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손에 손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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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sabul358/18321829 팔로대총
신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경계(境界)는 선춘령(先春嶺) 이남으로부터 모두 우리의 옛 땅인데, 나라에서 너희들이 돌아갈 곳이 없음을 가엾이 여겨 우리 백성(百姓)과 같이 보고 그 땅에 살게 하였는데도 너희가 스스로 마음을 고치지 아니하고 스스로 불안하게 만드니, 어찌 능히 우리 토지(土地)에서 의거하겠느냐?
국역조선왕조실록 > 세조 7년 신사(1461,천순 5) > 9월5일 (임인)
高麗盛時。尹忠肅以文臣。闢地三千里。勒石先春嶺。近日金公又刱設六鎭
수산집(修山集 ) >
고려전성기에 윤충숙(윤관장군)이 문신으로써 3천리의 땅을 넓혔으며 선춘령에 비석을 세워 정했다. 근래에는 김공(김종서장군)이 육진을 거기에 설치했다.
흑룡강이 백두산에서 나오는 비변사인방지도
압록강과 마주보는 우리 국토의 한계를 흑룡강으로 표기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즉 조선후기에도 조선의 국토경계를 지금 흑룡강과 그근처에 있는 선춘령일대로 본것이다. 조선후기에도 김종서장군의 6진과 윤관장군의 동북9성을 지금 한반도가 아닌 흑룡강근처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팔로대총에는 조선의 동서를 1230리라고 적고 있고 서울에서 강릉까지 6백리라고 했다.
조선말기의 지리지와 고지도에는 공통적으로 조선땅을 동서로 최대로 넓은 곳을 측정해도 900리라고 했다. 즉 조선후기와 말기에
영토가 다른것이다. 명나라기록에 조선건국시 조선영토는 동서2천리 남북 4천리이고 송나라기록에 고려영토는 동서2300리 남북
3000리이다. 수나라기록에 고구려는 동서6천리 남북 4천리이다. 즉 동서의 길이가 변천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http://blog.daum.net/sabul358/13645892 동국여지지도 1710년
역시 조선후기의 고지도를 보면 왜 조선후기에 동서를 1230리라고 했는지 알수 있다. 바로 연산과 파절의 위치이다.
연산 파절(連山把截)은 고황제(高皇帝)가 정한 바이므로 양국의 봉강(封疆)은 서로 어지럽힐 수 없습니다
국역조선왕조실록 > 예종 1년 기축(1469,성화 5) > 6월29일 (신사)
고황제즉 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이 조선과 명의 경계를 연산파절로 했다는 것이다. 압록강이 아니었다.
우리 고황제(高皇帝)는 만리(萬里)를 밝게 보시어 요동의 동쪽 1백 80리의 연산 파절(連山把截)로 경계를 삼으셨으니, 동팔참(東八站)의 땅이 넓고 비옥하여 목축과 수렵에 편리함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국역조선왕조실록 > 성종 12년 신축(1481,성화 17) > 10월17일 (무오
구체적으로 요동즉 요양의 동쪽 180리가 조선과 명의 경계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후기에 요양과 심양에 조선땅이 옆에 있고
조선군부는 심양을 점령하는데 10일만 주어지면 해내겠다고 왕에게 보고했던 것이다.태조 이성계는 고려말에 군대를 이끌고 원나라의
요양과 심양을 점령했다. 그런데 고려말의 혼란을 틈타 원나라요양평장사가 요양땅을 명나라에 바쳤다. 이후 고려 우왕이 수복을 다시
명했고 태조는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을 건국한다. 이당시 태조와 주원장간의 영토 조약이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요동반도의 요양시는 청나라때 즉 조선후기에 정해진 요양이다. 명나라의 요양은 지금 베이징에 있었다.
위지도는 중국도서관에서 향고도라는 내가 존경하는 재야역사학자분이 찾아낸 명나라고지도 연산도이다.
연연산과 압록의 위치를 유심히 보라
http://blog.daum.net/sabul358/18321831 1864년 제작 청나라고지도
명나라고지도와 청나라고지도의 연연산의 위치를 유심히 보라 연연산동북으로 흐르는 강이 바로 조선초의 압록이었다.바로 베이징동쪽의 칠도하와 백하를 말하는 것이었다.
