로 가거나 지옥으로 간다고
합니다. 즉 사후에 대한 세계를 인정하죠. 사후세계를 인정한다 함은, 영혼이 존재
한다는 것인데, 그럼 지금 내가 살아있다고 함에 있어서 진정하게 살아있다고
말할수 있는 부분은 육신입니까? 영혼입니까? 불가에서 말하는 진정한 삶은
불멸하는 즉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육신이란 영혼을 잠시 담는 껍데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윤회는 서양에 가깝습니까? 동양에 가깝습니까? 이것이 과거에 불교가 서양적인 영향도
많이 받았다는 반증이 되곤합니다.
자꾸 말이 헛돌았습니다. 윤회에 관해서 설명하다보니...흔히들 윤회라고 하면 사람이 죽은뒤
살아있을때의 죄의 크기나 선의 크기에 따라 짐승으로도 태어나기도 하고 천계에 가기도 한다
라고만 많이들 알고있을것입니다.
하지만 윤회라는 것은 "육도윤회" 라고도 하며 즉 6가지의 세계를 돌고 돈다는 뜻 입니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계, 천계 이 6가지의 세계를 전생의 업에 따라 돌고 도는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면 死者의 죽음. 죽은자가 또 죽고 또 죽고 죽는것을 계속 반복하는것입니다.
지금의 삶에서 많은 선업을 쌓아서 다음생이 천계에 태어난다 해도 인도에서 말하는 천계는 영원히
사는 천국이 아니라 무결점의 공간이지만 인간의 삶처럼 한정된 삶을 사는 공간입니다.
그렇기에 천계인이 천계에서 선업을 쌓지않으면 죽은뒤 지옥이나 축생 이런식으로 고통을 받는
세계에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인도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고통이였고 괴로움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이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을 해탈(풀어벗어던지다)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윤회의 옷을 벗어버리다. 뭐 이렇게 풀이해도 무방합니다.
그럼 이 업을 통해 윤회가 계속 반복된다고 할때, 내가 지금 현생에서 고통받고 괴롭다 하면 그것은
전생의 내 업이 지금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뜻인데 인도역사에서 불교가 가장 많은 공격과 지탄의
대상이 되는 부분이 이처럼 인간의 삶이 하나의 숙명론, 그리고 결정론으로 규정되어 인도
신분제도인 카스트제도에서 노예에 속하는 수드라 계급과 짐승보다 못한 불가촉천민인
하리잔 계층사람들을 온전히 부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사상의 단편만을 보고 해석한것이고 만약 수드라나 하리잔 계급에서 자신의
삶을 하나의 숙명이나 결정된 삶으로 봤을때, 지금 처해진 자신의 환경이 짐승보다 못한
고역같은 삶에서 단한번 이라도 현실에 대한 부정으로 반역하지 않았을까요?
대부분의 이들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습니다. 이들은 왜 현실을 받아들이고 순응했을까요?
결국 윤회란 과거를 중심으로 해석하면 숙명론이나 결정론 밖에 안되지만 현실에서 선을 쌓으면
다음생을 바꾼다는 커다란 반전이 있었습니다.
결국 싯다르타는 숙명적 업을 혁명적 업으로 바꾼 사상가였기에 많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 것이죠, 그리고 그들이 어떤 힘든 상황에 있어도 주변 모든이들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게 됩니다.
욥기엔 "오늘의 고통은 선업을 통하면 하느님이 보상해 주신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에서는 냉정하게도 "지금의 고통을 현실에서 해결할 방법이 없다. 지금의
고통은 전생의 잘못이기 떄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럼 해탈은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하실것입니다. 열반에 들어간다 혹은 해탈을 했다 라고들
하는데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 성불했다고 합니다. 성불이란 붓다. 위에 언급한대로 깨달은 자 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소위 부처님 하면 석가모니, 미륵, 아미타 등등등 많은 이름들이 있는데 단순하게 이야기 하자면
미륵부처란 미륵이란 이름의 깨달은자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복잡하게 들어가면 석가모니불
이후에 등장하는 세상을 구원할 미륵부처님 이라고 하고 내용이 어려운 단어가 많고 복잡한데.
중요한것은 불교의 기원인 고타마 싯다르타도 세상을 구원한다는 그런 거창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다음에 오시는 미륵보살님 이런건 모두 인간이 만든 하나의 설 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런 미륵보살에 대한건 기독교의 메시아 와 유사점이 많습니다.
