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지요. 조선도 초반에는 전력의 반이 기병이라는 소리가 있었지만
전쟁이 없는 텀 동안 북방을 제외하곤 기병 수가 많이 줄어들었으니...
거란과의 전쟁 당시 강민첨의 1만 3천의 기병으로 기습/추격을 연계해가며 활약했고,
이후 아골타 부족의 여진과의 첫 전투에서 기병전력에서 밀리자 아예 정예기병을 육성시키기 위해 신기군을 만든 기록도 있죠.
이성계의 사병도 2천여에 달하는 수가 여진기병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글쎄요.
당시 [귀주대첩]이 포함된 1018년 12월에 발생한 거란의 고려침공 기록을 살펴보면.
기병의 운용과 규모는 가늠하기가 어렵더군요.
상장군 강감찬 과 부원수 강민첨이 20만대군을을 적절히 활용하여.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며.
강감찬 장군이 기병 1만 2천을 홍화진 근처 하천 주변에 매복시켜. 거란군이 하천을 건널무렵. 수공을 터트리고. 복병을 돌진시켰다는 기록은 일부 정해 지지만.
타격직후의 거란군이. 고려군의 예상 과는 달리 고려수도 개경을 목표로 진격을 강행.
청천강을 건너버린 거란군을 추격하기 위해.12월 하순. 부원수 강민첨의 부대가 이동한 기록과.마탄 부대가 조우한 거란군을 요격에 성공한 기록.
이에 불구하고 남진 속도를 늦추지 않은 거란군을 위해.
수도방어를 위해 1019년1월 김종현에게 1만의 '군사'(이 군사가 기병완편 인지. 기보병의 혼성군인지는? 자세히 모르겠군요)와 동북방면의 군세 3천을 개경으로 이동시킨것
이 유효하여. 개경 북방 40km지점에서 발이 멈춰버린 거란군을.
적절히 공략한 고려군으로 알고 있어.이렇게 신속한 용병이 가능한것은 1만이상의 기병이
최소 1만5천에서 2만기 가량이 동원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게다가
발이 묶인 거란군이 최종적으로 개경공략을 포기한 전술적 원인중 하나가.
회군하는척 하면서 은밀히. 투입한. 정예기병 300기가. 금교역 일대에서 고려군에 격멸 당하였기에. 보고있어. 수도 방어선에도 거란군 정예기병을 상대할 기병전력은 보유하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