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도란 사람이 병자호란을 마치 청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것처럼 글을 올리길래
다 아시겠지만 조선이 이긴 전투를 찾아서 올립니다. 청나라와 싸워써 수천명을 죽이고
크게 이긴 전투는 2개 정도지만 패한 전투도 쌍령전투외에는 크게 분전했었고 청군도 쉽게 이기진 못했죠
워낙 기습을 당해서 전열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당한 전쟁이라 조선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인조가 도망이라도 치고 저런 전투를 몇번 더 치루었다면 청태종의 목숨도 보장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 전투에서
청태종의 매부인 양굴리(揚古利)가
전사했다. 양굴리는 전투 경험이 많은 명장으로,
험천 전투에서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충청도 근왕병을 격파하기도 했다. 당연히 양굴리의 전사는 청군에 큰 충격을 줬다.
병자호란 자체가
삼전도의
굴욕으로만 알려지다 보니 대중들에겐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전투다.
2. 전라도 근왕병과 양굴리의 움직임 ¶
1636년 12월 20일,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전라감사
이시방과 전라병사 김준룡은 급히 전라도 각 고을에서 병력 6,000명을 모왔다. 이때 화엄사의 승려인 벽암(碧巖) 각성(覺性)이 이끌던 승병
2,000명도 합류하여 총 8,000명의 전라도 근왕병이 남한산성을 향하여 북진하기 시작했다.
1637년 1월 2일, 양지에 도착하자 이시방은 김준룡을 선봉장으로 삼아 병력 2,000명을 주고 먼저 남한산성에
진군하게 했다.
한편, 청군의 양굴리 장군은 1월 2일
험천 전투에서
충청도 근왕병을 격파했다. 전투가 끝난 후 양굴리는 김준룡의 2,000 선봉대의 소식을 들고 곧장 병력 2,000명을 광교산 동쪽에 배치하여
남한산성과 김준룡 부대의 연락을 차단하고, 자신은 직접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김준룡을 격파하기 위해
광교산으로 향한다.
1월 4일, 광교산에 도착한 김준룡은 병력을 배치하고 군수품을 진영 중앙에 비축하여 태세를 갖추며 남한산성과
연락을 시도한다.
1월 5일, 마침내 청군이 광교산 부근에 도착한다. 청군은 수차례에 걸쳐서 공격을 시도하나, 조선군은 청군에
공격에 대비하여 미리 진영 주변에 목책을 세우고 진형을 잘 정비해놨다. 청군이 공격해 들어오면 총포로 집중사격하여 타격을 입히고, 청군이
퇴각하면 궁병과 창병이 청군의 배후를 가격하여 타격을 입혔다. 수차례 청군의 공격을 막아낸 조선군은 총포를 쏘고 불을 지피는 등 자신들이 왔다는
걸 남한산성에 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1월 6일, 양굴리는 다시 총공세를 펼친다. 조선군은 대오를 지키며 맞서 싸웠으나 숫적 열세에 마침내 청군이
조선군 진영의 후방을 돌파하여 난입하기 시작한다. 이에 김준룡은 "이는 바로 충신(忠臣)이 나라에 보답할
때이다!"라고 외치며 표하군(지휘관 직속 병력)수백을 이끌고 진영에 난입한 청군을 향해 돌격한다. 마침내 전투는 혼전에
돌입하고, 혼전 도중 조선군 저격수가 양굴리를 사살한다. 지휘관을 잃은 청군은
순식간에 흐트러지며 진열이 붕괴했고, 이에 조선군이 총 반격에 나서 청군은 패주한다.
이 전투로 청군은 지휘관을 잃고 수천의 병력을 상실, 동쪽으로 패주한다.
병자호란의 또 다른 승전인
김화 전투에서도 조선군이 승리하고도 탄약
등 군수품이 부족해 진격이 늦춰졌다. 전국 각지의 조선군에게 이런 식의 물품 부족 현상이 일어난 이유는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 당하여 항복할 위기에 처하자 조선군들이 제대로 준비도 못한 채 인조를 구출하기 위해 급히
출발했기 때문이다. 만약 인조가
선조처럼 도망이라도 잘 쳤으면 조선군도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겠고, 지휘권도
통일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병자호란은 오히려
청태종이
역관광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앙굴라는 청태조의 사위로서 충청군을 먼저 격파하고 이 전투에서 전사하자 청태조와 동일 묘역에 묻힌
건국의 일등공신으로 만주 실록에도 나타난 대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