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길림성 집안시에 위치한 고구려 초기 국내성 평면도(첫 지도상에
고구려 수도로 표시된 위치임. 현재 남북한 영토와 만주를 아우르는
중심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죠. 이곳에서 고구려가 평양성으로 천도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1 시조혁거세거서간)
"(고)조선의 유민이 신라를 건국하였다"
(고구려 본기 제 5 동천왕 21년)
"평양이라는 곳은 본시 선인 왕검의 택지였다.
누군가는 왕의 도읍을 왕검이라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주몽의 나이 22세였으며, 한 나라 효원제 건소 2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이곳에 살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그곳이 말갈부락과 인접하여 있었으므로, 그들이 침범할까 염려하여 물리쳐 버리니, 말갈이 두려워 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은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왕은 사냥을 하며 그곳을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나라 임금 송양이 나와 왕을 보고 말했다. "과인이 바닷가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와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겠다." 주몽은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송양이 말했다. "우리 집안은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고, 또한 땅이 비좁아 두 임금을 세울 수 없는데,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떤가?" 왕이 그의 말에 분노하여 그와 논쟁을 벌이다가 다시 활 쏘기로 재주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가을 7월, 성곽과 궁실을 건축하였다.
6년 가을 8월, 이상한 새가 대궐에 날아 들었다.
겨울 10월, 왕이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방에 있는 해인국을 치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었다.
10년 가을 9월, 난새가 왕대에 모였다.
겨울 11월, 왕이 부위염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격멸하고, 그 지역을 성읍으로 만들었다.>
잡게에서 반도라는 용어에 대해서 설왕설래를 넘어 갈피를 못잡는 건지
억지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수 더 떠서는 무슨 분열된 우리
고조선 영토를(열국시대를) 다시 통합한 고구려를 보고
러샤나 잽과 같은 침략국 어쩌고 황당한 소리까지 나오는 걸 보면 (평소 이
분 말하는 투야 이미 국적을 알고 있는 상황이지만 ㅋ)
기본 두가지로 압축해서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1. 퍼니슐러라는 말과 잽이 만들어낸 반쪽 섬이라는 반도라는
용어가 매치부터 실제 적절한가?
2.그리고 우리가 애초에 퍼니슐러라는 라틴어에서 나온 로마자 어쩌고 단
어에 집착할 필요가 있는가?입니다. 왜냐? 우리의 역사 지리적 성격은 이런
지중해 유럽의 실제 퍼니슐러적 지형의 나라와 액면 그대로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인지 혹은 그렇게 덥썩 볼 필요가 있는 것인가?
임.
잽은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성향을 그대로 모방해서
조선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런 과정에서 점차 중일,러일전쟁을 통해 극동
에 대한 주도권을 잡아가면서 미,영등과의 외교관계를 다시금 수립하고 나
아가 결국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식민지 지
배론 정당성을 위한 소스를 제공하기 위해 캐소리를 만들어 내기 시작하는
데 그 중 한 인물이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임.
이 작자에 의해 조선사개설에서 더욱 노골적 <반도적 성격론>이라는 희한
한 역사관을 만들어냅니다.한마디로 지리적 지형적 한계성을 통해 조선 역
사는 대대로 타율적,종속적 식민지배적 어쩌고캐소리를
더욱 늘어 놓게 되죠.
우리나라 역사에서 그리고 현재 디지털화된 방대한 조선왕조실록 어디에도
우리나라의 지형적 혹은 역사적 관점에서 반도라는 용어는 찾을 길이 없음.
이 말은 잽강점기를 통해서 전형적 극동에 쳐받혀 살던
섬나라 잽식 인식하에 만들어져서는 오늘날에 이르렀음(유게에서는 대륙,
섬 시리즈의 또다른 유행어처럼 이야기되는 실정이야 다들 아실 것이고.)
반도라는 의미도 실제 매치되는 게 아닙니다.
반도(半島)의 반은 절반, 조각 이런 의미로 사실 희한한 말임.섬이면 섬이
지 무슨 반쪽은 뭐이며)
라틴어에서 온 퍼니슐러처럼 거의(Almost라는 긍정적 형용사를 강조하는
부사적 의미) 온전한 섬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잽강점기 시절 섬나라
시각에서 절반의 섬도 아니다 이런 괴상한 용어임.
당연히 합당한 말이 아니죠. 그러니 어디서는 아대륙(대륙에 가까우나 완
전한 대륙적 성향은 아닌; Subcontinent)등의 단어도 나오는 상황이고 여러
모로 고민해볼 필요가 있음.
둘째
지중해 문명을 꽃피운 그리스는 소규모 도시국가들로 우리로 치면 성
읍국가 규모들이 저런 돌출된 지형을 따라 난립했고 이후 로마 역시도 전형
적 돌출된 퍼니슐러 지형에서 이후 점차 제국화 되었음.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이미 신석기 시대 만주와 남북한이 거의 단일 생활권
으로 고조선 선대 문명지인 신석기 발해 요하 문명이나 그리고 고조선 문명
과 밀접한 하가점 하층 문화도 요서일대를 중심축으로 나타납니다.(그리고
이런 최초의 정치체인 고조선 문명권은 이미 만주를 기점으로
남북한을 아우러고 있었음) 그외 부여도 만주 동북지역 송화강 일대이고
천년 사직 고구려도 초기 1대 주몽의 졸본성이고 2대 유리왕이 재차 옮긴 국
내성 역시도 만주 길림성 집안시 일대임. 5세기 장수태왕이 평양일대에 장
안성(혹은 평양성 427년에 옮김)을
짓기 전까지 무려 400여년 동안 중심지로 활동했던 곳이고 그외 황해도 일
대의 한성등 고구려는 기본 3경채재의 대도시를 운용하면서
기타 중대형 도시들을 거느린 성곽의 나라답게 수많은 성들을
거느리고 생활했음.
지금은 남북한 지역에서 북칸이 가난하고 못살아서 뭐 허접해 보이지만
고대시기 특히나 남북국시대 신라의 경주 서라벌이 본격적 남국의 도성 체
재로 번성하기 전까지
(뭐 이때도 대발해는 엄청난 영토에 고구려 5부의 영향을 받아 5경체재의
대도시와 중소도시를 거느린 위용을 보였음. 그리고 이런 고구려 발해의 곤
고한 도시문명은 금,요에 막대한 영향력을 실제 주었고)
도리어 만주와 북한지역이 훨씬 이른 시기에 더 발전된 문명을 구사하
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런 부여계 즉 고구려계등의 교류와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이
전 고조선 준왕의 남부 지역으로의 문명은 한단계 촉진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런 가운데 서울 송파구 일대의 풍납토성이나 가야 신라쪽에서
문명적 발전을 촉진시켰죠. (오늘날 고고학에서 가야(김해) 경상도 일대도
부여계 유구로 확인되고 있음. 뭐 제주도에도 이미 고조선 유물들이
확인되는 상황이니.)
즉 일제 시대 미시나 쇼에이의 <조선사개설>에서 캐소리한 반도적 성격론
즉 지리적 혹은 특정 돌출된 공간 안으로 한정된 성격에 따라 우리 민족과
역사를 수동적 피지배적 타율적 종속론 어쩌고 캐풀뜯어 먹던 식민 역사관
은 한마디로 멍멍이 캐소리에 전혀 우리 역사의 실상도 아닐 뿐더러 유럽에
서 나오는 페니슐러같은 용어도 울 나라 역사 지리적 관점에서 액면 그대로
마냥 따와서도 안되는 상황임을
자각하면서 지금부터라도 여러 모로 고민해 봐야 할 시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