그럼 해탈은 어떻게 하는것인가? 정답은 불교에서도 모릅니다.
불교에서는 불교가 열반이나 해탈을 위한 해탈교가 아니라고 합니다. 윤회의 과정속에서
선업을 쌓아가느냐의 문제이고 끝없는 윤회의 굴레 속에서 반복되는 선업을 쌓는 과정중에
깨달음을 얻을때. 그것이 해탈이고 그것이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입니다.
복잡하게 설명하면 굉장히 어려운 윤회적 사상을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풀이해서 쓰니 내용이
단순하군요. 그럼 불교가 중국을 통해서 신라로 들어올때 가장 크게 어떻게 왜곡 되었는지
대략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불교는 개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는 극도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내가 지금 고통받는건 나의 잘못때문이지, 내 부모의 탓도 아니고 내 자식의 탓도
아니라는것이 불교의 기본적인 바탕인데, 이러한 불교의 윤회의 주체를 개인에서 가족으로
바꾼것이 중국입니다. 중국은 본래적으로 동양적 사상이 강하기에 개인보다는 공동체적 성격을
많이 요구하는게 특징입니다.
이러한 왜곡은 중국의 역사적 세계관과 가족적인 부분이 강조되어 왜곡되는데
주역에 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적선지가 필유여경 적불선지가 필유여앙 :
선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남게 되고 불선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재앙이 남게 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의 불교가 윤회의 주체를 가족으로 묶어버리는 오류를 범했으며
이러한 중국적 불교가 신라로 유입되어 오면서 발전된것이 불교을 종파별로 성격별로 나눌때
크게 쓰는 대승불교 와 소승불교의 성격으로 나누는 기준점이 됩니다.
선을 쌓아가는 과정속에서 깨달음을 소승불교에서는 가르쳐줄수도 없는 부분이며 누군가의
도움도 바랄수 없이 스스로 해야하는 부분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고,
대승불교에서는 깨달음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나의 깨달음은 남에게도 알려주어야 하며
같은 수행을 하는 자에게 동시에 깨달음이 일어날수도 있다고 해석하는 입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렇듯 중국을 통해 왜곡되어 들어온 불교적 특징은 쉽게 찾아볼수 있습니다.
자식의 수능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나, 돌아가신 조상을 위한 우란분제 같은것이나, 사업 번창을
위한 기도나 등등등 이 이러한 모든것이 잘못된 불교의 행태라고 할수있습니다.
또 하나 변형된 불교의 특징은 보면 인간의 운명을 점친다든지 하는 행태입니다. 초기 불교의
성격을 위에서 언급한것중 하나가 윤회를 과거적 시각으로 보면 숙명론이나 결정론밖에
안되겠지만 싯다르타는 선을 통한 혁명론을 말했습니다. 결국 이것은 지금의 고통을 당장
바꿀수는 없지만 업을 통해 바꿀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사회에서 불교적 성격을 많이 볼수있는것은 "적선하십시요" 라는 말입니다.
그대로 풀이하면 "선을 쌓으십시요" 라는 말인데 우리는 "한푼 줍쇼" 라고 해석해버립니다.
이러한 이유는 이러한 말을 하는 자들이 통상 거지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하나의 고정관념이
되버린것이지요. 인도어로 bhikkhu(비쿠)를 비구 라는 단어로 한역합니다. 이 단어에서
비구니 라는 말도 나오는데 인도의 이말은 수행자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적선하십쇼 라는 말을 한푼줍쇼의 의미로 해석하듯이, 초기 불교인들은 욕심이란 수행자에
있어서 가장 큰 죄악이라 생각하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선을 쌓으라 했습니다.
그건 수행하는 자들의 모습이 거지와 같은 초라한 행색을 보며 인도인들은 비쿠라는 단어를
"걸식자" 라는 의미로 해석해버립니다. 따라서 동양에도 거지같은 초라한 행색을 한 수행자들이
하는"선을 쌓으십시요" 라는 말을 듣는 이들은 이들이 거지인줄 알고 그것이 한푼줍쇼 라는뜻
으로 해석되어온 하나의 헤프닝 입니다.
어떤분이 질문했던 것인데. 불교에서 귀신이나 악마를 퇴치하는 행위는 어떤것인가?
불교에서는 서양적 개인주의가 바탕이지만 동양적 성격인 선과 악에 대한 이분법적 구분을
하지는 않아요. 선은 선이되 악은 악이 아닌 불선. 즉 선과 선이 아닌것으로만 생각하죠.
