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는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료입니다. 또한 국가에서 편찬한 정사로 삼국유사와 같이 고대사의 양대산맥이라 불리는 책이죠. (뭐 어디에서는 부정하겠지만?) 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있는 한사군 관련 기록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시간순서대로 정리해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삼국사기 완역본이 있더군요. 혹시 빠뜨리거나 번역이 잘못되거나 잘못쓴것이 있다면 댓글 바라겠습니다. 저 개인의 의견은 밑에 굵게 표시하니 오해없으시길..
네이버 지식백과 삼국사기 완역본 - http://terms.naver.com/list.nhn?cid=49615&categoryId=49615
BC 28년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 1 시조 혁거세 거서간 30년)
樂浪人 將兵來侵 見邊人夜戶不? 露積被野 相謂曰
낙랑(樂浪) 사람들이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려다가, 그곳 사람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고 지내며, 들에는 노적가리가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서로 말하였다.
- 낙랑 병사들이 신라에 침입해 온 것으로 보아 낙랑과 신라는 서로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BC 18년 이전 (삼국사기 제 23권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백제건국설화)
北史及隋書 皆云 東明之後有 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
『북사(北史)』및 『수서(隋書)』 모두에는 ‘동명(東明)의 후손 구태(仇台)가 있는데 어질고 신의가 있다.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그의 딸을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쪽 나라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어느 쪽이 옳은지 모르겠다.]
- 이 기록의 따르면 백제는 동명왕의 후손인 구태가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고 나옵니다. 대방의 옛 땅이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요동태수의 딸을 아내로 맞은 것으로 보아 대방의 옛 땅이 요동과 가까이 있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한가지 더 알 수 있는점은 대방의 옛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현재의 대방과 옛 대방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개인적으로 대방의 옛 땅이 요동에 있었고 낙랑이 신라에 가까이 있었음을 보아 현재의 대방 역시 신라에 가까이 있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아직까지 그런 유추를 하기에는 부족해보이네요
BC 15년 (삼국사기 제 23권 백제본기 제 1 시조 온조왕 4년)
秋八月 遣使樂浪修好
가을 8월, 사신을 낙랑(樂浪)에 보내어 우의를 다졌다.
- 이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낙랑에 사신을 보내 서로 교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낙랑이 중국의 군현이였던 한사군 낙랑이라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 기록에서는 BC 15년에 백제와 낙랑이 교류했다 나오는데 당시 중국 사서에는 백제에 대해 기록되어진 것이 없습니다. 중국 사서에 제대로 적혀진 최초의 백제 기록은 372년 근초고왕때(진서)로 삼국사기에서 낙랑과 교류했다는 BC 15년보다 무려 382년 뒤입니다. 거의 400년 뒤이죠. 만약 백제와 중국이 서로 교류하는 사이였다면은 어떻게 교류한지 약 400년 만에서야 백제가 기록되었을까요? 이상합니다.
BC 14년 (삼국사기 제 13권 고구려본기 제 1 유리왕 33년)
秋八月 王命烏伊 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縣屬玄?郡]
가을 8월, 임금은 오이(鳥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계속 진군하여 한나라의 고구려현[현은 현도군(玄?郡)에 속한다.]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 이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유리왕이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을 정벌하게 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계속 서쪽으로 진군해서 현도군에 속하는 고구려현은 빼았다고 나오죠. 즉 이 말은 현도군이 고구려의 서쪽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또한 대방의 옛땅이 요동에 있었다는 위의 기록과도 얼추 비슷하죠. 이런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한사군은 고구려의 서쪽에 있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BC 11~ BC1년 (삼국사기 제 23권 백제본기 제 1 시조 온조왕편)
온조왕 8년 가을 7월,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지난날 서로 사신을 보내고 우호를 맺어 한 집안처럼 지냈는데 이제 우리 땅 가까이에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니, 혹 우리 국토를 야금야금 차지하려는 계책이 아닌가? 만일 지금까지의 우호를 생각하여 성을 헐고 목책을 부순다면 의심할 바가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번 싸워 승부를 내겠다.”
