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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10-17 00:54
[기타] 한국역사속 돼지
 글쓴이 : 두부국
조회 : 3,834  

신석기 시대 이후 인류는 다양한 동물을 가축화시켜 동물로부터 고기와 젖, 가죽, 털, 연료 등을 얻거나, 운송수단 또는 농사일에 이용하기도 했다. 젖이나 털 등을 얻거나, 운송수단이나 농사일에 사용하지 않으면서 오직 고기를 얻기 위해 키우는 가축이 돼지다. 이슬람교에서는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금기시하지만, 중국인들은 전 세계 돼지고기 소비량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돼지고기를 유난히 좋아한다. 중국인 못지않게 한국인들도 돼지고기를 많이 소비하는데, 2010년 1인당 돼지고기 소비량이 19.3㎏으로, 닭고기 10.7㎏, 소고기 8.8㎏를 능가한다(출처: 2010 농림수산식품부 통계 연보). 특히 삼겹살에 대한 선호는 세계적으로도 유별나다. 하지만 우리 역사 속에서 돼지고기가 늘 인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부여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돼지

십이지신상()의 돼지.
돼지는 땅을 지키는 열두 신장인 십이지신의 하나로, 신라시대에는 방위신으로 여겨져 탑이나 무덤 둘레에 새기기도 했다. 돼지는 11시 방향을 담당한다.

서기 1세기 중국 후한()의 사상가 왕충()이 쓴 [논형()]에는 부여의 건국신화가 기록되어 있다.

“옛날 북방에 탁리국()에서 왕의 시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왕이 아이를 죽이려고 돼지우리에 버렸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탁리국의 돼지가 살려준 아이가 곧 부여()를 건국한 동명()이다. 부여의 건국신화와 유사한 고구려의 건국신화에도 부여국의 돼지가 등장한다. 부여는 돼지와 깊은 인연을 가진 나라였다. 부여는 말, 소, 개, 돼지 등의 이름을 따서 마가(), 우가(), 구가(), 저가()의 관명()을만들었는데, 이 가운데 돼지 이름을 딴 저가()가 있었다.부여는 소, 양, 개, 말과 함께 돼지를 키웠고, 가축을 잘 기르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부여 관련 기록에 돼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부여 지역이 돼지를 키우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돼지는 본래 숲지대나 그늘진 강둑에 사는 동물이기 때문에, 나무열매, 과일, 식물뿌리 등을 먹으며 살 수가 있었다. 부여가 위치한 만주 지역은 지금도 중국에서 가장 많은 목재를 생산하는 드넓은 나무바다()가 펼쳐진 곳이다. 부여는 숲이 많았기에 돼지를 잘 키울 수 있었다.


644년에 편찬된 진(- 265~419)나라 역사를 기록한 [진서()]의 <숙신씨()> 기록에는 “이 나라에는 소와 양은 없고 돼지를 많이 길러서, 그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며 털은 짜서 포()를 만든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구당서()] <말갈()> 기록에 “그 나라에는 가축으로 돼지가 많아 부유한 집은 수백 마리가 되며, 그 고기는 먹고 가죽으로는 옷을 지어 입는다.”는 내용과 거의 같다. 3세기 부여 동쪽에 위치해 있던 숙신(- 한반도 북부에 거주한 퉁구스계 민족. 서기 280년 이후 고구려에게 굴복하며, 말갈족의 선조로 알려져있다.)에서도 돼지를 잘 키웠고, 6∼7세기 숙신 지역에서 성장한 말갈에서도 돼지를 잘 키운 셈이다. 8세기 이후 말갈을 다스린 발해()의 경우에도 돼지를 키웠는데, 막힐()부의 돼지가 특히 유명했다.


희생용 돼지를 키운 고구려


부여, 숙신, 말갈, 발해뿐만 아니라 고구려에서도 물론 돼지를 키웠다. 그런데 고구려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하는 돼지인 교시()와 관련된 기록이 많다.


[삼국사기]에는 “유리왕 19년(기원전 1) 8월에 교시가 달아나므로 왕이 탁리()와 사비()라는 자로 하여금 뒤를 쫓게 하였더니 장옥택() 중에 이르러서 돼지를 찾아 다리 근육을 끊었는데 이 사실을 왕이 듣고 ‘제천()할 희생을 어찌 상하게 한 것이냐.’ 하며 두 사람을 구덩이에 넣어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안악3호분의 육고() 그림.꼬챙이에 걸린 맨 오른쪽 동물이돼지다.
돼지는 고구려인이 즐겨먹는 고기였다.

이를 통해 고구려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희생물을 관리하는 관리들이 따로 있었으며, 희생용 돼지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2년 후에도 교시가 달아났는데, 이를 뒤쫓던 관리가 국내위나암()에 이르러 이 지역이 수도로 삼기 좋다고 임금께 아뢰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기 3년에 고구려의 수도를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게 된것이다.