나는 선인데 다른놈은 선이 아니다. 그렇기에 악이다. 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기본적으로 초기
불교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선하지 않은 존재가 선을 쌓는 과정을 방해하는 정도로
인식하곤 합니다. 그렇다보니 이러한 불교안에서 독특한 종파가 있는데 밀교 즉 현교라
불리는 종파가 입니다. 이종파는 대승불교 화엄사상과 여러사상을 이끄는데 일반인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밀교의 특성은 선과 악의 구분이 뚜렷하고 불법이나 불가의 힘으로 악을
퇴치하고 벌주는 듯한 성격이 있는것은 이러한 종파를 따른것이라고 보면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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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하고 잡담게시판을 보니 어떤분이 기독교의 교리와 기본적인
성격에 대해 잘 논하면서 타종교에 대한 언급을 다음과 같이 했는데 이러한 기독교의 해석으로
지금의 땅밟기 논란이 일어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럼 구원은 무엇이고 어떻게 받는것이냐를 설명하기위해 종교시스템과 기독교의 차이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일단 가장 대표적으로 이세상 모든 종교시스템은 크게 두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자신이 살면서 선행을 많이 쌓고 좋은일을 많이 하여 나중에 죽어서 심판자앞에서 저울을 달아 선행이 악행보다 많아서 선행쪽으로 저울이 기울어지면 극락이니 뭐니 하는 좋은곳 악행쪽으로 가면 평생고통 받는 안좋은곳 이런 시스템과 자신이 신이 되는 시스템입니다
(http://www.gasengi.com/bbs/board.php?bo_table=comu&wr_id=44724&page=2)
다들 잘아시는 선행을 쌓아 저울에 다는 시스템은 기독교의 짝퉁이 즐겨쓰는 시스템이고 성경의 마귀가 쓰는 시스템은 인간이 신이되는 뉴에이지시스템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창조도 전부터 존재한 시스템입니다 일단 마귀는 인간과 우주만물이 창조되기전에 하나님과 천사와 천상의존재만 하나님계시는 셋쨰하늘에 있을때 마귀는 원래 하나님의 왕자를 자신의 날개로 덮는 그룹이란 존재였습니다 스랍과 그룹은 천사가 아니라 천사와는 다른 더뛰어난 영적존재입니다 천사는 육체를 입을시에 날개가 없는 인간과 똑같은 형상이지만 스랍과 그룹은 인간얼굴의 모습도 부분 갖고 있지만 천사와는 달리 날개도 있고 인간의 형상이 아닙니다"
(http://www.gasengi.com/bbs/board.php?bo_table=comu&wr_id=44724&page=2)
뭐 위의 명제에 반박을 하자면 불교에서는 선을 안쌓으면 안좋은곳으로 가서 평생 고통 받는것이
아니라 위에 윤회에서 설명했듯이 6가지 세계에서 끝없이 반복되는것을 윤회라 하는데 너무
기독교적으로 선과 악, 천국과 지옥으로 묘사하신듯 하군요. 또한 인간이 신이되는 그런 시스템을
아마 불교의 성불에 빗대어 쓰신거 같으신데..물론 해탈을 하면 성불한다 하고 이 성불이라는
단어적 뜻이 기독교에 빗대어 이야기 하면 3위일체 즉 성부,성자,성신을 하나로 합친게 성불,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불교의 성불이라는 것에 엄청난 반박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독교적
시각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성불이란 해탈의 굴레를 벗어난 "스스로 존재하는 자" 즉 윤회라는
굴레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통스럽게 쳇바퀴처럼 구르는 영혼이 선을 쌓음으로
자연히 깨달음을 알게되고 굴레에서 벗어나 윤회의 굴레를 옆에서 지켜볼수있는 "자존자"가
됨을 말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기독교적 사고에서 말하는 유일신이나 절대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육도윤회를 한바퀴 도는것을 1년의 한계절이라고 칩시다. 그럼 4계절이라는것을 모르는
북극이나 남극에서만 살던 무지한 사람이 4계절이 존재하는 곳에서 1년이란 계절동안
비가오는날 더운날 추운날 각종 모든 날을 겪고 그 1년을 몇번 겪다가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아 이게 반복되는구나" 라는것을 알게되고 어느정도 더 익숙해지면 언제쯤 뭘 준비해야하지를
깨닫게 되는것처럼 춥기전에 따뜻한 것을 준비하게되어 추위라는 고통을 피하는것처럼
윤회라는것은 죽은자가 또 죽고 죽고를 반복하는 굴레인데 이런 고통속의
굴레속에서 선이라는 것을 쌓는 행위를 하게되면 어느 순간 윤회의 이치를 깨닫게 되어 그 윤회의
굴레라는 고통속에 벗어나는 곳으로 비켜 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열반이라고 표현하죠.