임금이 답하여 말하였다.
“요새를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일이다. 어찌 이 일로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당연히 태수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약 태수가 강함을 믿고 군대를 일으킨다면 우리도 대비책이 있다.” 이로 인하여 낙랑과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11년(기원전 8) 여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甁山)의 목책을 습격하여 부순 뒤 백여 명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 독산(禿山)과 구천(狗川)에 두 개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의 통로를 막았다.
온조왕 13년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국경을 침범하므로 편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 요상
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불안하여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중략)"
7년(기원전 2) 봄, 낙랑이 침범해서 위례성에 불을 질렀다.
11월, 임금은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는데, 폭설을 만나 돌아왔다.
한자생략
- 이 기록에 따르면 낙랑과 백제가 서로 막상막하로 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즉 이 말은 백제와 낙랑이 서로 국경을 맞대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죠.) 하지만 저는 여기서 의문이 드네요. 당시 백제는 건국되어진지 약 10년이 채 안되었습니다. 어떻게 10년이 채 안된 국가가 중국의 군현과 막상막하로 싸울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또한 위에도 말했다시피 중국사서에 적힌 백제 최초의 기록은 이 때보다 무려 약 400년뒤인 372년 근초고왕때로 당시 중국사서에서는 백제와 싸웠다는 기록은 물론 아예 백제와 관련된 기록이 없습니다. 즉 여기에 나오는 낙랑은 한나라의 군현인 낙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바로 위의 고구려 유리왕 기록으로 한사군이 고구려의 서쪽이 있었다고 유추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신라와 백제와 가까이 있는 이 낙랑의 존재는 무엇일까요?
AD 4년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 1 남해차차웅 원년)
가을 7월, 낙랑(樂浪)의 병사가 와서 금성(金城)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임금이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元年 秋七月 樂浪兵至圍金城數重 王謂左右曰
AD 14년 (삼국사기 제 1권 신라본기 제 1 남해차차웅 11년)
낙랑이 나라의 내부에 빈틈이 있다고 여기고, 금성을 공격하여 쳐들어오니 상황이 위급하였다.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자 적병이 두려워하며 퇴각하다가 알천(閼川)가에 주둔하면서, 돌무더기 20개를 쌓아놓고 물러갔다.
樂浪謂內虛 來攻金城 甚急 夜有流星 墜於賊營 衆懼而退 屯於閼川之上 造石堆二十而去
- 이 기록에 따르면 신라가 백제만큼은 아니지만 낙랑과 나름 막상막하로 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부분은 더욱 이해가 안되는 것이 왜 중국의 군현이 한반도의 약소국에 불과한 신라를 쳐들어 갔을까요? 또한 백제와 마찬가지로 당시 중국사서에는 신라와 싸웠다는 기록뿐만 아니라 신라에 관한 기록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기껏해봐야 진한의 소국중에 사로국이 있었다 정도이지요.
AD 32년 (삼국사기 제 14권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15년)
여름 4월,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서 유람하고 있었다. 그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그곳을 다니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그대가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리오?”
낙랑왕 최리는 마침내 그를 데리고 돌아가서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 후, 호동이 본국에 돌아와서 남몰래 아내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였다.
“네가 너의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수어 버릴 수 있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너를 맞이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하다면 너를 맞이하지 않겠다.”
이전부터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적병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것을 부수어 버리게 한 것이었다. 이에 최씨의 딸은 예리한 칼을 들고 남모르게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의 입을 베어 버린 뒤에 호동에게 알려 주었다. 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지 않아 대비를 하지 않았고, 우리 병사들이 소리 없이 성 밑까지 이르게 된 뒤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침내 자기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낙랑을 없애기 위하여 청혼하고, 그의 딸을 데려다가 며느리를 삼은 후에 그녀를 본국에 돌려보내 그 병기를 부수게 하였다는 설도 있다.]