고구려 10대 산상왕(, 재위: 197〜227)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근심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 208년 교시가 달아나자 관리들이 쫓아가다가 주통촌()이란 곳에서 후녀()라는 처녀의 도움으로 돼지를 붙잡게 되었다. 관리들이 후녀에 대해 임금께 이야기하였고, 마침내 임금이 후녀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에 아들의 이름을 ‘교체(- 성밖의 돼지)’라 하였는데, 그가 곧 동천왕(, 재위: 227〜248)이 된다.

수도를 새로 정해주고, 동천왕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였으니 고구려에서 돼지는 신성한 동물이라고 여길만했다. 고구려를 대표하는 고기음식인 맥적()은 멧돼지 또는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안악3호 고분의 벽화에는 부엌 옆에 고기를 꼬챙이에 걸어둔 육고() 그림이 있는데, 꼬챙이에 걸린 사슴과 돼지고기를 볼 수 있다. 645년 고구려가 당나라와 전쟁을 할 때, 안시성 안에서 닭과 돼지의 소리가 많이 들렸다는 기록도 있는 만큼, 고구려에서도 부여나 말갈에는 못 미친다 할지라도 상당한 숫자의 돼지를 사육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와 백제의 돼지

일본 정창원(- 나라현 도다이사에 위치한 왕실 유물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815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촌락문서 ()에는 지금의 청주() 주변 4개 촌락의 인구, 토지, 나무와 함께 가축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그런데 4개 촌락에 말 61마리, 소 53마리와 그 증감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돼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는 농민들과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소와 말에 비해 돼지 키우기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488년 신라 소지왕(, 재위: 479〜500)이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구경했다는 기록이 있고, [신당서()] <신라> 조에 ‘재상의 집에는 소, 말, 돼지가 많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것으로 미루어, 신라에서도 귀족들의 육식 욕구를 충당시켜줄 돼지를 키웠음에 분명하다.

백제의 경우는 [수서()] <백제> 조에 ‘백제에 소, 돼지, 닭이 있다’는 기록만이 존재할 뿐이어서, 돼지와 관련된 상황을 더 알 수가 없다.

불교의 발전에 따라 줄어든 돼지고기 소비

711년 신라의 33대 성덕왕(, 재위: 702〜737)은 도살()을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의 도살은 가축을 함부로 죽여 육식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여겨진다. 불교가 도입된 이후, 함부로 살생을 금지하는 법이 생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육식 소비가 줄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968년 고려 광종(, 재위: 949〜975)은 도살하는 것을 금지하고, 궁에서 쓰는 고기도 시장에서 사들인 것으로 볼 때, 불교의 영향으로 소나 돼지를 죽이는 것을 차츰 꺼리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다보니 고기를 다루는 것도 차츰 서투르게 되어, 육식 문화가 전반적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서긍()은 그의 책 [고려도경()]에서 당시 고려의 육식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고려는 정치가 심히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국왕이나 상신()이 아니면, 양과 돼지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다만 사신(使)이 이르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시기에 맞추어 사용하는데, 이를 잡을 때는 네 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에 배를 갈라 장위()를 다 끊고, 똥과 더러운 것을 씻어낸다. 비록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졸렬함이 이와 같다.”

이처럼 고기를 다루는 문화가 퇴보함에 따라, 가축 가운데 돼지의 인기가 떨어지게 된 것이다. 말은 군사적 필요에 의해, 소는 농사에 필요하기 때문에 많이 길러졌지만, 농사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곡물을 먹고 밭을 망가뜨리는 돼지는 육식을 삼가는 고려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가축이었다.

조선에서 인기 없던 돼지고기

불교의 영향으로 급격히 줄었던 육식 문화는 고려시대 후기 몽골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부활했다. 하지만 그 중심은 소고기였고, 돼지고기가 아니었다.

[태종실록] 17년(1417년) 윤 5월 80일조에는 “명나라 황제가 조선인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니, 조선 사신에게 쇠고기와 양고기를 공급하라고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에서는 돼지를 많이 기르지도 않았다. 1488년 조선을 방문했던 명나라 사신 동월()이 쓴 [조선부()]에는 “조선에서는 집에서 돼지를 기르지 않으며, 목축에는 염소를 볼 수 없다고 했다. 또 말을 부리는 사람은 있으나, 소를 부리는 사람은 적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돼지는 소, 양과 함께 3대 희생() 제물이었기에, 전국에서 길러졌다. 돼지고기는 종묘()와 사직() 등 여러 제사에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신 접대를 위해서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유일의 여성 실학자인 빙허각 이씨( , 1759〜1824)가 쓴 생활 경제 백과사전인 [규합총서()]에는 돼지고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야박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돼지고기는 본디 힘줄이 없으니 몹시 차고 풍병()을 일으키며 회충()의 해를 끼치니, 풍병()이 있는 사람과 어린아이는 많이 먹으면 안 된다. 쇠고기와 같이 먹으면 뱃속에 벌레가 생기고, 생강과 같이 음식을 만드는 것은 삼가할 것이며, 붕어, 양의 간 등과는 같이 먹지 말라.”

