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 민족의 정치경제공동체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민족이 기마 민족이었다는 것때문에
기마 민족과 유목 민족을 헷갈려 하고,
기마 민족은 유목 민족 아니냐 하며 헛소리 역사관으로 억지를 부리는 이들을
1999 년 인터넷 대중화 이후에 근 15 년여 동안 각종 역사 관련 커뮤니티에서 숱하게 봐왔습니다
기마 민족은 말그대로 말을 잘 다루고 그러한 기술을 가지고 전수하는 전통을 가진 민족(정치, 경제, 문화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유목 민족은 말그대로 목축을 하며 초지를 찾아 이리저리 이동하며 사는 것을 업을 삼고, 그것을 경제 기반으로 한 민족을 가리킵니다
유목 민족과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진 민족으로는 농경 민족, 어업 민족, 수렵 민족 등이 있습니다
유목 민족이 말과 친숙하여 기마 민족에 해당하는 경우가 강합니다만
농경 민족도 기마 문화를 가지고 있으면 기마 민족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바로 농경 민족이면서 기마 민족인 예에 해당합니다
반면에 숙신, 읍루 등은 수렵 민족에 해당합니다
고조선을 위시하여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의 배타적 문화를 공유하는
우리가
예, 맥, 한이라 부르는
만주, 요동, 요서, 한반도, 규슈에
근 5000여년 간 계속적으로 거주해 온
동일 문화, 동일 언어 집단인 한민족은
농경 민족입니다
그리고 그 민족 공동체의 주도권을 기마 민족인 북방(조선, 부여, 고구려) 종족이 주도를 한 것이구요
다시 한 번 강조하면
부여는 농경 국가입니다
우리의 외형적, 골상적, 혈통적 특질의 뿌리는 부여이고
규슈에 건너가 야요이 문화를 개창한 이들도 이들 부여인입니다
여기서 부여라 함은
우리 민족 고유의 형질적, 문화적 원형의 처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부여의 뿌리는 바로
조선(고조선)입니다
부여인은 농업을 영위해 오곡을 생산하였다. 목축도 성행해 말·소·돼지·개 등이 주요한 가축이었다. 특히, 부여의 대평원에서 생산되는 말은 유명하였다.
농경민이면서도 기마 풍습이 일반화되어 있었고 훌륭한 말을 산출했으므로 부여족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전투력을 지닐 수 있었다. 부여족의 일파가 남으로 이주해 고구려나 백제 건국의 중심세력이 되었던 것도 이러한 면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인들은 흰색을 숭상해 흰옷을 즐겨 입었다. 상복도 남녀 모두 흰옷이었다. 장례는 5월장이었다. 여름에는 얼음을 써서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혼인을 할 때에는 남자집에서 여자집에 혼납금(婚納金)으로 소와 말을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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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부여 [夫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