마치 쳇바퀴속에서 돌고있는 다람쥐가 그 굴에서 옆으로 빠지면 되는 이치를 깨닫는것과
비유할수 있겠네요. 이것은 신이 아닙니다. 감히 말하지만 불교는 무신론입니다.
더 적나라 하게 표현하자면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심리학에 가깝습니다. 인간의 심리적 행동
양식이나 도덕적 압력에 대한 행위를 해탈이라는 어떠한 보상을 걸어 종교처럼 표현됐지만
불교의 시초인 싯다르타는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많은 불경을 지은 자가 아닙니다.
그는 인간의 선한 행동에 대한 필요성을 설법했을뿐이고 그를 추종했던 제자들과 후대에 해석을
통해 싯다르타를 신처럼 추앙하고 해탈의 주체를 가족으로 묶는둥 변형된 모습을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불교란 극도로 개인의 책임과 선의 행동을 강조하는 하나의 심리학과 가깝습니다.
우리가 중국으로 통해 들어온 불교에 익숙해 있지만 중국의 표의문자로 된 불법때문에 종교스러운
성격을 많이 느끼지만 인도의 불경을 보면 다름을 알수있습니다. 인도의 불경엔 싯다르타의
말이 그대로 적혀있으며 그의 우회적인 표현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많이 다릅니다.
"마귀종교의 가장큰 특징이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 신처럼 된다는것입니다 마귀인 뱀또한
아담과 이브를 유혹할떄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된다고 하여 그들의 교만을 부추겼습니다 교만이 가장큰죄인이유도 이떄문이죠 인간이 신이되는것 이런 뉴에이지 종교는 인류의 시작부터 존재했습니다 인도에서 파생된 모든 종교들이 그러하죠 자신이 수행을 하고 명상을 하고
고행을 해서 자신의 행위로 열반에 들어가고 부처가되거나 무에 들어가거나 전부 다 자신의 행위가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http://www.gasengi.com/bbs/board.php?bo_table=comu&wr_id=44724&page=2)
위의 명제를 반박함과 동시에 인도 불교의 우회적이고 재미있는 경전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위에 보면 기독교에서는 뱀을 마귀로 표현했습니다. 또한 불경엔 뱀에 대한
이야기도 종종 등장합니다. 얼마전 봉은사 땅밟기 영상을 보면 사찰에 그려진 용의 문양 같은것을
빗대어 마귀의 상징 뱀을 우상숭배한다는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는 예수님이 등장하기 더 오래전에 모든 교리나 불교적 특징과 윤회적 시스템이
이미 완성이 되어 있었고, 기독교는 존재의 여부를 알수 없는 하느님이 직접 성경책을 땅으로
하사 하신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자, 하느님의 대리자,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으로
기독교적 교리와 시스템이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마치 불교적 특징을 하느님이
마귀의 형상이라고 알려주신것 마냥 해석하는것은 대놓고 종교적 다툼을 하자는것밖에 안됩니다.
모든 종교의 경전과 교리는 인간이 해석하고 풀이 한것이지, 절대자나 신이 글자 토시
하나 하나 마다의 뜻 하나 알려준 종교는 없습니다.
인도에서는 지금도 많은 분들이 상식적으로 알고있겠지만 뱀이 참 많습니다. 인도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가 피리를 불며 코브라가 바구니에서 춤을 추면서 나오는 그런 장면을 상상하시는 분이
많으실겁니다. 그만큼 붓다의 시대에도 뱀이란 인도인에게 있어서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친밀한 동물입니다. 또한 뱀은 각종 지저분한 동물의 시체나 병균을 옮기는(당시엔 페스트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경험적으로 알게되는것, 쥐가 많은 곳에는 전염병이 도는 현상들) 쥐를
잡아먹기에 인도인에게 있어서 뱀이란것은 하나의 커다란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기독교에서는 불교가 마귀의 상징인 뱀도 숭상한다.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인도불교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중에 "슷파니파타" 라는 경전이 있습니다. 이것은 붓다가 수행
하면서 돌아다닐적에 했던 우회적인 말들을 그대로 기억한 경전입니다. 물론 표음문자이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의미를 받아들여야 하는것이 기본이지만 표의문자식이 익숙한 중국인에게
단어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면서 암호처럼 숨겨진 더 깊은 진리가 숨어있을꺼다 라는 식의
해석과 해석을 거치다보면 뭐든 종교가 변형됩니다.
