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우리나라 수 많은 문화재가 많은 전란으로 인해 불탄게 너무 아쉽습니다.
진짜 불타지만 않았다면 일본애들 문화재랑은 비교도 안됬을텐데..
요즘 일본놈들 마치 자기네가 동양의 대표격으로 미화질하는거보면 역겨워죽겠습니다.
기모노도 백제한테 얻어간 주제에..
예전부터 굿잡스님 글들과 댓글들 하나하나 일독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신라가 우리나라 정통성을 잇는나라로서 수도는 대단한 모습을 보여주는건 사실입니다.
다만 그 바탕엔 고구려,백제유민의 피와 땀이 모여있습니다.
기존 신라인구보다 더 많았을걸로 추측되는 현충청,전라 지역의 구백제지역의 곡물생산력이 경주의 부흥바탕이었죠.
한마디로 수도권지역만 잘나가는 형상이죠.
원효대사같은 분들이 백제유민들과 어울려 유랑걸식을 했다는 역사기록, 신라유민이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론 구백제지역 백성들의 해적들에 대한 침탈에 전혀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죠.
장보고가 나오며 거기에 대응을 했을 뿐입니다. 그후로 그의 계승자들이 여러곳에 출현해 신라의 해상무역을 이끄는 형상이지만 신라자체는 강력한 골품제를 바탕으로한 수도권지역의 경제집중을 보여주죠.
물론 고려도 뭐 비슷하겠죠. 귀족층만 잘나가는...서민들의 삶은 무척곤궁한...
우리가 비웃는 조선이 그래도 백성을 존중하는 시늉이라도 하고 노예도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 주려는 국가라 생각합니다.
무를 가볍게 여기고 농업에만 치중해 국가의 힘이 약해져 망했지만 민중들의 삶은 조선시대가 가장 좋았다고 봅니다. 물론 이것도 국가체제가 문란해지고 자연재해가 오며 망해갔지만서도요. 결국 우리나란 무역으로 먹고 살아야만 하는 국가네요.(뭔..신세한탄인지..ㅋㅋㅋ)
조선처럼 농업몰빵하다가는 자연재해오면 끝이고 고려처럼 무역만 앞세우다간 특권층의 경제력집중만 불러오고.
신라 경제력 물어보신글에 웬 우리나라 한탄글을 쓰고 있네요..ㅋㅋㅋ
워낙 우리나라 물산생산력이 부족해 결국은 무역으로 먹고살아야한다는 결론이네요.ㅋㅋㅋ
근데 일반론 펴는것도 일일이 사료한줄 근거제시해야만 되나....내가 말한게 그당시 일반적인 형태라는걸 부정한게 아닌데 내가 신라 비하한글을 썼나?
글들의 형태가 신라는 이러이러한 나라라고해서 모든 신라민들이 그렇게 살아간건 아니다라고 말한게 틀린글이 아닌데 굿잡스는 왜이리 광분하는지...
그래서 내가 고려도 마찬가지라고 본다고 했는데 이게 또 고려 비하가 되나?
참 굿잡스 어렵게 사네....
맞아요
전 현시대적 입장에서 고대사 재단하고있는것 맞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라시대나 고려시대를 비하한건 아니죠.
신라시대에 경주인구가 100만이나 되고 고려시대에 엄청난 귀족문화가 형성되고 이런글 숱하게 봤지만 그 밑바탕의 민중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표현하지 않는 우리역사에 대한 아쉬움이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좌뽕에 민중역사쟁이는 아니고요.
다른나라와 비교하지 않고 신라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 이렇게 흘러가는 역사속에서 우리나란 무역에 집중한적도 있고(신라,고려) 무역을 끊고(물론 대외환경의 변화때문이기도 하지만) 농업생산력에 치중하다 자본축적을 못하고 결국은 일본에 나라를 잃은걸 보고 우리나라가 나아갈방향이 뭘까 그냥 궁금해 끄적거린것뿐이죠.
평소 굿잡스님이 역사적 소견이 대단한건 알고있고요(비아냥 아님) 하지만 그런 역사적 사실속에서 왠지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이 과거에 비교되서 끄적거렸네요.