팔로대총
조선도에는 분명히 오호도와 제주도 대마도 울릉을 모두 조선땅으로 표기했다.
소태(蘇泰) 지금의 태안군이다. 서쪽에 있는 도서로 상산도(上山島)와 북파도(北波島)가 있으며 그 밖으로 전횡도(田橫島)가 있다.
기언 제35권 원집 외편 > 동사(東事)
ㆍ오호도(嗚呼島) 땅이 대단히 비옥하다. 닥나무와 화살감 대[竹]가 생산된다. 옛 성의 남은 터[遺趾]가 있는데 전설엔 전횡도(田橫島)라고 한다
만기요람(萬機要覽) > 군정편 4 > 해방(海防) >서해 남부[西海之南
오호도는 다른말로 전횡도라고 하며 한나라 유방에게 의해 xx이 강요된 전횡이라는 제나라왕의 동생의 수하 5백명이 xx한 곳이다. 충절의 상징이라고도 한다.
조
선후기의 기록을 봐도 조선수군의 활동범위는 굉장히 넓었다. 산둥성 즉묵현의 전횡도가 바로 조선땅이라는 정확한 기록이 존재한다.
백제와 신라 고려 조선전기의 수군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조선후기에도 조선수군은 전횡도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짱개들이
제주도 남쪽의 이어도를 자기땅이라고 우기고 있다!!!!!!!!!
오히려 우리가 전횡도를 내놓으라고 주장해야 한다. 조선후기에도 제주도와 대마도를 조선의 두 발로 비유한 기록이 있다. 대마도역시 조선후기까지 우리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그래서 지도마다 다 대마도와 전횡도를 꼭 표기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는,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은 요수(遼水)로 막혀 있고 북쪽은 옛 거란(契丹)의 땅과 접하였고 동쪽은 금(金)나라와 맞닿았다. 또한
일본(日本), 유구(琉球), 탐라(耽羅), 흑수(黑水), 모인(毛人) 등의 나라와 땅의 경계가 서로 맞물려 있다
고려수군의 활동범위를 짐작케 하는 기록이다. 유구즉 지금 오키나와일대에도 고려수군의 기지가 있었으니 땅의 경계가 서로 맞물려 있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유구국(琉球國)의 왕이 사신을 보내 신하임을 자칭하고, 전문(箋文)을 바치면서 왜국에 포로가 되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섬라국(暹羅國)의 왕도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진상하였다
국조보감1397년 태조
유구즉 오키나와의 왕이 조선에 신하를 자청했다.
문치(文治)는 이미 흡족하고 무위(武威)도 먼 곳까지 미쳐서 동쪽에 있는 왜구가 예물을 받들고 찾아왔고 유구(琉球)나 남만(南蠻)도 중역(重譯)을 거쳐 조공하였습니다
국조보감 1392년 태조
성교(聲敎)가 멀리까지 이르러 산융(山戎 여진족을 말함)과 유구(琉球)까지도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궐하(闕下)에 부복(俯伏)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오직 남보다 뒤질세라 두려워하였거든, 하물며 서로 바라보이는 섬 오랑캐임에랴
이보흠(李甫欽)의 기(記) 신증동
태조이성계의 조선개국후 조선수군의 활동범위가 고작 한반도가 아니라 오키나와일대도 모두 포함함을 알수 있다. 심지어 지금 중국남부즉 남만까지 조공할 정도였다.
고
려말에 고려 수군장수가 일본을 점령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가 말하길 지금 고려의 수군은 옛날 원나라가 일본을 칠때보다 더
낫다라고 했다. 청나라가 건국되자 청은 조선을 가리켜 수군은 강한데 육군이 약하다고 평가했다. 우리는 옛부터 수군이 더 강했던
것이다. 그러니 명나라수군을 농락하던 일본수군을 괴멸시킨 것이지
이
어도가 짱개땅이라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이다. 국력이 쇠약해진 조선후기에도 엄연히 산둥반도동부와 전횡도를 점거하고 대마도의
상국으로 군림했다. 고려와 조선전기에는 그 힘이 대만과 오키나와를 누르고 남았다. 백제와 신라때는 더 넓어서 광둥성에도 아직
백제마을과 계림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