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 옹정, 건륭제를 비롯하여 역대 청나라 황제들은 두 가지의 딜레마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피지배층인 한족들과 자신을 비롯한 지배층을 이루고 있는 만주족이란 두 개의 다른 집단을 놓고 어떻게 대우해야 할 것인가?
아무래도 수억에 달하는 한족들을 고려해야 하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그들의 입맛에 맞추게 되면 옛날 금나라처럼 만주족이 정체성을 잃고 한족에 완전히 동화될 우려가 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족들을 노골적으로 멸시하고 만주족을 지나치게 우대하게 되면, 원나라처럼 한족들의 반청 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나 자칫 중원에서 쫓겨날 우려도 있었다.
물론, 한족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지배층의 핵심인 만주족을 내팽개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심 끝에 청나라 황제들은 두 가지 방법을 쓰기로 했다. 우선 표면적으로는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보호자이자 한족으로 대표되는 중국 문화를 애호하는 것처럼 행세한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족 지식인들을 상대로 "만주족과 한족은 평등한 대우를 받는다.", "우리 청나라에서 민족 차별이란 없다.", "천하의 만민은 다 황제의 자식들이다."라고 립서비스를 해서 안심시킨다.
그러나 황제들은 만주족 장군이나 대신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한족에 대한 자신들의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았다.
"한인(한족)들에게는 사람을 속이는 교활한 성격이 있다. 한인들은 늘 덕이나 효를 입에 달고 살지만, 명성을 얻게 되거나 자신의 이익과 관계되면 부모조차 돌아보지 않는다."
- 강희제가 연타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인들을 비굴하고 혹은 위선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에서 어렵지 않게 민족적 편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옹정제의 유지에서도 한인들의 쉽게 흥분하는 성향을 암시하는 흔적이 발견된다.
"곡물 가격이 조금 오른 것을 무슨 재앙의 축소판처럼 여기지 말라. 그것은 저 부주의하고 비천한 한인들이 머리를 흔들며 온갖 세세한 일에 신경쓰는 것과 같은 짓이다. 너희 관리들은 모두 보다 의연해야 하고, 사소한 일은 떨쳐 버려야 한다. 그러나 작은 일 하나에 놀라서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 하는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
이 말은 17~18세기 모든 청나라 황제들이 어느 정도 공유했던 한인에 대한 불신과 경멸에 관련되어 있다. 많은 만주족들은 일반적으로 한인을 불신했다.
"글을 배운 한인 관리는 우리 만주족이 오래 유지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한인들에게 속지 말라. 지하에 계신 아버지와 조상님의 덕을 기린다. 한인들이 아무리 나를 조롱해도 그들은 나를 모욕할 수 없다."
- 1707년 강희제가 남긴 유지
"나는 너의 업적과 근면함을 믿는다. 지방에서 폭력을 쓰지 말라. 한인들에게 조롱당하지 말라. 그들이 우리를 존경하면 할수록 그들은 조심스러워질 것이다."
- 1723년 옹정제가 형주 주둔 장군 우나하에게 보낸 글
이처럼 청나라 황제들은 동족인 만주족을 상대로는 평소 한인들에게는 꾹꾹 숨겨놓았던 민족 감정을 유감없이 털어놓았다. 다르게 본다면 만주족들을 추켜세우는 한편, 한인을 깎아내려 그들을 다독이고 아울러 자신들이 한인보다 황제로부터 더 우대를 받고 있다는 우월감을 느끼게 하려는 고도의 방편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