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헤이안 시대 만들어진 사공육민 원칙.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오공, 육공, 심하면 칠공도 생김. 에도시대에는 다이묘 맘이지만 대체로 사공, 오공으로 정해짐.
전국시대에는 군역, 요역이 많았으나 에도 평화시대가 되면서 군역이 사라지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임금노동자로 대체.
다만 에도시대 농촌은 촌장 중심의 집단농장 비슷하게 운영되면서 다이묘가 부과하는 요역이 사라지는 대신 마을 단위의 요역이 부과됨.
에도시대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면서 상인 부르조아지를 위한 상업, 환금작물이 발달.
조선은 과전제상 1/10 원칙. 거기에 더하여 군역/요역, 방납이 존재.
후기들어 영정법, 군포제, 대동법모두 전세에 귀속시키는데 그양이 1할을 못넘김.(1결당 30두 정도) 법제상으로보면 훨씬 잘살아야 하는데 운영상 안됨.
세금 납부상 각종 소모비를 받는데 세금액의 몇배를 받음.
백성 구제를 위한 환곡제도를 운영하는데 환곡수입이 정부재정수입의 4할이 넘어감.
화폐경제없이 쌀로만 납세하다보니 풍년, 흉년 편차가 심해져서 흉년중심으로 재정계획이 짜여짐.
요역부담이 상당하여 민란의 주요원인이 됨.
대충 비교해 봤는데 조선 전기, 중기는 일본농민보다 훨씬 잘 산게 맞습니다. 하지만 18세기 되면 상황은 180도 바뀌게 되죠.
주요한 원인을 따지면 조선은 일란 이후에도 양반 중심의 사회가 유지되지만 일본은 18세기가 되면 사무라이가 몰락하고 상인중심의 사회가 됩니다. (메이지 유신때 보면은 다이묘급 사무라이들은 아무런 역할을 못합니다. 이미 계층변화가 이루어진거죠)
도고(都庫)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본래 공인(貢人)들이 공납품을 미리 사서 쌓아두던 창고로 뒤에는 위와 같은 뜻의 도고(都賈)와 혼동되어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도고 상인을 도아(都兒)·외목(外目)장수라고 불렀다.
도고는 18세기 이전부터 나타난 대외 무역의 증대, 금속 화폐의 유통, 상품 경제의 발달 등을 배경으로 발생하였다. 특히, 그 중에서도 서울과 지방의 농·수공업 생산력 증가와 그에 상응하는 활발한 상품 생산은 상업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왔고, 도고도 그와 함께 등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했더라도, 아직 생산력 수준이 본격적인 상품 생산단계에 이르지 못하였다. 또 상품 수송이 매우 불편했으므로 상품 유통과정에서 매점성과 독점성을 본질로 하는 도고는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시전(市廛) 상인·공인들은 국역을 부담하는 대가로 조정으로부터 상업상의 특권, 즉 특정물품의 독점권을 부여받은 상인으로서 상업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의 독점권도 일종의 합법적인 도고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18세기 이후 상품화폐경제가 더욱 발전하면서 비특권 상인인 사상(私商)들이 자본력과 상술을 밑천으로 도고를 하였다. 도고를 하던 사상에는 부상(富商)이 많았고, 계(契)를 조직한 상인들도 있었다.
잉글랜드 100, 조선 134, 중국(강소성, 절강성) 191.
중국전체의 평균 총요소생산성은 191 이하일 것이나 이 역시 잉글랜드보다 高.
◇ 1인당 GDP 비교(조선 vs. 중국)
1820년 1인당 GDP - 중국: 600달러, 조선: 600달러
┃중국의 1인당 GDP 추이
- 인구의 비약적 증가로 인해 1500년부터 320년간 600달러 수준.
- 1870년 530달러로 추락.
- 1920~30년대 550달러대에서 등락을 반복.
┃조선의 1인당 GDP 추이
- 1870년 604달러로 반등
- 1911년 777달러(아시아 2위)
- 1917년 1,021달러
- 1939년 1,459달러
조선의 생활수준은 16세기말부터 상승하여 18세기 영·정조시대(1724~1800)에 정점을 기록한 후 하락.
- 16~17세기에는 중국보다 낮을 수 있으나 18세기 중국을 추월.
- 19세기(1820년)에는 다시 중국과 비슷한 수준.
◇ 조선의 교육복지
┃세종치세(재위 1418~50) 이후 18세기까지 지방향교, 사학(四學), 성균관 등 모든 유생들에게 무상교육, 무상숙식, 학비지급, 학전(學田)지급, 면세 및 요역면제.
-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는 「논어」의 유교무류(有敎無類)의 원칙에 따른 것.
[실제로 가면 기대한 것만큼 실망하게 된다 도쿄는 큰마을 정도의 느낌이다 그리고 도시에 널려있는 빈약한 목조주택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왕의 거처도 궁전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성벽같은 모습에 매우 초라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심각한 모습은 바로 통치자의 행태이다 바로 민족의 낮은 수준을 그대로 방치하고 근절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문화의 발전은 가장 핵심 공중도덕에 있다 하지만 일본인에게
공중도적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옷을 벗고 다니고 아무데서나 소변과 대변행위를 한다 한 마디로 공중도덕 완벽히 결여되어 있는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인의 사고방식은 유럽인과 너무 차이가 난다 일본은 방문하는 사람들은 유럽과는 일거수 일투족이 전혀 다른 모습들을 늘상 목격하게 될것이다 어떤 도시든
마을이든 목욕탕이 있고 그곳에서는 어김없이 남녀가 한곳에서 목욕을 하는 모습을 발견할수 있다 그리고 특히 일본의 시골은 모두가 전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너무나 비참한 모습들이다]
우리가 세계 활자종주국답게 특히나 조선의 기록문화는 세계적으로도 혀를 내두를 정도에다 수많은 드라마나 혹은 식사관으로 조선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나 부정적 혹은 유교적 면만을 봐서 그렇지 이미 서구보다 앞선 근현대적 조선의 복식부기와 관련 분개장을 보면 이미 현대의 거의 모든 요소를 망라 근대적 선진 자본주의 방식이 운용되고 있었던 점을 우리 스스로 간과하는 경향이 많은 듯 하군요.
그리고 에도시대 도시상이나 외국인들의 기록에서 왜국은 특히나 시골로 갈수록 비참하다는 기록들은 우리는 이미 1600여년 전부터 고등교육기관인 태학부터 문무겸비의 세계 최초의 서민교육기관인 경당에 발달한 활자문화가 보태어지면서 이런 전통을 계승
더구나 조선시대로 가면 향촌 자치형태로 시골에도 향교나 풍속을 교화하고 배울 수 있는 터전들이 마련된 인프라 사회였지만
왜국에서 그나마 안정적 내치의 에도시대상을 봐도 조선을 통해 막 관료체재가 뿌리내리는 시기다 보니 정말 잘봐줘도 우리 중세 고려 귀족시대정도의 시대상이지 고려는 이후 중기에 가면 전국적 신분해방 운동을 거쳐 근세조선은 후기로 갈수록 더욱 서민 문학이나 대중화 어쩌고 이야기를 하지만 왜국은 극상류층 중심으로 돌아가는 후진적 정치 사회상으로 인해 도시고 시골로 갈수록 서민들의 의식 문화 교육 수준은 비참함을 넘어 미개 수준을 여전히 못벗어난 시대상이 여전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