AD 37 (삼국사기 제 14권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20년)
20년(서기 37), 임금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二十年 王襲樂浪 滅之
- 이 이야기는 다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32년에 낙랑왕 최리가 항복했는데 낙랑의 멸망은 37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5년이라는 공백기간동안 낙랑 부흥운동? 비슷한 것이 일어났다 생각해봅니다. 여기에 나오는 낙랑이 한사군의 낙랑인지 아니면 신라와 백제와 가까이 있는 그 낙랑인지 잘 모르겠으나 최리를 낙랑왕(王)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한사군의 낙랑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고작 중국 군현 지도자의 명칭을 굳이 왕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죠. 또한 중국사서에서 대무신왕이 낙랑군을 공격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AD 36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1 유리이사금 13~14년)
가을 8월,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점령하였다.
十三年 秋八月 樂浪犯北邊 攻陷朶山城
14년(서기 37), 무휼(無恤,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나라 백성 5천 명이 투항해왔다. 그들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 낙랑왕이 고구려에 항복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36년에 신라의 타산성을 점령한 것으로 보아 부흥운동에 꽤 크게 일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37년에 낙랑은 완전히 멸망해버리죠
AD 44 ( 삼국사기 제 14권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27년)
27년(서기 44)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병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屬漢
- 살수는 청천강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한반도에 있었던 낙랑의 위치가 청천강 남쪽 즉 평양 일대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낙랑은 중국의 한사군의 낙랑일까요? 위에도 말했다시피 중국의 한사군은 고구려의 서쪽에 있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중국사서에 대무신왕이 낙랑군을 공격했다는 기록 또한 없고요. 그렇다면 한나라의 광무제는 왜 고구려의 영토인 낙랑에 침입하였을까요? 당시 중국사서 (후한서 책부원구)를 보면 한국(韓國)인들이 낙랑군에 속하게 해달라고 요청한 기록이 있습니다. (년도 또한 똑같음..) 아마 당시 중국사서에 적인 한국인들이 낙랑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고구려에 점령당하자 신라의 북쪽 성인 타산성을 점령할 정도로 부흥운동이 강력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낙랑사람들이 중국에 도움을 요청한 것도 이상할 것은 없을 것 같네요.
이후로 한사군(낙랑,대방,현도,임둔)의 기록들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구려는 111년에 백제는 246년에 신라는 300년에 나옵니다.
AD 111~ 146 (삼국사기 제 15권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59년(서기 111),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玄菟)에 속하기를 요구하였다.[『통감(通鑑)』에는 “이 해 3월, 고구려왕 궁(宮)이 예맥(穢貊)과 함께 현도를 쳤다.”고 하였는데, 혹 속하기를 원했는지 또는 침범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느 하나는 잘못 기록된 듯하다.]
五十九年 遣使如漢 貢獻方物 求屬玄菟[通鑑言 是年三月 麗王宮與穢貊 寇玄菟 不知或求屬或寇耶 抑一誤耶]
여름 6월, 임금은 예맥과 함께 한나라 현도를 습격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夏六月 王與穢貊襲漢玄菟 攻華麗城
69년(서기 121) 봄, 한나라 유주(幽州) 자사 풍환(馮煥), 현도 태수 요광(姚光), 요동 태수 채풍(蔡風)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침략해서 예맥의 우두머리를 쳐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六十九年 春 漢幽州刺史馮煥玄菟大守姚光遼東太守蔡風等 將兵來侵 擊殺穢貊渠帥 盡獲兵馬財物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하였다.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 다음에 나오는 위의 기록들은 고구려와 한나라의 대결구도가 기록되어져있네요. 여기에 나오는 현도나 낙랑과 같은 한사군 지명들은 한나라의 한사군이죠. 59년의 기록에서 한나라, 여름 6월의 기록에는 아예 한나라 현도라고 이름을 박아놓았고 그 후의 기록들도 전부 한나라가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죠. 그럼 이 한나라의 한사군이 어디 있었냐는 건데 마지막 기록 (가을 8월)의 기록을 보면 아시겠지만 한나라 요동의 서쪽을 습격하여 대방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 했다는 것은 요동의 서쪽에 대방군과 낙랑군이 있었다는 뜻이겠죠.. 고구려의 서쪽입니다. 한사군은 고구려의 서쪽 즉 요동의 서쪽에 있었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