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 우리가 무슨 중국의 식민지라도 되었던 것 마냥 설명하시는 분이 있어서 그러는데,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로 우리가 사대관계를 형성했다고 보시나요? 조공 책봉 관계는 그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고구려의 최전성기 였던 장수왕 때도 조공 책봉 관계를 유지했죠.
저는 고구려를 깍아내릴 의도가 전혀 없고, 고구려라는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조공 책봉 관계가 우리가 일제에게 식민지배를 당한 것처럼 굴욕적인 관계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장수왕만 해도 남북조 전부와 조공 책봉 관계를 맺었습니다. 아니 상식적으로 조공 책봉 관계를 2번이나 맺다니, 누가 봐도 외교전략의 일환 아닙니까? 그것도 당시 남북조는 서로 팽팽히 대치중이었던 형국이었는데 말이죠. 동북아의 강대국이었던 고구려가 남북조중 한편을 들면 그 반대쪽은 무너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중국쪽에서도 이런 중립적인 관계를 허락한 거죠. 고구려 입장에서도 중국은 통일되기 보다는 분열된 상태가 더 본국에 바람직하기에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그런 전략을 짠 거구요.
무엇보다 지금의 서구식 평등 외교 관계에 입각해서 당시를 바라보면 안됩니다. 당시는 지금과는 전혀다른 외교관계가 있었죠. 유교적 사고가 외교관계에도 영향을 미쳐 국가간에라도 분명한 상하관계가 존재했습니다. 당연히 상하관계라는 건 체면을 세워주는 형식적 관계에 불과했죠. 이런 생각을 받들어지는 쪽과 받드는 쪽 둘다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받드는 쪽이라 할지라도 조금만 받들어지는 쪽이 수틀리게 하면 그 관계를 파기하고 전쟁을 일으켰으니까요. 받들어지는 쪽도 이 관계가 형식적인 것이고 단지 우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외교관계로 여겼죠.
가장 대표적으로 북송과 요나라 관계가 그렇다고 볼 수 있겠네요. 전연의 맹약 이후 송나라가 요나라에게 받들어지기는 했지만 오히려 매년 세폐를 가져다 바쳤습니다(물론 북송에서는 '하사했다'고 말했지만 사실 쳐들어오지 말아달라고 갖다바친게 더 옳은 표현). 그거 가져다 주려고 나라 살림이 피폐해진 적도 있다고 하니, 조공 책봉 관계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타타르와 명도 그런 관계죠. 명이 '하사품'을 제대로 안주자 바로 공격해서 명의 수도인 베이징까지 포위하지 않았습니까. 애시당초 중국도 수, 당 때 초기에 돌궐과 조공 책봉 관계를 맺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좀 강해지자 바로 관계를 파기하고 돌궐을 몰아냈죠.
나당전쟁 이후 신라와 당의 관계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처럼 한반도도 직접지배를 하려던 당은 나당전쟁 패배 이후 지배를 포기했고 친선 관계를 맺자고 제안을 한 겁니다. 신라도 평화를 마다할 리가 없죠.
즉, 요컨대 조공 책봉 관계는 그 이전에도 있었고, 그것이 뭐 우리가 식민지배를 당한 것처럼 받아들일 게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으로 치면 대국과 소국 간의 '양자적 동맹 관계'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관계인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애시당초 우리가 지배당하기를 좋아하는 노예적 민족이기에 그 오랫동안 중국 국가들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라는 생각은 다름 아닌 일제가 심어둔 식민사관입니다. 우리가 역사상 사대주의라 하면 바로 떠올리는 조선도 어디까지나 외교 정책의 일환으로 조공 책봉 관계를 맺은 겁니다. 조선 초기에는 정도전의 '요동 정벌' 프로젝트가 계획된 적도 있었고, 그 정도전을 숙청한 태종 이방원조차도 북쪽의 몽골, 여진, 조선, 왜 까지 아우르는 이른바 '대명 동이족 연대'를 구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명이 그런 연대로는 상대하기가 너무 벅차져서 포기하고 조공 책봉의 노선으로 전환한 것 뿐입니다. 무슨 우리가 앞장서서 머리를 조아렸다는 식으로 말하는 게 바로 식민사관에서 시작된 겁니다. 일본이야말로 위협이 없음에도 제발로 찾아가 사대관계를 맺은 나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