그 경전에 나온 "뱀의 장"을 그대로 올려봅니다.
뱀의 독이 몸에 퍼지는것을 약으로 다스리듯
치미는 화를 삭이는 수행자는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모두 떠난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던지듯 연못에 핀 연꽃을 물속에 들어가 꺾듯이 애욕을 말끔히
끊어버린 사람은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모두 떠난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던지듯 생사 윤회의 근거가 되는 어떠한 찌꺼기도 없는 수행자는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모두 떠난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던지듯
이렇듯 인간의 영혼이 죽음으로 멸하지 않고 윤회라는 굴레속에서 고통스럽게 또다른 삶을
반복하고 또다시 죽고 또 죽고 이런 현상을 느끼며 싯다르타는 진정하게 살고 있다는 것은
육신이 아니라 영혼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육신은 다만 영혼이 잠시 머무는 껍데기일 뿐이라고
생각헀고 이 육신이라는 껍데기에 욕심과 애욕을 벗어던지면 해탈을 할수있다고 합니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던지듯 생사 윤회의 근거가 되는 어떠한 찌꺼기도 없는 수행자는
이 언덕과 저 언덕을 모두 떠난다" 이런식의 표현으로 말이죠. 이렇듯 모든 독이 있는 뱀이라
할지라도 만물의 소중함을 알고 그 미천한 동물의 허물을 벗는 행동속에서 욕심은 허황된것
이라는것을 빗대어 말한것 뿐인데, 저것이 어찌 뱀을 숭상하는 것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쓴 글이 길지만 제 논리의 명제는 아주 간단합니다.
1. 모든 종교(종교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치부하는 유교)는 선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선을 추구
하는 이유는 인간의 도덕적 자율성에서 욕망이라는 것에 취약하기에 스스로 압력을 가하는것
입니다. 이러한 선이 하나의 행동이고 그 행동에 대한 결과나 보답이 천국이나 지옥이라는 결과
라면 그것을 보장하는것은 신이라는 존재입니다. 결국 선을 행함을 배제하고 맹목적인 신에
대한 믿음이란것은 사과나무를 심지 않고 사과를 먹기만을 바라고는 것 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2. 모든 종교를 설파한 특출난 성인들(붓다, 그리스도 등등)은 자신들의 깨달음과 가르침을
스르로 기록에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을 행하며, 욕망과 욕심을 버리기 위해
고행을 감수하고 설법을 전파한것 뿐입니다. 그들을 따르는 자들이 성인의 말을 기록하고
자신의 주관대로 해석함으로써 변형된 교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엔 선을 행하라는
커다란 out line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것을 보지않고,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퍼트리려 하다가
해석자의 주관적 사관이 개입됨으로서 왜곡이 반복되는것 뿐입니다. 부디 모든 종교의 커다란
목적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3. 그렇다면 부처가 신이 아니고 부처를 믿고 신앙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면 왜 부처상을 만들고
그것에 대한 절을 하는가? 이것은 우상 숭배가 아닌가? 라는 의구심을 가질것 입니다.
계속 언급되지만 불교에서는 유일신이란 존재하지 않고 누구나 붓다가 될수있습니다. 더 심하게
언급하면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 가르침의 방향대로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므로
무신론입니다. 부처의 상이 우상이라는 전제는 어떠한 유일신이 존재하는데 왜 다른 존재 즉
부처의 상을 만들어놓느냐 이 질문 밖에 안됩니다. 위에 글쓰신 분의 글중에 링크된 곳을 가보니
각종 멸망의 증거라든지, 우상숭배의 증거라든지 하면서 유로화에 동물을 타고있는 자의 그림
말을 타고있는 여인의 그림이라든지 뭐든것을 우상이라고 하는데, 반대로 십자가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의 형상이나 그런것은 우상이 아닙니까? 어떠한 것을 우상이라고 할때 제가 말한것
처럼 유일신이 존재한다는 전제하에 그 유일신을 배제한 모든것이 우상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자, 즉 기름부음은 받은자 예수님의 형상이 하느님입니까?
