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國은 古代의 眞書를 焚棄한 때(李朝太宗의 焚書같 은)는 있었으나 僞書를 造作한 일은 없었다. 近日에 와서 天符經三一神誌등 이 처음 出現하였으나 누구의 辨駁이 없이 古書로 信認하는 이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我國書籍은 各氏의 族譜중 그 先祖의 事를 혹 僞造한 것이 있는 이외에 는 그리 眞僞의 辨別에 애쓸 것이 없거니와, 다음 接壤된 隣國인 支那, 日本兩國은 從古로 交際가 頻繁함을 따라서 우리 歷史에 參考될 書籍이 적지 않다. 그러나 僞書많기로는 支那같은 나라 가 없을 것이다. 僞書를 辨因치 못하면 認證치 않을 記錄을 我史에 認定하는 誤가 있다 .104)
104)『조선일보』, 1931년 6월 18일 . 조선사 8. 이 글이 『조선 일보』에 연재될 당시 신채호는 ‘무정부주의 동방 연맹 북경 회의 ’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당해 여순 감옥에 갇혀 있던때이다. 그러므로 신채호의 천부경 인식이 바뀐 것은 1931년이 아니라 그 전에 일어난 것이다 . 이 글이 조선일보에 실리게 된 것은 당시 『조선 일보 』사장이던 안재홍이 어렵게 사는 단재부인을 위해 반대를 무릅쓰고 연재했던 것이다 .
신채호는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위서를 조작한 적이 없었는데 『천부경』『삼일신고』에 대해서 고서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회분위기를 지적하면서 위서로 말하자면 오히려 중국과 일본 같은 나라도 없을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1925년 『동아일보』에서 『천부경』이 후인위조라고 했던 처음의 주장을 뒤집어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고대의 경전이라고 인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학계에서는 신채호 글의 전체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채
“我國은 古代의 眞書를 焚棄한때(李朝太宗의 焚書같은)는 있었으나 僞書를 造作한 일은 없었다. 近日에 와서 天符經三一神誌등이 처음 出現하였으나 누구의 辨駁이 없이 古書로 信認하는 이가 없게 된 것이다.”라는 부분만 발췌하여
신채호가 『천부경』을 위서로 비판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신채호는 우리가 비록 진서를 태운적은 있어도 위서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천부경』과 『삼일신고』역시 변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라고 했던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서로 몰고 있는 사회분위기를 개탄한 것이다.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석사학위논문 '일제강점기의 천부경 연구' 이숙화 논문 2008.2 中
조인성의 논문 말미의 결론은 상기 재야사서가 모두 1920년대 이후의 위작이라는 것입니다. 논문 말미에 천부경은 단재 신채호까지도 위서라고 하였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藏書樓 속에 앉아도 서적의 眞僞와 그 내용의 가치를 판정할 안목이 없으면 후인 위조의 천부경 등도 단군왕검의 聖言이 되는 것이다." 이 인용문은 단재 신채호의 『朝鮮史硏究草』(동아일보 1925)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단재까지도 천부경을 “후인이 조작한 위서“라고 단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재가 1925년 『동아일보』에 실은 이 글은 이름 그대로 그의 논문 초고를 모은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완성된 원고가 아니었습니다. 완성된 글은 6년 뒤인 1931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였습니다. 천부경에 대한 단재의 최종적인 판단은 이 글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음의 글이 바로 천부경에 대한 단재의 평가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대의 진귀한 서적들을 불태워 버린(焚棄) 일 (가령 조선태종의 분서 같은)은 있었으나 僞書를 조작한 일은 없었다. 근일에 와서 『천부경』 『삼일신고』 등이 처음 출현하였으나 누구의 辨駁도 없이 古書로 믿고 인정(信認)할 이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나라 서적은 각 성씨의 족보 가운데 그 조상의 일들을 간혹 위조한 일이 있으나 그밖에는 그리 진위의 변별에 애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웃 나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자고로 우리나라와 교류가 빈번하였기 때문에 우리 역사에 참고할 서적이 많은데 위서가 많기로는 중국 같은 나라가 없다 할 정도이다. 그러므로 중국애서는 위서인가 아닌가를 분별하여 확인(辨認)하지 않으면 절대 인용(引證)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이것을 검증도 없이 우리나라 역사(我史)에 갖다 붙이는 착오가 있다." 단재의 이 글이 매우 애매하기는 하지만 그는 분명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최근에야 나왔으나 위서는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만일 위의 문장에서 단재가 천부경을 위서라 했다면 <근일에 와서 『천부경』 『삼일신고』 등이 처음 출현하였으나 누구의 辨駁도 없으니 그만 古書로 믿고 인정(信認)하게 되었다.