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臣)은 다시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육병장(陸兵將)
곽재우(郭再祐),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에게 상의하여 수륙(水陸)으로 합동 공격할 것을 계획하고, 길을 잘 아는
거제(巨濟) 출신 사수(射手) 15명을 뽑아 길잡이를 삼고 신이 거느린 각 선박에 육전(陸戰)을 할 만한 자로서 자원한 31명을 선발해서
곽재우의 지휘를 받도록 하는 일을 단단히 약속하였습니다. 4일 묘시(卯時)에 여러 배로 적진에 돌진해 들어가면서 명화 비전(明火飛箭)을 쏘기도 하고 혹은 현·승자총통(玄勝字銃筒)을 쏘면서 도전하고, 정예선(鄭銳船)을
영등(永登)의 적 소굴에 나누어 보내 서로 들락날락하면서 이쪽저쪽을 공격할 기세를 보여 서로 지원하는 길을 끊도록 하였으나 그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아 섬멸할 길이 없어 분함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육병장 등은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에게 가서 직접 형세를 고하고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고서 7일에 돌아갔고, 신 및 주사(舟師)는 그대로
외질포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5일 휴병(休兵)할 때에 신이 거느린 을 장수를 정하여
정심포관(廷深浦串)으로 보내 적병의 동태를 급히 보고하도록 하였는데, 6일 묘시(卯時)에 사후장(伺候將)
원사웅(元士雄)과
조준표(曹俊彪) 등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사후선 4척이 편대를 지어
거제의
오비질포(吾非叱浦)에 도착하여 적선 2척을 만났는데 기를 잡고 돌진해 들어가니 왜적의 반은 이미 육지에 내렸고 배를 지키던 적병도 우리 배가 돌진해 감을 보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수문장(守門將)
김희진(金希進) 등과 있는 힘을 다해 집중사격을 가하자 맞아서 다친 왜병이 상당히 많았는데 배에서 내린 적병 30여 명이 총을 쏘면서 지원을 해와서 수급(首級)을 베어오지는 못하였으며, 적선 2척과 기타 실려있던 잡물(雜物)은 모두 불지르고, 막풍석(莫風席)·물통·낫·도끼·노(櫓) 등은 싣고 왔다.’ 하였습니다. 다시 타다 남은 적선을 가지고와서 증거품으로 하라고 하였더니, 7일에 돌아와 고하기를 ‘
오비질포에 도착하니 왜적 5∼6명이 길을 잃고 바닷가에서 방황하고 있으므로 뭍에 내려 활을 쏘면서 추격하자 적의 무리가 산골짜기로 흩어져 도망을 쳤는데, 그중에 한 명이 다급하게 되자 칼을 풀고 항복하기에 사로잡아 데리고 왔다.’고 하였는데 타다 남은 2척의 적선도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신의 중위장(中衛將)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은 6일에 행군하여 왜적이 숨어 있는 해변에 복병하고 있으면서 출몰하는 것을 엿보아 재빠르게 배를 움직여 돌진해서 1명을 생포해 왔고, 선봉장 웅천 현감(熊川縣監)
이운룡(李雲龍)은 적진에 달려들어가 왜인이 쓴 작은 판(版)을 탈취해 왔는데, 판본(版本)은 통제사
이순신이 있는 곳으로 보냈고,
한산(閑山)으로 돌아가 진을 치고 정신을 가다듬어 사변에 대비하도록 지휘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