다른나라와 비교하지 않고 신라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 이렇게 흘러가는 역사속에서 우리나란 무역에 집중한적도 있고(신라,고려) 무역을 끊고(물론 대외환경의 변화때문이기도 하지만) 농업생산력에 치중하다 자본축적을 못하고 결국은 일본에 나라를 잃은걸 보고 우리나라가 나아갈방향이 뭘까 그냥 궁금해 끄적거린것뿐이죠.>
방식도 우리처럼 온돌 구조도 없다보니 일반 백성들은 실내에서 매캐한 연기속에 상당히 불결하고
추위속에서 살았고 이건 왜국의 지배층도 대동소이 했음. 그외 특히나 우리는 각 집마다 담장과 구조자체
가 개인간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게 따로 설계되어 있던 반면에 왜국은 그런 구조도 없이
무엇보다 에도시대 주요 대도시 쿄토, 오사카, 에도(도쿄)등은 허술한 밀집 목재 가옥으로 전
염병과 함께 일본재이사’(日本災異 史)에 따르면 1590년대 이후부터 기록된 소소한 걸 뺀
대형 화재만 779차례나 이를 정도였음.(얼마나 끔찍했는지 알만하죠) . 기와라는 것도 왜국
은 고대에는 워낙 귀해서 나라 헤이안 시대에도 판개궁이라고 왕성 조차도 판자 지붕이
대다수였던게 실상에 에도시대에도 일반 백성은 제대로 꿈도 못꾼 주거였음. 사무라이나 대
상인들 기와라는 것도 보급형 암기와로 우리처럼 암,숫기와의 고급형도 아니였고.
대개 성곽을 쌓을 때 높은 산을 베고 있다. 가끔 언덕이나 산기슭을 나와,
또한 구불구불 둘러 있는 것이 보인다. 큰 것이 날아갈 듯 치첩이 솟아 있고,
작은 것도 우뚝하게 표관이 웅장하다.
환취(황해도 봉산군에 있는 누각)는 날아갈 듯 아름답고, 총수(산 이름)는 구름이 이어졌다.
보산(관<關> 이름)에는 서기가 날아오르고, 금암(관<關> 이름)에는 시내가 통과한다.
[개성은] 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나부끼고, 달밤에 음악소리 들린다.
그 민물(民物)은 풍성하여 실로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는 밀집하니 또한 서경(평양)에 견줄 바가 아니다.
[서울은] 트인 길과 통한 거리는 바르고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고,
잘라낸 듯한 처마에 우뚝 빛나는 집이다.
모든 집은 높은 담이 있어서 바람과 불을 막고,
방마다 북쪽 창을 뚫어 더위를 피한다.
[서울에는] 종고라는 다락이 있다. 성 안의 네거리에 있는데 매우 높고 크다.
서울 안에 우뚝 솟았고, 길가에 높고 높도다.
시끌벅적 수레와 말 소리가 울리고, 끝없이 어룡 유희가 나온다.
식기는 금, 은, 동, 자를 섞어서 쓰고, 품물(品物)은 바다와 육지의 진기한 것이 고루 많다.
경기 안의 경치로는 한강이 제일이다.
누대는 높아 구름을 막고, 물은 푸르러 거울처럼 비춘다.
나루로는 양화도가 있는데, 물산(物産)이 또한 번성하다.
활은 중국의 제도에 비하면 조금 짧다. 그러나 화살은 매우 잘 나간다.
-명(明)의 동월(董越)이 1488년의 조선을 보고 1490년에 쓴 조선부[朝鮮賦]-
이 나라는 풍요하여 많은 쌀과 보리가 나고, 과일로는 배, 호두, 무화과, 밤, 사과, 잣,
그리고 무진장한 꿀, 약간의 비단, 다량의 면화와 베를 생산하고 있다. 지하자원으로는
금과 은 광산은 적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말과 소, 양질의 노새, 당나귀, 게다가 전 국토에 걸쳐
수많은 호랑이가 서식하고, 그 밖에 갖가지 다양한 동물이 있다. 그들이 만든 공작품은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그들이 솜씨가 좋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피부색이 하얗고
건강하고 대식가들이며 힘이 세다. 그들은 터키 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역대의 조선 국왕들은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도시에 큰 궁전을 지었는데,
그곳에 수많은 가신을 거느린 관청이 있었다. 서민들의 집은 대부분 기와지붕이며,
그 밖에는 초가지붕으로 그다지 청결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귀인과 부호들은
결이 고운 식물로 짠, 정교한 장식이 있는 극히 질 좋고 광택이 나는 돗자리를
집안에 깔고 있는데, 일본인이나 일본에 오는 포르투갈 인들은 그것을 매우 진귀하게 여겼다.
우리는 나가사키에서 조선으로부터 들여온 몇 벌의 백의를 보았는데, 그 옷에는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게 공을 들인 자수를 해 놓았다. 그것은 어떤 부분은 짠 것인지
아니면 실과 바늘로 꿰맨 것인지 여간한 시력이 아니고서는 구별이 불가능 할 정도였다.
이상의 내용들이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사람들을 통해 관백의 궁정이
조선에 대해 입수했던 정보의 요약이다.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1532~1597년)의 일본사(Historia de Japam)-
(5월 3일) 술시(戌時) 조선의 도읍 동대문으로 진입, 거기서 황성(皇城)의 모습을 바라보니 옥