> 고 써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천부경의 진위를 따지지 않고 고서로 믿지 않았다. 즉 고서로 믿어야 할 터인데 믿지 않았다>고 썼던 것입니다. 만일 위의 전체 문장에서 <근일에 와서 운운한 부분>을 빼고 읽는다면 우리나라에는 본시 위서가 없었다. 귀중한 진서를 태워 없앤 일은 있었으나 중국과 일본과 같이 위조한 일이 없었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단재는 우리나라에 위서가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단재는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위서라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민족종교인 대종교가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것은 예사로 볼 일이 아니다. 환단고기가 특정인이 지어낸 僞書로 밝혀진다면 이 책에 실린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대종교는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천부경이 환단고기에만 실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편에 천부경을 찾아낸 최초의 인물이 신라의 최치원(857~?)이라고 기록돼 있는데 그는 [문창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후손인 <최국술>은 최치원 사후 1000년 이상이 지난 1925년 집안에 전해오던 글을 모아 <최문창후전집>을 펴냈다. 이 ‘최문창후전집’에도 천부경이 실려 있다. 바로 여기에서 천부경의 진위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들어있다. [천부경]은 81개의 한자로 구성돼 있는데 <최문창후전집>에 실린 천부경은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74자는 같고 7자가 다르다. 그러나 7자는 의미가 달라질 정도로 다른 한자가 아니라 거의 유사하게 해석되는 한자다. 이는 무얼 의미하는지 내가 구태여 이야기 하지 않아도 더 잘 알 것이다. 이 때문에 천부경이 환단고기 쪽으로 전해지는 과정과 최치원 집안에서 전해지는 과정에서 7자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되며 천부경의 진가를 간접적으로 증명된다. ※ 성균관대학교 소장의 <최문창후전집>의 [고운선생사적孤雲先生事跡]에는 천부경 81자의 원문이 기록되어있다. 다만 이 기록에는 환단고기 태백일사와 묘향산 석벽본의 천부경 81자와는 약간 다른 글자가 보인다. 析을 碩, 衍을 演, 動을 同, 昻을 仰, 地를 中으로 하는 등의 것이다. 허나 이 두 가지 출처의 내용에 대한 상이(相異)를 자세히 보면 音은 같지만 表記가 틀린 것이 대부분일 뿐이다. 이는 朝鮮 말의 기정진(奇正鎭·1798~1879)도 그때까지 구전되는 것을 전해 듣고 천부경을 기록했다고 하였다. 이 천부경은 <기정진> 선생의 제자의 제자인 <김형택>이 ‘단군철학석의(1957)’란 책에 남겨놓았는데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오직 1자가 다르며 역시 해석에도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우린 눈여겨 볼 까닭이 있다. 이 세 가지 천부경 가운데 가장 [정본]으로 여겨지는 것이 환단고기의 천부경이다. 아울러 <대종교>도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같은 글자의 천부경을 경전으로 인정한다. 세 책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것이 [환단고기]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최문창후전집>에 나오는 천부경과 <단군철학석의>에 나오는 천부경은 환단고기를 참고해 만들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한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천부경도 위서가 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안타깝게도 1911년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 4권의 책을 묶어 펴낸 환단고기는 지금 전하는 것이 없다.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편찬했다는 것은 간접적으로만 확인될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바로 아래 글이 저들의 주장에 대한 좋은 반증이 될 따름이다. 1920년 중국 도교 전문가인 전병훈(全秉薰·1857~1927)은 <정신철학통편>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는 이 책 서문에 [천부경 전문]을 싣고 해석을 달아놓았다. 지금도 전하고 있으므로 천부경을 실은 채 인쇄된 가장 오래된 책이다. <계연수>는 1911년 환단고기 필사본 30부를 만들었다고 하므로 <전병훈>이 이를 보고 출간을 앞둔 ‘정신철학통편’에 실었을 가능성이 매우 많다. 간접적으로 <계연수>본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동시에 천부경의 진위 논란을 한꺼번에 잠재우는 부분이다신채호 선생 능욕하는 식민빠 버러지 만세 초록불 버러지 만세
학자의 주장이나 논문을 인용하려면 탈고도 끝나지 않은 자료가 아닌
모든 정리가 끝난 완성본을 가지고 논해야 하는데 탈고도 끝나지 않는
초기 자료를 가지고 신채호 선생 이름을 더럽히는 악질 버러지 식민빠 초록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