아니면 유다 라든지, 아브라함이라든지, 이삭이라든지 많은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에 대한
그림같은것은 우상이 아닙니까? 이러한 자들의 그림은 하나의 기록이라고요? 숭배의 대상은
아니라고요? 그렇죠?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제 논리가 안먹히고 그래도 우상이라고 우긴다면 우리가
좋아하는 연예인 브로마이드를 방에 커다랗게 건다거나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자가 자신의 몸에
박혀있던 총알이나 파편을 책상위에 장식처럼 놓는다거나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품을 간직한다거나
뭐든 의미가 부여된 사진이나 물건은 우상이 되겠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나 붓다같은 성인을 많은 이들이 따르고 존경했습니다.
많은 이들은 이들을 기억하고 싶어했고 이들의 가르침대로 살다가 자신의 의지가 약해졌다고
느낄때마다 자신의 의지를 다잡고자 그들의 형상을 기록하여 지금말로 따지면 자신의 룰모델로
삼고 의지를 다잡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엔 카메라가 존재하여 그들의 모습을 기록할수
있는것도 아니고 그림을 그려도 그 그림이란것이 후대까지 몇십년 몇백년을 갈것도 아니고,
그거 아십니까? 아니러니하게도 엄청난 과학문명이 발달한 지금도 사람이란 존재가 공룡처럼
멸망한다면 사람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증명할수 있는 기록이란게 지금의 기술로 만든
그림이라던지, 사진이라던지, 아니면 컴퓨터 하드디스크라든지 CD라든지, 이 모든 기록매체들은
천년안에 망가지고 형태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가장 원시적으로 돌에 새겨진 글자가 오래갑니다.
그렇기에 고대사람들은 자신의 룰모델은 돌로 조각해서 남기곤 하죠. 이러한 습성이 지금도
종교에서 남아있는것입니다. 불교의 스님들은 부처에게 절을 하는것이 아닙니다.
부처상에서 108번 절을 하는것은 불교의 108번뇌 즉 자신의 육신에 채찍을 하며 108가지 번뇌를
되새기는것입니다. 자신의 룰모델을 보면서..결코 부처상이 숭배의 대상이 아니란거죠.
만약 이러한 모든 종교적 커다란 그림을 보지못하고 기독교적 교리로 다른 종교를 바라보면서
믿음=천국, 불신=지옥 이라는 잣대와 명제가 진리라 한다면..
저 역시 법정스님 말씀대로 "믿지 않는다하여 자신의 자식이라 하는 인간들을 지옥불에 던져
버리는 당신네들의 신을 난 당최 이해할수가 없다. 차라리 난 지옥에 가서 당신네 신에게
버림 받은 그 억울한 영혼들을 구제하겠다."
이런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더 이상 타종교를 무시하거나 타종교를 자신들의 교리 잣대로 평가하며 분란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합니다. 또한 죽음과 지옥이라는 공포로 사람들을 믿음 이라는 구석으로 몰아세우지
않았으면 합니다. 차라리 그 공포로 반강제적일지 모르지만 선을 베풀게 하는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 다른 제가 쓴 자료
http://www.gasengi.com/bbs/board.php?bo_table=comu&wr_id=42039&sca=&sfl=wr_name%2C1&stx=%B0%B4%B4%D4&sop=and (독실한 기독교신자님과 대화)
http://www.gasengi.com/bbs/board.php?bo_table=comu&wr_id=42581&sca=&sfl=mb_id%2C0&stx=aias9&sop=and (댓글에서 성경책 구절중 한부분 해석한것)
뭐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 기독교 좋아하는 사람 아닙니다만 기독교가 믿음 소망 사랑 이셋은 항상필요할진데 이중 제일은 사랑이라 라는 말때문에 기독교 자체의 교리에 대해서는 나쁘다고 평가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물론 유일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존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교리중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면.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 다음과 같이 쓰여있습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말에서 단순하게 중요한 요점을 요약하자면 어떠한 밀알과 같은 흩어진 단편적 지식을 알고 즉 부분적인 지식을 알고 전체적으로 앎이 확대되어 갈때, 이런 자연적인 지식의 확장 만으로도 이 종교는 훌륭한 종교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지식이 확대되고 깊어지는 현상을 "사랑" 이라고 표현한것이죠. 즉 사랑이란 부분적인 앎에서 전체적인 앎으로의 확대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을 부분적으로 알때 보다는 온전하게 전체적으로 알때 비로소 가능해 지지 않겠습니까? 너무 이거 아니면 저거 라는 식의 흑백논리에 치우친 토론은 접을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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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종교적 분쟁거리로 게시판이 혼란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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