[규합총서]에는 돼지고기로 만든 요리로 찜과 굽기, 돼지가죽 요리 정도만 소개되어 있으며, 돼지 키우기는 아예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다. 돼지를 키우는 농가도 적었고, 돼지고기 소비도 많지 않았기에 요리도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돼지 키우기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비경제적이었기 때문이다. 돼지를 1kg 찌우는 데는 4.4kg 정도의 사료가 필요하다. 소는 1kg 찌우는데 7.5kg 정도의 사료가 필요하지만, 소는 고기보다는 농사에 필요한 일꾼이었기 때문에 돼지보다 키우는데 경제적이었다.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차라리 닭이 나았다. 닭은 1kg 찌우는데 1.7kg 정도의 사료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온돌의 영향으로 대량으로 땔감이 소비되면서 숲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에, 숲에서 먹을 것이 부족한 돼지는 결국 인간이 먹어야 할 곡물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식량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돼지를 키우는 것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때문에 돼지는 뒷간에서 분뇨를 먹으며 키워지기도 했다.

돼지와 질병

동물 사육에서 가장 큰 위협은 전염병의 발병이다. 말, 소, 돼지, 닭, 개 등의 전염병은 때로 인간에게 전염이 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전염병이 돌면 가축들이 대량으로 죽기 때문에 사육 농가에 큰 피해를 입힌다. 1541년 11월 2일자 [중종실록]에는 돼지 전염병이 돌아 신하가 임금께 아뢰는 내용이 적혀 있다.

“돼지가 병들어 죽는 일이 걱정됩니다. 중대한 제물로 쓸 희생물이 이처럼 많이 죽으니, 이는 막대한 재앙이라 매우 경악스럽습니다. 소의 전염병은 치료할 방법이라도 있지만, 돼지는 치료할 방법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돼지에 대한 치료법이 없다는 것은, 돼지가 소보다 덜 중요한 가축이었기에 그 전염병에 관해 특별히 연구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해 3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강원도, 함경도, 황해도, 경기도 등지에서 많은 돼지가 죽었음에도, 당시의 조치라고는 돼지를 격리하는 정도뿐이었다.

돼지 숭배와 돼지 혐오

[삼국사기]에는 655년에 굴불군(- 현재의 안동 일대)에서 흰 돼지를 나라에 바쳤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돼지는 상서로운 동물로 복()과 다산()을 상징하며 덩치에 걸맞게 풍족함을 상징하기도 했다. 또한 돼지꿈을 꾸면 좋다고 여겼고, 돼지는 고구려의 수도 이전은 물론, 고려 왕건()의 조상인 작제건(-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이 집터를 잡을 때에도 미래를 예견하는 동물로 받아들여졌다.

불국사 극락전의 복돼지상. 돼지는 제물과 의식의 풍족함을 상징하며, 복을 가져다주는 길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불국사 극락전 현판 뒤에도 복돼지상이 조각되어 있다.

하지만 홍석모(,1781~1857)가 쓴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매년 정월 젊은 관리들이 횃불을 땅에 끌면서 “돼지 그슬리자, 쥐를 그슬리자.”라고 외치며 돌아다니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돼지주둥이를 지져서 돼지가 아픈 주둥이로 곡식을 해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돼지와 쥐는 농사를 망치는 해로운 동물로 받아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울러 돼지고기는 독성이 있다고 여겨져 기피되기도 했고, 돼지가 게으르고 더럽고 미련하다는 이유로 돼지 자체를 혐오하기도 했다.

돼지에 대한 이와 같은 2가지 다른 관념은 돼지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인 동시에, 일반인에게는 먹고 싶어도 먹기 힘든 육류였기 때문에 해롭다고 멀리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다시 늘어난 돼지사육과 고기 소비

1922년 일본인이 조사된 전국의 가축 수는 소가 148만 두, 돼지가 97만 두로, 소에 비해 돼지의 소비와 사육 두수가 적었다. 하지만 2010년 말 현재 우리나라의 돼지 사육 두수는 988만 마리로, 한우와 젖소를 합친 335만 마리의 두 배가 훨씬 넘는다. 소는 임신기간이 270〜290일로 한 번에 1〜2마리를 낳는 것에 비해, 돼지는 임신기간이 114일에 불과하고, 한 번에 8〜12마리를 낳기 때문에, 훨씬 번식이 빠르다.

단순히 고기를 얻기 위해 기르는 가축으로는 소보다 돼지가 더 효과적이기 때문에, 돼지의 사육이 크게 늘어났으며, 돼지고기의 소비도 함께 크게 늘어난 것이다. 지금은 돼지를 대량으로 소비하고 사육하는 시대이지만, 우리가 돼지를 즐겨 먹게 된 것은 불과 수십 년 만에 이루어진 변화에 불과하다. 특히 우리 조상들이 돼지고기를 잘 먹지 않는다고 알려졌을 만큼 소비가 적었던 시대와 비교하면, 매우 급격한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2010년 농림수산식품부 통계연보];최래옥, [돼지문화 해석론 시고], [비교민속학] 12집, 1995;김인희, [한ㆍ중의 돼지숭배와 돼지혐오], 중앙민속학, 10집, 2004;김종대, [돼지를 둘러싼 민속 상징, 긍정과 부정의 모습], 중앙민속학 13집, 2008;김상보, [한국의 음식생활문화사], 광문각,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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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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